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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선생의 빗

2006.02.25 23:50

윤석훈 조회 수:205 추천:13

  선생은 내게 옷걸이였고 나는 선생에게 부채였다. 허기진 까마귀들이
그 위에 내려앉을 동안 모자는 코를 누르고 숨을 참았다. 여행 가방을 들
고 길 한가운데 서서 선생의 반대편과 나의 맞은편을 생각한다. 수돗물처
럼 그림자는 태양에서 한 방울씩 빠져나와 부채를 적셨다. 바람은 맨발로
신발이 있는 곳까지 걸어야 했다.

  선생의 무덤 앞에서 아이들은 귀마개처럼 단단해져 서로의 말은 듣지
않았다. 이곳은 문은 없고 문지기로 가득한 선생의 입구. 나는 물고기를
퍼올리고 물 위에 여러 발자국을 찍는 어떤 방 하나를 보았다. 저 물렁거
리는 방 때문에 누군가는 다리가 길어지고 길어진 다리를 하루종일 접으
며 누군가는 울 것이다.

  선생은 따뜻한 돌을 쥐며 겨울의 부채와 논 기분이었다. 엄마로 떠나 엄
마가 되기 전으로 돌아온 어디쯤. 선생은 겨울에도 여전히 자라는 초록빛
운동화의 흰 끈을 바라본다. 뒷편이 없어져야 하는 건 계단도 마찬가지죠.
저는 통나무 위에 실린 코끼리의 여행과 그 코끼리의 발을 때렸던 사슬의
여행에 대해 말했어요. 강 하류의 방향으로 가라앉고 강 상류에서 떠오른
나를 만나는 기분. 선생은 문밖의 사람들이 줄 하나로 걸린 얇은 땅 위를
걷는다는 걸 몰랐다. 맨발로 추운 겨울 밤을 돌아다닐 때, 문득 깨어 차가
운 얼음 조각이 된 자기를 주워 모을 때,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빗을 꺼
냈고 얼어붙은 뽀족한 머리칼을 빗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