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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문학,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오양호 - 문협 평론 분과 회장, 인천대 교수
신동욱 - 문학평론가, 전 연세대 교수
이태동 - 문학평론가, 전 서강대 교수
박정규 - 소설가, 서울산업대 교수
이승하 - 시인, 중앙대 교수

<문학의 민주화 시대인가? 춘추전국 시대인가?>

사회 : 연말에 바쁘실 텐데 이렇게 좌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신동욱 선생은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본에서 몇 번 전화를 드린 적이 있지만, 대구 계명대학 시절에 뵙고는 오늘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태동 : 저도 70년에 계명대학에 있었는데 오 선생과 함께 근무했지요.
사회 : 그 때 이 선생은 30대 초반이셨습니다.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박정규 선생은 박노갑 선생님을 아버지로 두셨으니까 부자가 2대 작가인 셈입니다. 이승하 선생은 형 이동하 교수가 평론가고, 형수님이 또 정효구 교수이니 문인 가족을 대표하는 셈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문학은 사이버 문학, 통신 문학이 대거 나타나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작가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단의 한편에서는 여전히 견고한 빗장을 내리고 있는 동인 형태의 몇몇 문예지들이 문학 권력을 잡고 문학의 중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한 형국입니다.
사이버 문학의 번창을 염두에 둘 때 이 시대는 분명히 문학의 민주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전, 캐논(canon)이 없고 작품 해석도 달라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8도 홍길동이 다 올라와 내가 진짜 홍길동이라고 하는 이런 형국이 돼 있는 때입니다. 문학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니까 문학이 민주화 시대와 같이 간다고 할 수 있고, 2백 종이 넘는 문예지가 발행되니까 문학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시대가 문학의 위기라고 얘기하니 이 말이 맞는지 어떤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먼저 신동욱 선생께서 간단히 견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신동욱 : 최근 작품들을 많이 읽지 못해서 특별히 드릴 말은 없는데, 지금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문예지가 2백 종이 넘고, 문인들이 1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한 달에 생산되는 작품 양도 엄청날 것입니다. 이것을 다 읽어낸다는 자체가 굉장한 성의 아니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 지방에 순수 문예지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작품 속에서 좋은 작품들, 뜻이 있는 작품들을 가려내는 작업도 해야 할 텐데 그 작업량이 엄청나죠.
실제로 누가 읽느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 엄청난 작품들을 비평가나 연구자 생활을 하는 분들이 읽어서 가려내고 수고를 해야 하는데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텐데, 그러면 또 1, 2년씩 시간의 차이를 두고 정리되겠지요. 만약 이런 것이 폭넓게 읽힌다면 알려진 작품을 쓰는 소설가나 시인의 작품은 좀 읽힐 것입니다.
그러나 시에서, 이를테면 80년대 황지우가 일으켰던 것 같은 시들이 과연 지금도 나오고 읽힐 수 있을는지 저는 좀 미심쩍은 생각이 듭니다. 문학을 영화와 관련지어서 얘기한다 하면 이야깃거리는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포괄적으로 수용해서 좋은 글을 쓴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한두 사람의 천재가 시대 전체를 집약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문학은 위기인가?>

사회 : 그러니까 소설의 경우는 어떤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는데, 시대가 달라져서 시의 경우는 여전히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그대로 지속될 것 같다는 그런 말씀 같습니다. 이태동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태동 : 신동욱 선생님, 오래간만에 뵙고 말씀 들으니까 참 감개무량합니다. 오 선생이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제목을 '디지털 시대의 한국문학'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 하고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한정하면 논의의 폭이 좁아지니까 문학의 위기 문제를 거론해 보는 게 어떠냐, 그러면 디지털 시대도 포함되니까,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디지털 시대와 문학의 위기가 관계가 있는가 하면, 많은 독자들이 책을, 문학 작품을 읽기보다는 인터넷에 빠져 있고, 사이버 공간에서 소설을 쓴다고 하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평가되지도 않은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사이버 게임이라든지 채팅이라든지 잡다한 데 정신을 뺏기고, 또 사이버 세계하고 거의 유사한 텔레비전 영상에 많은 독자를 뺏긴 형국입니다.
인구 4천만 명이 넘지만, 문인이 1만 명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에 비교해 좀 기현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독자는 엄청나게 줄었습니다. 거의 영상이라든지 사이버 세계에 다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독자들이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 구별할 줄도 모릅니다. 거기다 문단에 진출(문단 정치)해서, 정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문인이 되어서 판을 치고, 이게 뭐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문학 작품에 대한 선별도 없고 예술인지 예술이 아닌지 구별도 못하고, 이런 시대니까 이것이 바로 문학의 위기라는 거죠.
이런 시대가 지속되면 과연 우리가 고전이라고 평가하는 그 문학이 설자리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구에서는 지금 말씀하신 정전에 대한, 정전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탈권위주의, 또는 탈식민주의 그런 입장이 있는가 하면, 또 그것을 지키려는 예일대학의 브룸 같은 사람은 『웨스트 캐논』이란 책에서 이 정전을 지키려는 운동을 펼치는데 사실 갈등을 일으키고 있거든요. 이것이 정말 문학의 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문단 세력간의 갈등 속에 동인지 중심으로 하는 그런 판도가 문단에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다른 쪽으로는 독자는 적은데 독자를 타락시키는 그런 문학 작품이 계속 양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문인이라고 하면 상당히 위엄이 있고 권위도 있었는데, 요즘 문인은 그렇게 대접을 못 받는 시대이니, 역시 문학의 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외국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나라 문학이 위기를 맞은 원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세계성이 없습니다. 이승하 시인은 평론도 하고 시도 쓰는데, 개인의 감성이라든지 개인의 견해를 시적으로 표현하지만, 시가 한 시대를 말하고, 그 시대를 얘기하는 데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보편성이라든지 세계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우리가 촌스럽게 자꾸 얘기하는 노벨상도 받을 수 있겠지요.
소설도 마찬가진데, 양면성이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떨 때 보면 아주 감상주의에 빠지고 어떨 때 보면 완전히 프로파간다에 빠져버립니다. 또 어떤 사회적인 이슈를 가지고 말이죠. 지성과 감성이 융합된다든지 어떤 철학도 없는 그런 쪽으로 흘러가서 과연 국제적인 무대에서 또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하고 있는 문학의 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카프카의 작품을 보면 사실 우화를 얘기합니다. 우화는 알레고리지만, 삶의 본질을 얘기하거든요. 미국 작가 허만 멜빌의 『백경』같은 경우도 고래가 상징하는 것은 어떤 우주적인 것이 아닙니까. 단순히 고래 잡는 얘기가 아니라, 어떤 보편성·세계성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인류가 공감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과연 우리가 쓰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사회 : 그러니까 여전히 문학은 위기라는 말씀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독자가 없다, 독자가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 모른다, 독자를 전부 텔레비전이나 영상 매체에 빼앗겨버렸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독자를 타락시키는 그런 작품이 많다, 또 세계성이 없고 보편성이 결여된 작품이 많다, 문학이 한쪽은 감상에 빠졌다고 한쪽은 프로파간다로 흘러간다, 이런 현상으로 크게 짚어봤을 때 여전히 문학은 위기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문학비평이 문제가 되겠는데, 지금 평론가들은 유명 신문사 심사라든지 어떤 특정 잡지사의 전속 평론가 같은 성향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1급 평론가라는 사람들입니다. 극소수의 이런 평론가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조각글을 쓰거나, 아니면 골목 비평, 주례사 비평 뭐 흔히 말하는, 그런 형태로 생명을, 문학 생명을 겨우 부지해가고 있습니다.
이태동 선생 말씀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도 없고 시를 읽는 독자도 없는데 평론에 독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례사 비평이라도 해야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들은 열차를 타고 가면서 일종의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평론가들은 그런 행사도 못하잖아요. 시의 경우는 어떤지 이승하 선생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시를 위기에 빠뜨린 것들>

