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훈 서재 DB

문학자료실

| 윤석훈의 창작실 | 내가읽은좋은책 | 독자창작터 | 목로주점 | 몽당연필 | 갤러리 | 공지사항 | 문학자료실 | 웹자료실 | 일반자료실 |

김명인---꽃을 위한 노트

2006.05.17 23:24

윤석훈 조회 수:288 추천:15


   1

겨울을 견뎌낸 꽃나무나
겨울을 모르는 푸새도
함께 꽃을 피운다
寒地의 꽃 더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온몸이 딛고 선 辛苦 때문일까


  2

방학을 끝내고 출근한 연구실
겨우내 움츠렸던 금화산 홀로 꽃대를 세우고 있다
보라 꽃 몇 송이가 절벽처럼 아뜩했다
어떤 우레 저 蘭의 허기 속을 스쳐간 것일까
석 장 속꽃잎으로 가득 퍼담은 노란 조밥

뿌리 부근에 낙화가 있어 살펴보니
또 다른 꽃대 하나가 온몸을 비틀면서
두 그릇이나 꽃밥을 돌밭에 엎질러놓았다
각혈 선명한 저 절정들!
연한 줄기 자칫 꺾어버릴 것 같아
추스려 담으려다 그만두었다

점심시간에는 교직원 식당에서
암 투병하는 이선생 근황을 전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어둠 너머로 그가 흔들어 보냈을
플라스크 속 섬광의 파란 봉화들!
오후에는 몇 학기째 논문을 미룬 제가가 찾아왔다
논리의 무위도식에 이끌려 다니는 삼십대 중반에게
견디라고 얼어 죽지 말라고
끝내는 텅 빈 메아리 같아서 건넬 수밖에 없던 침묵
그에게 거름이 되었을까 절망으로 닿았을까
꽃대 세우지 못하는 詩嶪이 탕진해 보내는
눅눅한 내 무정란의 시간들
서른 해 더
詩 속에 구겨 넣었던 나의 논리는 무엇이었나?


  3

절정을 모르는 꽃 시듦도 없지.


  4

내가 나의 꽃 아직도 기다리듯
너는 네 허공을 지고 거기까지 가야 한다
우리 불행은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나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 아닐까?
추위도 더위도 모르는 채 어느새 갈잎 드는

활짝 핀 꽃이여, 등 뒤에서 나를 떠밀어다오
꽃대의 수직 절벽에서
낙화의 시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