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수필토방 보고

2008.01.19 05:17

미문이 조회 수:404 추천:1

1월 수필토방 보고

참석자: 강치범. 김동찬. 김영교. 김원길. 박복수. 지희선. 최석봉(가나다순/7명)
날짜: 1-14-‘08(일요일)
시간: 오후 4시
장소: 가톨릭 문화회관

활동 내역:

  
1. 오피니언: 나의 수필쓰기/최석봉
  재미한국문협 부회장인 최시인은 박연구 수필선집 중 ‘바보네 가게’와 한국일보에 발표한 자신의 작품 ‘바보들의 함성’ 2편을 선정했다. 직접 자신이 낭독한 후 이렇게 수필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수필은 쓰고 싶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쓰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몇 년이 안 되었고, 아직까지 수필이론 정립이 완전치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수필은 진실만이라는 사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완벽한 토대위에 수필의 맛을 위해 ‘허구’라는 계념이 도입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수필은 ‘진실’과 ‘문학의 혼혈’이라고 주장하는 편에서 보면, 수필의 허구 도입이 인생의 살아있는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문학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차라리 엄숙주의나 도덕주의 그리고 지나친 고향을 그리는 그런 수필보다는 ‘존재의 문제’나 ‘행복을 주는 문제’ ‘웃음을 주는 문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허구의 도입’은 완벽한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토대위에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변하였다.
  또한 수필은 보여주기식 문장과 말하기식 문장에 대한 인식부족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현장감을 주는 묘사가 너무 적고, 설명중심의 마치 해법식의 수필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렇게 되니 단어 선택에서도 마치 도덕주의가 군림을 하고 있는 데, 과연 작가들의 행동과 생활은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기지, 멋진 풍자, 해학의 수필을 위해서도 '허구의 도입'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2. 수필감상:
  전북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인 수필가 박영란의 ‘나이테’를 강치범 수필운영위원장이 낭독한 후 ‘나이테’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가 오는 날, 일방 통로로 달리는 외길에서 앞의 한 트럭에는 벌목한 나무를 가득 실어가는 것을 따라가게 된다. 이때부터 작가의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이미 뿌리와 가지를 다 쳐버린 나무 둥지라, 새소리와 바람에 이는 나뭇잎 소리도 함께 사라졌을 것이고 해와 달, 바람과 구름, 비와 눈 그들과도 이별이라는 것에 길게 누워 벼렸을 것이라고 상상을 한다.
  하지만 누워있는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순간, 자신의 여권에 찍힌 지문을 생각한다. 여권은 속에 박혀 있는 사진과 생년월인 그리고 주소와 지문이 자신을 대변한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에 박혀있는 사진과 숫자보다는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는 것이 지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의 모든 흔적을 나이테가 품고 있듯, 사람의 지문에도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계속해서 작가 자신의 손바닥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일본은 재일 동포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하는 이유와 주홍글씨의 여주인공 헤스터의 도덕적 낙인을 비유한다. 또한 ‘뿌리’의 작가 앨릭스 헤리스가 5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수령 200년을 알리는 나이테를 가진 거목 한 조각을 선물 받는다. 할아버지는 한 조각의 거목의 나이테를 가리키며 ‘노예해방이 선언된 해’, ‘너희 부모가 다닌 대학이 설립된 해’, ‘네가 태어난 해’를 가르쳐 준다.
  이 나뭇조각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고, 자신의 가계를 9년 동안 추적을 하면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혀온 쿤타 킨테의 6대에 걸친 모계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이테는 후천적이고, 지문은 선천적일 것이다. 전자는 한겹 한겹 세월의 때를 늘려갔다면, 후자는 태어남과 더불어 가지고 나오는 업의 고리인지 모르겠다고 작가는 생각을 한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나이테가 보인다. 거울에 비친 눈가의 잔주름과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나이가 그것일 것이다. 어쩌면 사람의 얼굴은 나이와 더불어 살아온 세월과 연륜의 흔적이 만들어 놓은 나이테인지 모른다는 내용이다.



  3: 수필토론/ 김동찬
  ‘높은 곳과 낮은 곳’은 김시인이 러시아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잡았다.
  5,642미터의 엘부르즈 산을 재미산악회원들과 함께 등정한 후, 다음 목적지인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가기 위해 모스크바 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역 중앙은, 넓은 공간을 이용하여 식당과 기념품 가게 그리고 간단한 스낵이나 과일을 파는 조그만 상점들이 마치 어떤 거리에 와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대원들은 맥주를 사다 마시기도 하고, 역사를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또 어떤 대원들은 밤 열차를 타면서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은 먹을거리를 파는 상점에서 본 오이소박이 눈에 뜨인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 점원에게 오이 값을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 점원은 러시아말로 화를 내면서 나가라는 몸짓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오이를 사고 싶다.”
  정중하게 영어로 다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점원은 계속해서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나가라는 시늉과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온 자신은 ‘팔기 싫으면 관두라지!’라고 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속은 영 말이 아니었다. 결국 러시아 사람들의 불친절함과 쌀쌀맞음에 자신은 복수라도 하듯 러시아에 대해 마구 점수를 깎아 내린다. 더 나아가서 공산주의의 폐단이 아직도 몸에 베여 있다고 자부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밤 열차에 올라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 거울 속의 자신은 완벽한 거지였다. 그 이유는 엘부르즈 등정 때 무공해의 공기를 뚫고 내리꽂히던 햇살과 눈에 반사된 빛에 자신의 얼굴 군데군데 딱지가 졌고, 피부가 벗겨진데다가 수염까지 제멋대로 있어서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그 당시 빈 컵 하나를 달랑 들고 있었으니 그 점원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거지로 본 것이었다.
  자신은 어떤 처지에 의해 완벽한 거지의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내가 보는 내 자신’과 ‘남이 보는 나’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쩌면 이 사건은 웃어넘길 수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속사람이 욕심과 독선에 빠져든 추한 모습이 다른 이웃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는 내용이다.

     강 정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