이승하 : 예, 문학의 위기, 특히나 시의 위기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근년에 들어서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판매와 평가 면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집 만드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는데, 올해 들어서 시집을 거의 내지 않아서 제가 그 연유를 물어봤죠. 그랬더니만 '교보문고' 등 시내 큰 서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시집 판매대를 다 없앴다는 겁니다. 서점에 가서 시집을 살 수 없는 시대가 된 거죠. 그래서 이 출판사에서도 올해 들어서 시집은 거의 내지 않고 실용서와 아동물 전문 출판사로 변신을 해나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제 출판 등록도 따로 해가지고요. 창작 동화하고 번역 동화가 제법 잘 나간다고 그럽니다. 아침형 인간이니, 무슨 형 인간이니 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뒤늦게 뛰어들어서 베스트셀러를 터뜨렸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시집을 내겠냐고 반문하더군요. 시를 쓰고 있고, 학생들에게 시란 참 좋은 것이다 시를 써봐라 하며 가르치는 제 입장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암담했습니다. 시 전문 출판사였고, 좋은 시집을 꽤 냈던 출판사였거든요.
서구는 물론, 일본에서도 시집은 거의 자비로 출판한다고 합니다. 시인끼리 돌려보기로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도 그렇게 돼 가는 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시집이 도무지 안 팔리는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을 해봤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문예지 증가에 따른 시인의 양산입니다. 전에는 고급독자였는데, 시를 읽고 향유하는 그런 분들이 다 스스로 나서서 시를 쓰고 있으니 시집을 사 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 자체의 문제인데, 운문성의 상실입니다. 시가 너무 길어졌고, 또 난해해졌죠. 젊은 시인들의 작품 가운데에는, 시를 다년간 연구하고 있는 제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시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보사회의 발전에 따른 활자문화의 위축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고등학교 과정에서 입시 위주로 시 공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거부감을 주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특히 요즘 문학은 그 자체가 가벼움을 추구하죠. 가벼움은 짧음으로도 연결됩니다.
귀여니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소설을 써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죠. 그 소설을 보면 여백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쓰는 인터넷 문자, 이모티콘을 마구 씁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추구한다고 로마의 서정시인 호라티우스가 처음으로 얘기했는데, 오늘날에는 감동보다는 재미에 치우친 느낌이 듭니다.
예전에도 베스트셀러 시집은 있었거든요. 어떤 시인의 시집은 지금도 10대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부수가 팔려 나갑니다. 참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랑타령이 대부분이고 말초적인 감각을 좇는데, 그런 시집들을 여전히 팔리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시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여전히 잘 팔리는 시집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순수문학, 정통문학의 시집은 도무지 안 나가니 일종의 기현상이죠.

