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또냐, 마누라냐."

2006.01.16 14:55

정찬열 조회 수:84 추천:3

  애당초 이발소가 아닌 미장원에 들어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견습생 같은 미용사가 내 쪽으로 운명처럼 다가올 때, 그리고 무언가 비극적인 예감이 스쳐 지나갈 때, 그녀를 단호히 거절하지 못한 게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설픈 솜씨로 숭덩숭덩 머리털을 잘라 내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왼쪽 오른쪽을 돌아가며 수 십 번 깎고 다듬고 하더니만, 이발을 마치고 보니 까까중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장삼을 입고 바랑을 메면 영락없는 탁발승이었다.
  남자머리도 잘 다듬더라는 친구 말을 믿고, 개업한 미용실을 도와주는 셈치고 들렸다가 낭패를 본 셈이다. 이발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참 시원하시겠습니다'하는 인사를 받으며 느껴야 했던 불편한 심기를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머리 한번 잘못 깎은 일이야 머리카락이 자라면 금방 잊혀지는 일이다. 허지만 우리 일상에서 잘못 선택한 일 때문에 두고두고 당해야 하는 아픔과 괴로움이 한 둘이 아니며, '아니오'를 말하지 못해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 또한 적지 않다.
  과거는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구석과 동네방네 소리쳐 알리고 싶은 화려한 순간의 상반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된 이유를 곰곰이 반추해 보면 대부분 선택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음식을 고르고 물건을 사는 일, 학교와 직장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만나는 일 등, 무수한 선택을 해야한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을 위해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최선의 선택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능력의 한계, 시공의 제약과 정보의 제한, 그리고 과장된 광고처럼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가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론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실생활에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은 것 같지도 않다. 이론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선택이 일상생활에서 헤아릴 수 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 집은 '또또'라고 부르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코카 스파니엘 종류인데 들여온 지 3년 가까이 된다. 내가 책임지고 키우겠다며 탐탁지 않아 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기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제법 열심히 돌봐주다가 언제부턴가 바쁘다는 핑개로 등한시하게 됐다. 그러자 여기저기 털이 날리며 집안이 지저분해지고 할 일이 많아지자 아내의 불평도 높아갔다. 급기야 몇 달 전부터 아내는 이놈을 누구에게 주어버리던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눈에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갱년기 때문에 작은일에도 민감한 것 같다는 친구 아내의 귀띔을 듣고보니 아내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선듯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더니 최근에 '또또를 버리던지, 마누라를 보내던지' 하나를 선택하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참 난감하다.
  어제 개밥 한 포대를 또 사왔다.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에니멀 쉘터에 보내야 하는데, 그 결과를 환히 알고있는 나로서는 차마 못할 선택이니 망설일 수밖에.  
  미장원에서 견습생 같은 미용사는 '노'하고 거절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겠지만, 이번 경우는 쉽지가 않다. 개밥이 다 없어지는 날,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는 녀석은, 다가올 제 숙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도 때도 없이 먹이를 달라고 낑낑대고 있다.
   마누라가 제시한 운명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또또냐, 마누라냐" 그것이 문제로다.  <2006년 1월 18일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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