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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만년필

2006.03.11 08:15

윤석훈 조회 수:294 추천:21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
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
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요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
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
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별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
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
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
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
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
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
면의 밤을 밝힌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
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
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
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
리 푸른 악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