<일본에서 기록물 리얼리즘이 보여준 가능성>

사회 : 그러니까 시의 수준 문제가 되겠는데요, 일본에서도 시집은 별로 안 팔리고 실용적이거나 아주 잡다하거나 저질적인 책이 많이 팔리는데, 신동욱 선생께서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신동욱 : 이태동 선생이나 이승하 선생 말씀에 다 공감합니다. 일본은 내가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 가 있는 동안에 주워들은 것을 조금 얘기하겠습니다. 거의 시집은 팔지도 않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거기서 주목받는 것은 역시 소설입니다.
근래에 한 10년을 살펴보면 기록 저작물들 가운데 주목을 받는 게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굉장히 좋게 보는데,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이 어디까지 돌아다니면서 유랑하면서 사는지, 그런 기록물을 보면, 한 기록물 작가가 현지로 계속 추적해 가서 그 사람들의 여러 생태를 보고합니다. 훨씬 실감이 많아요.
나 같은 사람은 19세기적인 문학에 완전히 길들여졌고, 그쪽 공부밖에 안 했어요. 지금도 나는 소설 하면 러시아 소설을 생각하는데, 그런 소설이 안 나와요. 더러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는 순수문학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오락적인 요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심을 많이 받으니까 모두들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기록물 쪽에서는 그런 것을 할 수 없거든요. 나는 이것을 기록물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이 꽤 감동을 주고 착실하게 읽을 수 있고, 어떤 역사적인 배경도 괜찮게 찾아내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표면으로 많이 드러나는 것을 봤습니다.
시도 좋은 게 없는 게 아닙니다. 일본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좋은 게 있지만 그걸 엄선해서 비평가나 학자 그룹에서, 국문학 연구하는 그룹에서, 선전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평가를 진지하게 해서 빛을 보도록 해야죠. 그것은 시인이나 작가들보다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의 노력이 더욱 요구되지요. 비평을 훨씬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책 읽기도 고전 중심으로 읽고, 명작 중심으로 읽어야지 감각적이고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면 뭐가 되겠어요.

<무엇이 소설을 위기로 몰아가나>

사회 : 그러니까 일본하고 한국하고 비슷하다는 말씀이신데, 우리가 뒤따라 가는 듯한 분위기라 그런지 기분은 안 좋지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신동욱 선생은 일본의 '기록물 리얼리즘'을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문헌을 중시하는 그런 사상이 아직도 우리보다는 훨씬 강해서 그런 것들이 나오는 듯합니다. 우리보다 좋은 점인 것 같습니다.
신동욱 : 실제 답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캐내니까 거기 숨어 있는 가치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회 : 이승하 선생은 나중에 더 말씀해 주시기로 하고, 소설의 경우는 일종의 올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소설의 경우도 위기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귀여니니 하는 작가들의 사이버 소설, 디지털 소설이 많이 범람합니다. 또 외국 소설이 우리의 독서 시장을 점령했습니다.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열풍도 일고, 최근의 베스트셀러를 제가 알아보니까 열 작품 중에 여덟 작품이 전부 외국 작품입니다. 『다빈치 코드』같은 역사 추리 소설, 『해리포터』같은 블록버스트의 뒤를 이런 소설이 잇고 있습니다.
이승하 : 팬터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죠.
사회 : 뭐 그런 듯합니다. 이런 류가 잘 팔리는데, 소설을 쓰시는 박 선생 말씀을 들어볼까 합니다.
박정규 : 먼저, 제가 직접 배운 은사님도 계시고, 책을 통해서 존경해 마지않던 선생님들 모시고 자리를 같이하게 되어서 참 감개무량합니다. 문학의 위기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진정한 문학의 위기인가? 지금 한국 문인협회만 해도 8천명 가까운 문인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사이버 상에서 이른바 수많은 문학의 이름으로 시와 소설들이 발표되고, 거기서 또 발표된 어떤 작품들이 수십만 부씩 팔려 나랍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왜 문학의 위기를 논하느냐, 문학의 위기라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너무 경직되었던 이른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그러한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안목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그것이 경계 허물기라는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의 것이냐, 이른바 대중문학이라고 논의되는 것들이, 그런 것이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쪽으로 계속 나가게 될 때 문학이라는 것이 다만 방향을 전환한다든지 형태를 바꾸는 형식으로 해서 새롭게 태어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문학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하겠죠.
그리고 문제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원인에 대한 진단이 필요할 텐데, 결국은 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문학의 생산자, 문학의 소비자, 그리고 문학의 중개자에게서부터 발생되는 어떤 문제들로부터 야기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에 상업적 대중 정보들이 자기들의 욕구를 가지고 접근하는 데서 이런 여러 가지 혼란들이 더 심각하게 문제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머지 얘기는 차츰 하기로 하겠습니다.

