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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 잠들다

2007.02.24 18:54

윤석훈 조회 수:775 추천:57

나무 속에 잠들다” 故 오규원 시인 수목장 | 詩관련 2007.02.06 14:04

휘수http://blog.daum.net/rainspace/10719566  
[부고] “나무 속에 잠들다” 故 오규원 시인 수목장서울신문


지난 2일 66세를 일기로 별세한 시인 오규원씨가 자신의 시처럼 나무 속에서 영원한 잠이 들었다.

오씨의 골분은 5일 오후 강화도 전등사 부근 야산의 아름드리 나무 밑에 안장됐다.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진 오씨의 장례식에는 가족, 친지들과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제자인 소설가 신경숙, 시인 양선희·함민복·장석남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자인 시인 이창기씨의 사회로 진행됐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오씨가 중환자실로 옮겨지기 직전인 지난달 21일 제자인 시인 이원씨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적어 넣은 4행시의 끝구절은 마침내 현실이 됐다. 한 제자는 “선생님은 생전에 저 세상으로 가면 화장해서 뿌려달라고 했다.”면서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기려 수목장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임학계의 거두인 김장수 전 고려대 농대 학장과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아온 독림가 임종국 선생 등이 수목장을 했다.1968년 현대문학에 추천완료돼 등단한 고인은 10여권의 시집을 내는 한편 20여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서울신문,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시인 오규원, 소나무 아래에 잠들다 [중앙일보]


  
유족들이 고 오규원 시인의 유골을 모시고 솔숲으로 가고 있다. 거기, 어느 품 넓은 소나무 아래에 시인은 묻혔다. [강화도=최정동 기자]



소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온 모양이다.

시인 오규원이 갔다. 강화도 정족산 기슭의 소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름하여 수목장(樹木葬). 시인의 뼛가루는 송진이 되고 가지가 되었다가, 이윽고 솔방울로 매달릴 것이다.

5일 오후 2시쯤. 산비탈 소나무 숲에 고인의 옛 제자들이 두 손 모아쥐고 둘러섰다. 이창기.이경림.신경숙.황인숙.윤희상.장석남.박형준.양선희.최정례.이원.강영숙.천운영.윤성희.조용미 등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제자들이다. 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 들으며 시를 깨우친, 이제는 어엿한 시인과 소설가가 된 제자들이다.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들'('프란츠 카프카' 부분)이다.

평생의 절반을 알고 지낸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시를 읽었다.

'문득 돌아보니,/규원이, 자네가 없네./둘러보아 찾아도/규원이, 자네가 없네./…/규원이, 자네/이제 무엇이 되려는가./여기로부터 자리 옮겨/어디로 가려는가./…/나무 한 가지의 정령이 되어/영원의 하늘로 솟아 날아오르려는가/그것이 허망한가/그것이 슬픈가, 한스러운가.'

시인은 1991년부터 아팠다. 흔히 폐기종으로 알려진,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았다. 허파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기능을 잃어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살아야 하는 병이다. 하여 강원도 인제.무릉, 경기도 양평 등 공기 맑은 곳에서 귀한 숨 아껴가며 시 쓰고 살아왔다.

지난달 숨이 가빠왔다.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 온 시인 이안의 손바닥에 선생은 손톱으로 시를 썼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1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2월 2일, 시인은 66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병문안 왔던 이경림.최정례.양선희는 졸지에 선생의 임종마저 보게 됐다. 추모사에서 신경숙은 "그렇게 편찮으신 대로, 그렇게 늘 곁에 계실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겨우 말했다.

고인은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한국 시사에서 오규원이란 이름은 자체로 하나의 계보였다. 수다한 제자 때문이 아니다. 그가 평생토록 쌓은 시업(詩業), '날이미지의 시론' 때문이다.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산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그러한 상태의 살아 있는 이미지들을 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날[生]이미지 시이다.'('날이미지와 시'에서, 2005년)

인간의 관념이나 수사 따위로 오염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그는 추구했다. 그래서 시창작실습 시간, 제자들이 밤새 쓴 습작원고에 시뻘건 줄 죽죽 그으며 "시가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호통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늘 무섭게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업 끝나고나면 선생은 막역한 친구가 됐다. 맞담배를 폈고, 후루룩 함께 라면을 들이마셨다. 87년 제자들이 길거리로 나가겠다고 결의했을 때, 선생은 "막는 것은 옳지 않겠지, 다치지만 말아라…"고 말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꾹꾹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공장에서 학비를 번 뒤 늦깎이로 선생의 제자가 된 시인이다. 굳이 서울예대를 선택한 까닭을 그는 "오규원 선생이 계시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오규원 선생이 하필이면 떠돌이 시인이 정착한 바로 그 섬에 묻히고 있었다. 선생의 제자 문인들은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그를 능참봉으로 명했다. "선생을 평생 곁에서 모시게 됐다" 했더니 "이제부터는 바람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겠지요"라고 답한다.

소나무 가지, 또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로비에서]오규원 시인 수목장 날

동아일보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것을 시라고 생각한다면 저 창문에서 뛰어내려라.”


스승의 수업을 들을 때 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삐삐가 울리면 2점 감점, 제출한 습작은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채로 돌려받았다.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난 날, 제자들은 “고아가 됐다”며 부둥켜 울었다.

  



5일 오규원(사진) 시인의 수목장이 치러진 인천 강화군 전등사에는 젊은 문인 80여 명이 모였다. 신경숙 황인숙 함민복 장석남 박형준 천운영 윤성희…. 한국 문단을 이끄는 주역들이자 모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오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소설가 신경숙 씨는 “선생님이 오랫동안 편찮으셨지만 그대로 항상 곁에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승의 뼛가루가 묻힌 소나무 앞에서 양선희 시인은 “저 오늘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미장원도 다녀오고 손톱 손질도 했어요. 예뻐 보여요?”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함민복 시인은 “나무처럼 몸도 마음도 군살이 없으셨는데 나무가 되시네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장석남 시인은 “내가 시 잘 쓰는 청년인 줄 알았는데 오 선생님 수업을 받고 절망해서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며 “졸업하고 1년 뒤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격려를 해 주시더라. 그때 큰 힘을 얻었고 이듬해 등단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추모사로 자작시를 낭독했다. 고교 때 써 보고 손에서 놓았던 시를, 오랜 문우를 위해 수십 년 만에 다시 쓴 것이다. “자네 앉았던 자리/아직 따스함 남아 있고/똘똘한 자네 목소리/귓가에 맴돌건만,/규원이, 자네는 이제 아무데에도 없고/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네.”

  


병상에서도 휴대전화 문자로 하루 한 행씩 시를 썼다던 오 시인. 시밖에 몰랐던 시인은 생애 내내 외로웠다. 15년 넘게 폐기종으로 투병해야 했고, 문단의 사대부적 구조와 문학 권력을 비판했던 단호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날 시인의 마지막 길에는 그에게 수도 없이 혼나던 제자들이 기꺼이 함께했다. 그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시구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처럼 시인은 전등사 뒷산 소나무 아래서 잠들었다.

  


강화에 사는 함 시인이 ‘능참봉’을 맡기로 했다. 위암 투병 중인 김영태 시인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보내왔다. 그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강화=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