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훈 서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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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새앙철 지붕 위로 쏟아지는 쇠못이여
쇠못 같은 빗줄기여
내 어린날 지새우던 한밤이 아니래도 놀다 가거라

잔디 위에 흐느끼는 쇠못 같은 빗줄기여
니맘 내 다 안다
니맘 내 다 안다
내 어린날 첫사랑 몸져눕던 담요짝 잔디밭에 가서
잠시 놀다 오너라

집집의 어두운 문간에서
낙숫물 소리로 흐느끼는
니 맘 내 자알안다
니 맘 내 자알안다



풀밭에 떨어지면
풀들과 친해지는 물방울같이
그대와 나는 친해졌나니
머언 산 바라보며
우리는 노오란 저녁해를 서로 나누어 가졌나니

오늘 먼 산 바라보며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대의 무덤
빈 하늘 가득히 비가 물려와
눈알을 매웁게 하나니



바람이여 네가
웃으며
내게로 달려왔을 때
나무는
가장 깊숙한 빈터에서
흡족한 얼굴을 밝힌다

바람이여
네 지순한 손길이
내 몸을 열어놓을 때
나는 낮은 움직임
바다 밑으로 손을 펴
눈먼 이의 눈먼 가슴을 더욱 가라앉힌다



지난해의 빗물에 녹이 슨 꽃이 다시 녹슬기 시작한다면
바라보다가 녹이 되어 떨어진 당신의 눈은
향기가 소모된 나무껍질일 것이다
다시 녹슬은 꽃이 우수수 진다면
문질러보다가 분질러진 당신의 손은
참혹한 덩어리일 것이다
빗줄기들이 유리에 부딪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귓속에 병마개를 틀어막고 들어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당신의 시간이 멈춘다면
시간은 죽어 숨소리를 그칠 것이다

다섯

한없이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이 되는 당신의 두 팔을 받
으며 편안히 눕는다.당신의 마음은 나의 옷,포근한 온기
를 온몸에 감고 잠이 든다.당신의 애정은 푸른 밤,나의
소화기관은 하루종일 꽃망울을 벌여 일초일초 꽃피워낸다
태양이 한 아이의 손바닥에 가지런히 씨앗을 올려놓고
웃음짓듯이 당신의 눈길이 내 눈을 묶을 때 나는 순한
물이 된다.속삭이고 싶다.지나가는 바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다.형태 없는 가을에,내 손에 와 닿는 것들은 순
한 물이 되어 고인다.나의 틀은 좁은 마당에서도 알맞다.
당신의 눈이 내 운에 고이고,나는 잘 길들여진 어린 나무,
친근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싶다.오래오래 헤매고
싶다.형태 없는 가을에 사면이 하얗게 칠해진 마당에서 나
는 순한 물이 되어 고인다.당신의 살 위에 내 살을 댄 채.

여섯

비 내린 풀밭이 파아란 건
풀잎 속으로 몰려가는 푸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풀밭에 힘을 주는 푸른 손목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풀밭이 노오랗게 시드는 건
힘을 주던 손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대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들의 몸 속에서도 힘을 주던 손목이
사나워져가고 있다고

세명의 사나이가 풀밭에 서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하나다
세 명의 사나이가 풀밭을 지나가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둘로 격리된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속에서는 분질러진 마음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균열된 유리창을 통하여
풀밭을 바라보는 세 가지 마음들을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를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비 내린 풀밭으로 걸어나가는 세 개의 발이
갇혀가다가 도명쳐나오는 시간의 궤적과 공간을
그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를

일곱

그믐밤 헛간에 빠졌을 때다.나는 부러진 도끼처럼 뒹굴
었다.완강한 어둠 속에서 흰팔의 소리들이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다 탄 심지처럼 겨울나무들이 몰려오고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바람소리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흰팔의 소리
들이 뼈를 쪼개고 있었다.소리들은 찢어진 살을 만지고 있
었다.바늘을 삼킨 위독한 나를 부르며 잃어버린 나라에서
도 불타오르던 암석들을 데려오고 있었다.물이 엎질러진
마당구석에서 아이들은 얼굴을 비춰보며 놀고,나는 얼음
이 갈라지는 헛간의 빙벽에 매달려 있었다.이번에는 소리
들이 뼈를 부딪히고 있었다.소리들은 바다로 기울어져가
고,내 안에서는 하얗게 고함치며 갈라지는 뼈가 있었다.
그러자 바람이 메마른 나뭇가지의 살을 씻어내리다 실신하
는 바다에서 흰팔의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