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835 추천 수 2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듬나물에 대한 추억


며칠 전 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야채코너에 비듬나물이 있어 무심코 집어 들었다. 한국에서는 종종 비듬나물을 먹으며 초등학교 때의 내 단짝 생각을 하곤 했는데 미국에 온 후로는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비듬나물을 보니 내 어릴 적 짝지 생각과 함께 그 때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그 때도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입이 짧았던 나는 그 당시 내 기억에 그리 잘 살지는 않았으나 도시락 반찬은 할머니가 꽤 신경을 써 주셨던 것 같다.(남들이 보면 누나인 줄 알았던 엄마는 내 어렸을 때 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반도 안 먹고 남겨 오는 도시락을 보고 속상한 할머니는 “매일 장조림만 싸 주랴? 호강이 요강이라 배가 쫄쫄 굶어 봐야 반찬투정 안하지..”라고 푸념하였는데 나는 아랑곳도 없이 “맛없는 걸 어떡해” 하고 책가방을 휙 집어 던지고 쪼르르 동네 밖으로 나가 골목길에 위치한 요즘으로 말하면 불량식품인 뽑기 아저씨의 달고나 사탕을 사먹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도시락을 다 비우고 반찬 또한 깡그리 비우는 할머니의 입이 귀 밑에 까지 째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때 내 옆 자리는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비어 있었는데 하루는 한 아이가 전학을 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이 아이의 첫인상이 좋았던 것 같다.  우린 금방 친해졌는데 좀 이상한 것은 얘는 점심시간에 항상 같은 반찬만 싸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슨 계란후라이나 오뎅같은 것도 아니고 조그만 양은 벤또에 담은 무슨 나물 같은 거였다. 내가 그게 뭐냐고 물으니 비듬나물이라고 한다. 나는 그게 얼마나 맛있으면 같은 반찬을 계속 싸 올까 하고 생각하다가 하루는 그 얘에게 혹시 너 내 반찬이랑 바꿔 먹어 볼래? 하고 거절당할 지도 모르는 제안을 했더니 녀석이 의외로 흔쾌히 그러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금은 짭짤하고 조금은 매콤한 비듬나물이 내게는 묘하게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내 도시락의 밥과 반찬통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깨끗이 비워져 할머니를 기쁘게 했다.

학년이 바뀌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이 친구를 다시 생각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인가 영어 교과서에 실린 감자(potato)란 단편소설을 배울 때 인 것 같다. 그 소설의 내용은 매일 감자만 식탁에 오르는 한 가난한 가정에서 어린 주인공이 마침내 자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성장소설인 셈이다. 나는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매일 점심시간에 비듬나물만 반찬으로 싸 왔던 그 짝지가 가난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 버렸다. 그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그 퀭한 큰 눈에 녀석의 착한 모습이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

세월이 한 참 흘러 대학 일학년 때로 기억하는 데 여름 무더운 저녁 동네 당구장에서 아저씨랑 한게임 하고 있는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다가와 혹시 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세요? 하고 물으니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을 대며 자신이 그 짝지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짝지를 알아보았으나 그 변해 버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행색이 남루한 것을 떠나서 그 순박한 큰 눈은 왠지 모를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는 듯이 보였으며 입가엔 천진스런 웃음기가 사라지고 뭔지 결의에 찬 모습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술 한 잔이 들어가니 짝지는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공사판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하였고 가난으로 인해 대학도 못가는 이 사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너무도 변해 버린 이 짝지의 모습에 당황하였고 왠지 나랑은 너무도 멀어져버린 그에게 연민과 동시에 소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전화로 몇 번 연락을 한 것 같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그 후로 가끔 비듬나물을 먹을 때면 이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그나마도 미국에 온 후 십 몇 년 동안 한 번도 비듬나물을 먹어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 친구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오늘 뜻밖에 비듬나물을 보니 불현듯 이 친구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옥수수빵 배급받은 것을 우리 할머니가 좋아한다고 하자 이것도 갖다 주라고 내게 주던 이 순박한 짝지에서 “야! 나는 말이야 앞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고 살거야.”라고 마지막 만났을 때 절규하다시피 외쳤던 냉혈한으로 만들었던,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오늘은 오랜만에 비듬나물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그러나 내가 암만 요리를 잘 한다지만 도시락 반찬이라곤 집 앞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비듬나물만 뜯어 간장과 고추장에 버무리며 엄마의 눈물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함께 들어간 그 절묘하고도 비장한 맛의 비듬나물을 내 어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03 10월의 형식 강민경 2015.10.07 189
2202 10월이 오면/ 김원각-2 泌縡 2020.12.13 142
2201 11월 새벽 이은상 2006.05.05 169
2200 11월에 핀 히비스커스 (Hibiscus) / 김원각 泌縡 2020.11.26 75
2199 11월의 이미지 강민경 2015.11.13 160
2198 11월이 왔으니 / 성백군 하늘호수 2020.11.03 120
2197 12 월 강민경 2005.12.10 191
2196 12월 강민경 2018.12.14 63
2195 12월, 우리는 / 임영준 뉴요커 2005.12.05 190
2194 12월을 위한 시 - 차신재, A Poem for December - Cha SinJae 한영자막 Korean & English captions, a Korean poem 차신재 2022.12.20 154
2193 12월의 결단 강민경 2014.12.16 283
2192 12월의 결단 강민경 2016.12.26 165
2191 12월의 이상한 방문 하늘호수 2015.12.19 187
2190 12월이 기억하는 첫사랑 강민경 2015.12.06 191
2189 1불의 가치 이은상 2006.05.05 744
2188 2014년 갑오년(甲午年) 새해 아침에 이일영 2013.12.26 278
2187 기타 2017 1월-곽상희 서신 오연희 2017.01.10 268
2186 기타 2017년 2월-곽상희 서신 미주문협 2017.02.16 236
2185 2017년 4월아 하늘호수 2017.04.26 102
2184 시조 2019년 4월 / 천숙녀 file 독도시인 2021.04.20 7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14 Next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