<문학의 방향 전환인가 붕괴인가>

사회 : 그러니까 문학의 방향 전환이냐 아니면 문학 자체가 파괴돼 가느냐, 여기에 대한 어떤 검증, 그리고 왜 이런 사태가 왔느냐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태동 : 지금 박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야 하고, 또 무너지는 과정에 있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진보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그룹의 서구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까 말씀하셨듯이, 그것이 무너질 때 과연 상업성이 개입되지 않고 정말 감동을 주고, 그리고 역시 재미도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라든지 찰스 디킨스 같은 사람들도 순전히 돈 때문에 소설을 썼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쓴 작품이 상당히 높은 문학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고전으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소설이 과연 그렇게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요. 아까 신동욱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너무 재미 위주로 하고 오락 위주로 하고, 거기다가 상업성이 개재되니까, 정전을 주장하는 그런 좀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정말 큰일났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테크놀로지와 사이버에 저항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이용하고, 과학을 소재로 해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토머스 핀천의 작품도 그런 쪽으로 평가됩니다. tm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도 이제 조금 클래식해졌지만 문학성이 있거든요. 또 과학을 주제로 했지요. 최근 미국의 어떤 작가는 디엔에이(DNA)를 주제로 해서 작품을 썼습니다. 과학을 주제로 해서 작품을 쓰지만 그것은 정말 오락을 넘어선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독자가 많이 읽어야 합니다. 정말 문학을 문학으로 읽어주는 독자가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궁화꽃이 피었다』를 읽는 그런 독자만 있어서는 곤란하지요. 그것은 신문 독자와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지금 문인 수가 몇만 명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래서 오히려 문학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생산자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한 가지 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하이데거는 소크라테스와 반대 입장에서 문학을 봤습니다. 뭐 데리다와 비슷한 입장이요. 그런 반대 입장으로서 '노스탤지어'적인 그런 입장을 자꾸 취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과학적 테크놀로지가,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원자탄이 모든 생명을 파괴한단 말이에요. 생명과 문학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폴로적인 것만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그런 부분에 문학의 뿌리가 있는 게 아니냐 그것을 과학문명이, 그걸 다 파괴한다는 거죠. 그리고 사이버 문학이라든지 테크놀로지가 그 생명을 봉쇄한다는 거죠. 문학의 뿌리를 봉쇄하고 아주 씨를 말린다는 거죠. 뭐라고 할까요. 아주 시멘트 해버리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이 탄생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위기이고, 그래서 위기라는 말은 문학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철학에서 나온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소설가가 많다고 그게 되는 것인지, 동인지들이 빗장을 걸고 있다는 지적도 했지만, 동인지가 아닌 문인협회의 많은 분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왜 그렇게 하게 됐느냐 말이죠. 앞에서 평론가 말씀을 하셨는데, 평론다운 평론, 그래도 작품에 제대로 접근하고 지금 전근대적인 면도 있지만 그런 것이라도 착실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거든요, 서구사상, 서구비평을 소개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까 하신 말씀처럼 어떤 캠프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핑계로 그쪽 취향에 맞춰서 글을 씁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도 많이 나아졌으니까 그런 시대는 극복해야죠. 20세기가 평론의 시대라고 그랬거든요. 21세기는 아마 그보다 더 진전할 겁니다. 비평의 시대는 지나칠 정도로, 뭡니까 굉장히 소피스티케이션한 세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뭐 이제, 신동욱 선생이 계시지만, 과연 한국문학이 뭔지, 그러니까 중국문학과 일본문학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특징이 뭔가, 한국문학을 규명하는 작업을 조동일 선생도 하고 다른 선생들도 많이 했지만, 그것도 지금 제대로 되었는지, 한국소설의 특징이 무엇이고, 중국소설하고 일본소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시의 특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소설 같은 경우는 전집도 나오고, 시인도 지난번에 김춘수 선생 돌아가시고 김춘수 선생 전집도 나왔습니다. 평론은 김우창, 유종호 선생이 좋은 출판사를 등지고 있고, 백낙청 선생도 좋은 출판사를 등지고 있으니까 유력하지요. 캠프에 들어있지 않은 평론가들은 나이가 들면 외로워집니다. 신동욱 선생 같은 분도 어떤 출판사가 모셔야죠. 그래야 후배가 따라갑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 완전히 퇴물 취급을 해버려요.

<소설은 단순한 읽을거리요 소비 제품인가>

사회 : 예 그렇습니다. 사실 원로·선배들이 앞에 해놓은 작업들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문단이나 어떤 캠프에서는 신인을 하나 발굴해서 집중 조명을 해서 내보내고, 또 하나 만들고 또 하나 만들고 하는 형편입니다. 이러니까 한때 한가락했던 유명한 분들도 뒷전에 앉아서 구경만 하니 소외감만 느끼는 이런 형국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가 소설에서 어떻게 다듬어 나가야 될지 박 선생께서 한 말씀 해주세요.
박정규 : 예, 이태동 선생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현재가 상당히 문학의 위기죠. 이 문학의 위기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70년대, 80년대, 90년대…… 한 10년 지나갈 때마다 흔히 문학 좌담회에서 늘 문학의 위기 문제를 논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70, 80, 90년대 위기와는 또 다른 위기와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오면서 쌓인 어떤 불길한 것이 노정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영상매체 문제입니다.
영상매체에 길들여진 세대들은 사고까지도 영상매체식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에서 문학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전혀 달라졌다고 할까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문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거기서부터도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설의 경우에 지금 말씀드린 대로, 소설 문학 자체가 이제 읽을거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어떤 줄거리를 가진 읽을거리는 무조건 소설이라는 식의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이버 상에서 드러나는 단순한 읽을거리들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읽을거리들이 소설이라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면서 독자 계층은 문학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런 문제점들이 나중에 상당히 심각한 쪽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문학작품이, 특히 소설 같은 것은 이제 단순한 소비제품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오양호 선생께서 말씀하셨지만, 한 번 읽고서, 한 시대에 유행처럼 번지다가 그 다음에는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형식으로 수명을 자꾸 단축시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출판계가 워낙 불황이라는 점입니다. 상당한 긍지를 가지고 문학 작품을 출판해오면서 거기에 보람을 느끼던 상당수 출판사들이 이제는 너무 극심한 불황 속에서 자꾸 상업적으로 눈을 돌리는 상황은 굉장히 큰 문제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젊은 작가들이 쓰는 작품 세계가 상당수 가볍다는 것이죠. 물론 가벼움이 이 시대의 특징이긴 합니다. 하나의 작품이 그 시대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시대의 특성을 통해서 시대를 초월해서 가질 수 있는 더 큰 의식, 가치, 그러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단순히 시대적인 가벼움 자체를 표현하는 데 그친다면 이것은 상당히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만연되어 있는 가벼움은 아마 젊은 문학 생산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흑백 티브이가 60년대에 방영되었던 것처럼, 80년대에 역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컬러 티브이가 보급되었고,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개인피시(PC)가 보편화되고, 30대 이전 세대들은 거의 완벽하게 이런 영상매체를 통해서 사유하는 그러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국 소설이 감각에 호소하고 마는 단순한 읽을거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이 결국 소설문학을 큰 위기 쪽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문학 아닌 것이 문학 행세하는 시대>

