가재미 - 문태준

2005.04.04 18:09

홍인숙(그레이스) 조회 수:304 추천:5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  *


문태준이란 시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건 멀리 타국에서 한국문학계에 대해선 전혀 모르다시피 하면서
겨우 구사하는 모국어로 시를 긁적거리는 나의 부끄러운 부분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시 읽기 도중에
'가재미'라는 시제가 눈에 띄어 호기심으로 읽었다.
그리곤, 첫 줄부터 곧바로 시에 흡입되어 마지막 행까지
단숨에 읽기를 몇번을 반복하며 애틋한 감동에 빠져들었다.

임종을 앞두고 죽음만을 응시하는 환자를 두 눈이 몰려있는
가재미로 비유한 시인의 시안이 놀랍다.
흘러간 날들의 기억을 더듬어 삶과 죽음을 구체적으로 탐색한 후
묘사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다

오늘도 좋은시를 발견하고 시읽는 재미에 젖어든 행복함을 안는다.
시인은 좋은시를 쓸 때 보다 이렇듯 좋은시를 만날 때 더 행복한 것 같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479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광옥 2004.08.29 138
10478 세계의 명 연설을 찾아서 이승하 2004.08.30 231
10477 '여성'에 대한 명상 이승하 2004.08.30 210
10476 그림자(子) 백선영 2004.08.30 71
10475 점의 노래 / 석정희 석정희 2004.08.30 118
10474 영혼을 담은 글 이승하 2004.08.31 183
10473 젊은 장례식 오연희 2004.09.01 116
10472 노래방에서 오연희 2004.09.01 176
10471 장효정 2004.09.02 74
10470 산다는 것은 장효정 2004.09.02 57
10469 촛불 장효정 2004.09.02 54
10468 기도 장효정 2004.09.02 37
10467 우리집 장효정 2004.09.02 55
10466 어머니의 강 장효정 2004.09.02 63
10465 백두산 천지 장효정 2004.09.02 38
10464 묘향산 일기 장효정 2004.09.02 47
10463 그랜드 캐년 장효정 2004.09.02 46
10462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타포의 세월, 그 정체 -최석봉 시집 <하얀 강> 문인귀 2004.09.03 50
10461 악어처럼 입을 벌려봐 김동찬 2004.09.06 67
10460 아내의 꿈 김동찬 2004.09.06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