이승하 : 앞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정보산업 발달에 따른 활자문화의 위축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운전을 못 배워 어딜 가나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데, 그런 곳에서 시집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자 메시지를 검색하거나 보내고 있죠. 아니면 휴대폰을 갖고 게임을 하고, 그도 아니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습니다. 손에 들고 보는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은 만화책이요 어른들은 신문입니다. 문학은, 특히 시는 이제 보통 사람의 관심권에서 멀어진 것일까요?
시의 위기라는 문제는 어찌 보면 독자에게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문예지 편집자와 출판사 사장, 시인과 문학평론가한테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문예지 편집자는 좋은 시를 받아서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맥과 학맥 등 알음알음으로 청탁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잘 아는 사람에게 청탁서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좀더 엄정한 감식안을 자고 주류 문단에서 소외되어 있는 지방 문인이나 군소 문예지 출신의 좋은 시인을 발굴, 재조명하는 노력을 했으면 합니다.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시집 발행 부수를 줄이더라도 종수를 줄이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독자를 외면하는 산문에 경도해서 독자를 무시하는 난해함에서 탈피하면 좋겠습니다. 시인이 시대의 변화를 읽지 않고 너무 낡은 시 문법을 고수하는 것도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뀌어 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30년대식 서정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신한 신인 발굴에도 힘써야 하고 신세대적 어법과 실험정신도 일정 부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문학평론가는 아는 사람의 시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하지 않는 정실 비평이나 문예지별로 출판사별로 끼리끼리 작당하여 추켜세우는 골목 비평에 휩쓸리면 안되겠죠.
박정규 : 영상매체는 시각 혹은 시각과 청각의 지각을 통해서 인지됩니다. 이러한 지각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1회적이며 속도감을 요하는 영상 매체의 속성에 적합하죠. 즉 완성된 형태와 색채와 음향을 감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고력이나 상상력이나 창의력 등의 고등 정신 기능이 작동할 여지가 없지요. 상징적 부호 체계인 문자를 통해 상황을 지각하기 위해서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논리적 사고력과 응용 능력, 상상력의 발동과 창의력의 동원 등의 과정은 거의 생략됩니다.
이러한 영상세대들에게 사색을 요하는 독서는 비능률이요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순간적인 감각을 통해서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독서 내용은 인지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인터넷의 운용이니 의사 소통 수단이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목소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문맹자가 속출할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보급이 각종 정보의 홍수를 이루게 했습니다. 이러한 정보 속에는 상업적 대중 정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문학이라는 예술 세계에 상업적 대중 정보가 침투할 때 상당한 혼란을 가져옵니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별도 모호해지면서 자연히 예술을 통한 문화적 긍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인터넷 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단순한 읽을거리가 '소설'로 둔갑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읽을거리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생산자가 영상매체에 길들여진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생산물을 공급하기 때문이고, 거기에다 소비자는 상업적 대중 정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자극에 현혹되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런 거래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또 상업적 대중 정보는 아직까지 문학 소비자로 남아 있는 4,50대의 비영상 세대에게도 접근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흥미 위주의 독서물을 문학으로 오인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문학 아닌 것이 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작 문학은 제자리를 잃게 됩니다. 문학은 서서히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공부 안 하고 쓰면 전통이 단절된다>

이태동 : 작년에 한국번역원에서 주는 아주 큰 상을 받은 작품을 읽어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작품은 외국어로 번역이 되어 번역상을 탔는데, 어느 대학 외국인 교수하고 둘이서 심사를 하며 읽었습니다. 심사를 해야 하니까, 원문을 읽고 영어로 또 읽었습니다. 그때 너무 놀랐어요. 작품이 너무나 질적으로 저하됐기 때문이죠. 누구라고 작품 얘기를 안 하겠는데, 뱀장어가 섹스 심벌이라는 그런 얘기 가지고 쓴 것을 큰 상을 주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 문학이 이래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건질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70년대까지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라든지 이청준·이문열 등……. 그때만 해도 작품들 좋았어요. 제가 따라 읽지는 못하지만 요즘 문학을 대표한다는 그걸 보고 느꼈는데, 불륜 관계에다 약간 실존적인 양념을 묻혀 그렇게 포장합니다. 일본문학이 이제 우리하고 리얼리즘 쪽에 좀 가는 방향이 다르지만, 일본문학을, 이를테면 하루키 같은 건 미국에서도 배워요. 그리고 또 뭡니까.『백년간의 고독』의 마르께스라든지……. 그런 것을 왜 못 쓰는지 모르겠어요. 출판사 사업하고 관계되는지…….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데서, 잡지사에서 대담할 때도 말했습니다만, 작가들이 공부를 안 행. 고전을 안 읽어요. 이를테면 서양에서 대가로 성공한 작가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고전을 아주 많이 읽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특히 로렌스 같은 사람은 45세에 죽었는데요, 시나 이런 것을 쓴 것을 보면 희랍 신화 얘기가 중요하게 나옵니다.
예이츠도 마찬가지예요. 고전을 얼마나 읽었습니까. 박완서 선생도, 자기 자전적인 글을 보면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거 아닙니까. 작가가 독자보다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정작 작가가 공부를 안 해요. 공부를 안 하니까 엘리어트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전통 중시 사상도 모릅니다. 전통 속에 그것을 연결시켜 나가는, 요즘 다른 말로 하면 영어로 인터텍추얼리티라는 말이 되는데 『햄릿』경우에 뭡니까, 『햄릿』은 덴마크 이야기거든요. 그것을 작품화한 거예요. 『돈키호테』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맥에서, 전통적인 맥에서 줄기를 찾아서 해야 되는 거지 불륜적인 관계에다 약간 사탕을 묻혀놓은 글은 읽을 수가 없어요.
사회 : 뭐, 일종의 전통의 단절, 전통 무시라는 거로군요.
이태동 : 전통의 단절이죠. 공부를 안 하니까 뭐가 뭔지 모르고 글을 써요.
사회 : 전통의 단절, 아까 신동욱 선생이 말씀하신 문제와 같은 맥락입니다.

<무엇이 시 독자를 만드는가>

이태동 : 그러니까 아까 『삼국지』얘기를 했지만, 요즘 역사소설만 자꾸 쓰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가 얘기하는 것은 생명의, 삶의 본질에 대해 뿌리를 둔 노스탤지어인데, 우리의 역사 소설은 이게 뭡니까. 이건 단순히 과거 회귀예요. 이순신, 뭡니까.『칼의 노래』지요. 그건 문장은 참 좋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동인문학상 받을 만도 하지만, 픽션은 픽션인데 과거 회귀적인 역사소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박정규 : 『삼국지』같은 경우는 상업적인 목적에서 고정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계속해서 사람을 바꿔가면서 출판하는 게 아니냐 하는 혐의가 짙어요.
사회 : 사실 신동욱 선생은 우리보다는 한 세대 앞선 문단 원로이신데, 선생 같은 분이 문학 공부할 때는 정말 정전만 읽고 공부를 했지요. 그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태동 선생 경우도 그렇지요. 자꾸 캐논, 정전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요새 와서는 다 없어져버리고 엉뚱한 사이버 어쩌고 하는 소설들이 나타나면서, 좋게 말하면 장르가 확산되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누가 작자고 누가 독자인지 뒤범벅이 되어서 한마디로 문학 난전이 되었어요. 박선생 얘기는 이런 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 않느냐 이런 얘기 같습니다.
그러면 말이죠, 얼마 전에 순수 서정시를 쓰던 김춘수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김춘수 선생의 잘 알려진 「꽃」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청소년들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윤동주의 「서시」를 제치고 인기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시의 서정성, 그러니까 감상 과잉이 아닌 정제된 서정성 회복이라는 점에서 이승하 선생이 이야기 좀 해주시죠.
이승하 : 지금도 여전히 일반 독자들이 즐겨 읽는 시인은 윤동주·김영랑·김소월 등입니다. 생명력이 참 길죠.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지요. 오늘날 문예지상에서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들 가운데 한 10년 정도 후에라도 여전히 읽히고 10년 후에도 독자를 감동시킬 힘을 지닌 작품이 있는지 사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문예지 시를 보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양산되는 현상을 차단해야 합니다. 문예지마다 세력 확보를 위해서 시인들을 배출하는 것에 조금 제동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터넷 시대가 되다 보니까, 인터넷상에서 시들을 많이 찾아서 읽고 또 띄우기도 하는데 그 나름으로 세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계도하고 이끌어 올리는 작업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순수만 좋은 것이고, 아마추어리즘은 배격하는 그런 고답적인 논리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동호인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는데, 한 달 동안 올라온 시작품 가운데 최우수작과 우수작을 선정해서심사평을 써달라는 거예요. 재정이 그래서 고료 같은 것도 못 드리겠습니다, 해주시겠습니까? 그러더라고요. 저는 여러 정황으로 봐서 고급 독자들일 테니까 이분들을 위해서 봉사를 해주자 해서 작품을 받아봤는데, 곧잘 쓰는 시인도 있더군요. 아마추어 시인들이죠. 그래서 아주 기분 좋게 심사평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만 제가 4월 20일 자로 심사평을 올렸는데 6천 명이 조회를 했고요, 11월 20일 자로 올린 심사평은 3천 명이 조회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문학과 시를 좋아하는 저변 인구는 엄청나게 많이 있는 거예요. 단지 그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 일은 문예지 편집자, 출판사 종사자들, 문학평론가들이 해야 하는데 너무 울타리 의식만 갖고 있어서 우리가 관리하는 시인·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아예 인정해주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전혀 평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예지 편집자라면 감식안을 가지고 엄선해야 될 것이고, 좋은 시인을 발굴하고 관리도 해야 하는데, 다 아는 사람 중심으로 청탁합니다. 문예지들이 다 동인지화 되어 있는 거죠. 참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주류 문단에서 소외된 지방 문인이나. 이름 없는 문예지 출신의 문인을 발굴해서 평가하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편안하게 그때그때 청탁해서 작품을 싣고 맙니다. 굴지의 출판사들도 잘못하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문학 저변 인구를 확대하고 고급 독자에서 시인으로 끌어올려야 하겠지만, 그들 나름의 세계가 있으니까 부추겨주기도 해야죠. 그런 작업들을 해야 하는 것이 문예지의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작품이 시원찮을 때는 비평이 선도해야>

사회 : 그렇다면 말이에요. 한국문인협회의 경우는 회원이 7천 5백여 명 됩니다. 말하자면 문학의 저변을 이룬, 그러면서도 선택된 사람들인데 『月刊文學』이라든지 이런 문인들의 작품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 선생 이야기 맥락하고 통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래 보실 수 있습니까?
이승하 : 예. 제 나름대로 평론 비슷한 것도 쓰면서 이미 평가가 되어 있는 사람을 얘기하기는 상당히 쉽죠. 또한 그것이 저한테 득이 되는 부분이 있고요. 그런데 무명의, 지방에 있기에 소외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상당히 품도 많이 들고 사실 빛이 나지 않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덧붙여서 얘기하자면 수월하게 지명도 얻을 수 있고, 한편으로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웬만하면 무명의, 그런 사람들의 좋은 작품을 찾아서 읽어 나가려고 합니다.
사회 :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신동욱 선생께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신동욱 : 아까 여러분 얘기 중에 굉장히 중요한 얘기가 몇 가지가 나왔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한국 문학의 방향성 문제입니다. 전통의 회복 같은 것이죠. 전통의 회복이라는 게 4분5열 상업주의 사람들에게 휘말리고 있는데, 그래도 지식인들은 문학 연구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니까 문학 지식인들은 그런 문제를 활발하게 논의하고 그런 쪽으로 나오는 작품을 격려하고 높이 평가하고 그렇게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순신은 한 군인으로서 봉사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실천한 행위에는 한국인의 가장 높은 보편적 인격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성이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작품의 긴 테마가 될 것 같아요. 분열된 시대에 그런 사람, 통합적인 인격이랄까 보편적 인격이랄가 이런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쁜 것이 아니죠. 문제는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전통성 문제를 자각하고 쓰느냐 하는 점이죠.
그리고 아까 이태동 선생이 세계성이라는 말까지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지역성도 대단히 중요하고 자국 전통도 대단히 중요하고, 그러면서도 말하자면 세계성을 획득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죠. 그만한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이 그런 자각을 가지고 쓸 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에 우연히 읽은 글인데 작품 부재의 시대에는 비평이 앞서야 한다고 영국의 아놀드가 얘기했어요. 아, 작품이 시원찮을 때는 비평이 선도적으로 방향 제시까지 하면서 글을 쓰도록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은 꼭 평론가만이 할 일은 아니죠.
앞에서 이태동 선생께서 서양 사람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요즘은 문학의 기록물, 문학이라는 작품들이나 철학이라는 저작물이나 역사라는 저작물, 사회라는 저작물, 종교적인 저작물 같은 것이 어떤 주제로 놓고 보면 같이 넘나들죠. 그러니까 어떤 문서나 어떤 텍스트만이 자기 고립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이고 서로 상통하는데, 다만 우리는 문학인이니까 문학성을 지켜야 하거든요. 예술성을 지켜야 하고, 그런 쪽을 학자나 비평가 쪽에서 더 많이 수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여기서 얘기해도 구체적으로 이런 오락적인 감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나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한국문학 작품을 진지하게 가르치고 읽는다고 할 때는 최고의 작품, 최고의 전통성을 가진 것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옛날에 어른들, 비평가들 하신 말씀이나 지금의 젊은 비평가들이 해야 될 일이나 거의 상통한다고 봐요. 다만 시대는 자꾸 바뀌고 너무 분열의 시대에 온 것 같아요. 우리가 통합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그런 지혜나 비평 활동을 아주 중요하다고 보니까 젊은 비평가들, 젊은 교수들이 많이 하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나 같은 늙은이는 뭐(웃음). 읽을 힘이 없어요.
사회 : 참으로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문학의 바람직한 방향을 가늠하는 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태동 : 저도 그런 걸 느낍니다. 그런데 아까 이승하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이버 세계, 인터넷에 올라오는 작품 중에는 좋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옛날에도 좋은 시를 썼지만 발표를 못하고, 그때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발표도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렇습니다. 자꾸 서양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우리같이 신춘문예니 잡지사에서 뽑는 식으로 하지 않고, 자기 작품을 우선 출판사에 보냅니다. 윌러스 스티븐슨 같은 경우는 하버드 대학에서, 교지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알려지긴 했지만, 소설 같은 것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지요. 출판사의 편집자 중에 평론가가 많아요. 대개 거기서 유명한 평론가와 관계가 맺어지고 거기에서 출판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런 일이 수시로 있습니다. 우리같이 1년에 한 번이다 이런 게 없죠.
그런 입장에서 보면 출판사 책임이 상당히 크죠. 그리고 문학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 쓰는 본인이 아무리 어렵지만 관문을 뚫으려는 노력도 필요한 게 아닙니까?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오 선생도 마찬가지고, 이승하 선생도 마찬가지고.

<문협도 바뀌어야 문학이 산다>

사회 : 결국, 전통성의 회복, 문학 논리의 재인식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신동욱 선생께서도 비평가, 젊은 평론가, 젊은 학자, 이승하 선생이나 박 선생 같은 분들이 굳이 비평가의 간판을 안 달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발굴하면서 전통을 회복시키고 문학의 방향성을 잡아가는 그런 교육을 끊임없이 일구어 나가야 된다는 얘기 같습니다.
신동욱 : 저도 여기 회원으로 되어 있어서, 책을 보내주시는 것 고맙게 받고 시간 있으면 읽는데, 많이 읽을 힘이 없어요. 그리고 문협에 대해서 무슨 주문하고 그럴 처지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글이 부족해도 발표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전혀 못했잖아요.
다만 이런 건 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을 엄선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기준이 없어요. 제가 얼마 전에 지방에 가서 어떤 나이 많은 시인을 한 사람 만났어요. 시집을 주시데요. 나이 많은 분이 주시는데 안 읽을 수 없잖아요. 읽어보니까 작품이 참 좋았어요. 아, 이런 분은 지방에 계시지만 참 좋은 시인이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어요. 언젠가 작품평을 쓸 생각입니다.
기준이라는 문제가 아까 여러분들의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어떤 캠프에 들어가서 그쪽 기준에 뭘 하고, 어디서 기준을 뭘 하고, 다소 그런 난립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에 엄격하게 기준을 세워서 한다면 그래도 가려질 게 아닙니까. 이거 보면서 (탁자 위에 놓인 여러 문예지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문학 인구가 많은데……. 이 거창한 작품들 어마어마한 노동력인데…….
그렇더라도 게재하는 모든 기관에서 엄격하게 기준을 정해야죠. 그거밖에 없어요. 그리고 자비출판이 어떻게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유명한 시인도 문학사에 언급되는 것은 6,7편이고, 많아야 열댓 편밖에 안 됩니다. 릴케나 두보나 이분들이 시집을 그렇게 많이 냈습니까. 그렇게 많이 못 냅니다. 사색이 깊고 아주 깊이 고민하고, 그러면서 시대를 초월하고 언어의 경계까지도 초월했기에 읽히고 감동받는 것입니다. 우리 나름으로의 심사를 엄격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책도 좀 줄어들 것 같고. 아, 죄송합니다.
사회 : 원로로서 후배 문인을 위해 무슨 말씀을 못하시겠습니까. 아주 고맙습니다.
이태동 : 아까 신동욱 선생이 말씀하신 것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가 가입을 하니 회지 『月刊文學』이 오더라고요. 그것을 보니까 아까 신동욱 선생 경우처럼 엄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원이니까 순서대로 실어준다, 안 실어주면 불평한다, 그러면 그 다음 선거에 불리하다, 이런 것은 우리가 지식인으로서, 문인으로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갈라져서 한국문인협회, 민족작가회의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꼭 그렇게 순서대로 실어줘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문인협회의 위상이 떨어지고 문인도 나가서 대접을 못 받는 거죠. 이게 무슨 작품인가 싶은 것이 있어요. 참 답답하게 말이죠. 한창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읽어봐야 아무 내용도 없어요.
그래서 문인협회가 지금 할 일은 회원 문인 1만 명 시대를 자랑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인의 위상을 높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소설가·시인 같으면 참 존경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대접을 받는 일이 우리 자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 때문에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크게 걱정되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문인협회가 자구 노력을 해서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여야 될 듯 합니다. 문인의 위상이라든지 위엄을 좀 세워줬으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활자 선택이라든지 촌스러워요. 『月刊文學』을 한번 보세요. 여러분 자꾸 동인지 동인지 하는데, 동인지가 그렇게 잘 팔리는 것을 왜 부러워합니까. 우선 활자라든지 한번 보세요. 차이가 있어요. 할 수 있잖아요. 왜 못합니까 그거.
그리고 순서대로 누구나 회원이기 때문에 실어주지 않는다고 회장 이름으로 내보내야 해요. 회장 이름도 필요 없어요. 편집장 이름으로 내보내요. 그래야 그 잡지가 사는 거죠. 어떻게 순서대로 실어줍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회 : 예, 충고 고맙습니다.
이태동 : 너무 정치를 의식하면 문학 자체가 달아나 버립니다. 저도 이제 신동욱 선생같이, 정년이 다 돼서 하는 얘기지만 마지막으로 문인협회에 대해서 고언을 드린 겁니다.
사회 :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교수께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박정규 : 역시 위기의 문제가 외적인 요인도 있지만, 문학 혹은 문학인들 내부에서의 문제도 상당히 있다는 말씀을 선생님들께서 해주셨습니다. 저도 역시 공감합니다.
대체로 보면 문단에 등장한 지 한 4년 정도 되면 작품집을 두세 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의 경우예요. 그것은 개인들의 왕성한 창작 의욕이라는 점에서 아주 치하해 마지않지만, 문제는 문학지들이 어떤 새로운 작가들에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혐의가 강하다는 것이지요. 발표 지면을 편중해서 할애한다는 측면도 사실은 있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문학적인 가치가 그에 상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작품에도 지명도가 있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뒤따르고, 그러다 보면 평가에 대해서 상당히 혼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태동 선생도 말씀하셨지만, 그런 여러 가지 문학 작품에 대한 자체 평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해서 상을 받고 뭐하고 하는 그런 측면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으로 문인협회에서 나오는 『月刊文學』같은 경우에는 발표 기회를 좀 더 많이 주고 지면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싣다 보니까, 작년까지 나오던 『月刊文學』의 경우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무지무지하게 두꺼웠거든요. 앞에서 이태동 선생도 말씀 하셨지만, 편집이라는 말을 여기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月刊文學』이 상당히 좋은 작가들과 시인들을 많이 배출했고, 나름으로 한국 문학에 공헌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이 두꺼워진 것은 그 속에 '순례'라고 해서 지방에 있는 동인지 작품까지 다 집어넣다 보니까 그렇게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전문적인 문학지인지 혹은 개인 문집인지 모를 정도의 체제를 갖추고 나왔거든요.
앞으로 문인협회에서는 이제는 양적인 팽창은 자제하고 내적인 충실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선생님들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한번 더 되풀이한다면, 『月刊文學』이라든지 그 밖의 『한국시학』『계간 소설가』 이런 식으로 전문적인 쪽으로 계간지가 발행되고 있는데, 정말 작품 선정 기준을 철저히 해서 좋은 작품들을 실어 나가다 보면, 여기에서부터라도 오염된 문학을 털어 버리고 정선된 문학, 그러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방향 설정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 : 예,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승하 선생은 어떻습니까?
이승하 : 예, 저도 공감합니다. 한때 이 책을 베개로 사용한다는 소문도 나고 그랬었죠. 지금은 『月刊文學』의 볼륨이 줄어든 대신 4종 계간지가 나온다고 하더군요. 아동문학하고 수필까지. 거의 뭐 마찬가지 현상인데, 저는 뭐 디자인도 대단히 중요하고, 원고 청탁서를 보낼 때의 선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문예지가 이사할 때 버려지지 않으려면 '특집'이 중요합니다. 뭔가 색다른 '특집'을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특집'을 어떤 것을 정할지 편집실에서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태동 선생께서 말씀하셨지만 우리 문학이 번역이 돼서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끄는 작품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왜 우리 한국 문학이 낙후 일로인가. 일본에서 노벨 문학상을 2명이 수상한 것은 오로지 국력 덕분이 아니라 뭔가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21세기에 들어 문학이 너무 상업적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시인들도 상당히 그쪽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오히려 더 외곬으로 고고하게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는 문인들이 우러름을 받아야 하는데, 시인들이 모여서 몇 쇄를 찍었느냐를 안부 묻듯이 묻습니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태동 : 이승하 선생이 얘기했듯이 어렵게 등단해서 좋은 작품을 발표하더라도, 뭐라고 할까, 속된 말로 패거리와 캠프 작용 때문에 빛을 못 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가 후진성을 못 벗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극복을 해야 합니다.
글쎄요, 노무현 정권에도 상당히 문제가 많은데, 과연 문협 이사장 선거를 말이죠, 수천 명이 선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 : 이 찬란한 민주화 시대에 지명제로 하면 난리가 나게요. 문인들도 촛불 들고 광화문 나오게 될지도 몰라요.
이태동 :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 아닙니까(웃음).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이런 현상이 생긴다 이거죠.
이승하 : 그렇죠. 회원도 다 관리를 해야 되는 건가 봅니다(웃음).
사회 :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참 고맙습니다.
이태동 :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 : 앞으로 계속 관심 가지시고, 좋은 글도 써주시고, 지도 편달해 주세요.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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