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3 04:39

바다로 떠난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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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떠난 여인들

-전상미의 <붉은 바다>를 읽고

  내가 좋아하는 <희랍인 조르바> 중에서 두고두고 생각나는 한 대목이 있다. 주인공인 조르바는 어렸을 적 할머니를 모독한 죄로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매주 주말이면 아침부터 여든이 넘는 할머니는 일찍 일어나 정성껏 치장하고 온종일 좌불안석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더라는 것이다. 어린 손자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깃들자 마을은 온갖 멋을 내어 차려입고 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를 부르는 청년들의 세레나데와 휘파람 소리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에 끌려 곱게 치장한 처녀들이 하나둘씩 동구 밖으로 빠져나가 마을이 조용해질 때까지 할머니는 창문 밖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때 어린 손자 조르바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할머니가…….조르바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소리친다.

  “할머니! 할머니가 아무리 그렇게 치장하고 기다려도 할머니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줄 남자는 이 세상엔 없어. 할머니 정신 차려. 거울 속 쭈그렁바가지 같은 얼굴을 보라구!”

  이 말에 할머니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조르바에게 원망 어린 눈초리로 말한다.
“조르바. 너는 죽어서 지옥에 갈 거다. 네게 평생 저주가 내릴 거야.”

  젊은 날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좀 과장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할머니가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내 나이가 할아버지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니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최근에 전상미 선생님의 <붉은 바다>라는 작품집을 읽었다. 47세의 뒤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최근 고희를 넘어서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 묘한 감동이 인다. 참 열심히 쓰시는구나! 9개의 단편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작품집은 모두가 사랑 이야기이다. 아! 사랑……, 이 사랑이라는 문제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일생일대의 주제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전상미(이하 존칭 생략)의 <붉은 바다>에 실린 사랑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선남선녀들의 달고 쌉쌀한 초콜릿 같은 맛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무지개>와 같은 착각이거나 <사랑의 환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작가에게 사랑이란 오히려 처절한 아픔이거나 주체할 수 없는 질투이거나 욕정과 같은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본질이, 짝짓기를 위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란, 문화 인류학적인 혹은 사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사랑과 가정에 대한 정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소설은 이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이룩한 가정이 남자의 불륜으로 인하여 파괴될 때 난파한 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벼랑 끝에 몰린 배신당한 여인들의 보고서 같은, 페미니즘 소설의 경향을 띠고 있다. 즉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의 대표적 단편인 <붉은 바다>를 보자.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초등학교 때의 단짝인 친구로부터 크루즈 여행을 함께 가자는 연락을 받는다. 둘은 배를 타고 함께 바다로 여행 한다. 그러나 나는 전혀 즐겁지 않다. 최근에 남편이 오랫동안 이중살림을 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 중 친구로부터 더욱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친구는 몇 십 년 동안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 아닌 사랑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 친구가 자신의 남편과 놀아난 남편의 정부처럼 가정파괴의 주범으로 느껴지며 증오심이 불타오른다……이상의 스토리로 전개되는 <붉은 바다> 역시 작가의 지독한 페미니즘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지독한’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녀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남자들이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붉은 바다>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처럼 남자는 상습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난봉꾼이거나(이제야 알겠다) 아내의 묘지에서 만난 여인에게도 연정을 꿈꾸는 주책없는 인간이거나(무지개) 자신을 애지중지 길러준 어머니를 배신하는 아들(어머니의 눈물)이거나 어미를 찾아오는 자식에게조차 질투를 느끼는 대책 없는 남편(아내의 반찬 가게)인 것이다. 반면에 여자는 어떠한가? 여자는 이러한 남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이다. 평생 난봉꾼인 남편 밑에서 고통받는 아내이거나(이제는 알겠다.) 줄줄이 딸만을 낳아 학대받다가 마지막 낳은 아들에 온갖 사랑을 쏟으나 결국은 아들에게마저 배신당하는 어머니이거나(어머니의 눈물) 과거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음을 숨기고 살아가는 아내(아내의 반찬 가게) 등으로 모두 상처 받은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붉은 바다>에서는 언뜻 보기에는 이처럼 피해자로서의 여성(나)과 불륜의 상대인 가해자로서의 여성(친구)이 동시에 등장하여 나름의 입장을 설파하며 대결 구도를 보인다.


          남편                                              친구의 애인



나                남편의 정부                  아내                     친구


  문화인류학에서는 가정을 sex를 교환하는 one unit으로 정의한다. 여기에 제삼자가 개입하여 복합 sex가 이루어질 때 가정은 둘로 분리되며 그것이 불륜이다. 전상미는 이러한 불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불륜의 삼각구도가 그녀의 주요 소설을 구성하는 틀이 되는 것이다. <붉은 바다>에서는 두 가정의 불륜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남편의 불륜으로 고통 받는 나와 유부남을 사랑하는 친구…….그런데 이 두 개의 불륜은 사실 시점을 바꿔서 본 동일한 불륜의 삼각형의 구도와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륜의 삼각구도에서  남편의 정부 대신 친구를 갖다 끼여 놓는다. 마치 내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가 친구인 너라면……이라고 가정을 해 보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 나는 친구를 남편과 이중살림을 하는 여인으로 착각하고 죽이려는 증오심을 보이기도 하고 입장을 바꿔서 서로에게 충고를 하기도 한다.


“너의 친구로서 간청하는데 그를 아름답게 보내. 보내는 것도 사랑이라고 했어……”


  “그 부인이 모른다면 그냥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알고 있다면 모른 척하라고 할 거야.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한 말이야. 남편이 단순한 바람이 났다면 말릴 수 있지만 사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어. 스스로 물러나기 전에는 남편에게 여자와 헤어지라고 하면 남자들은 이혼을 택하지. 그 부인에게 이혼하기를 원한다면 용감하게 이혼을 하고 네 말처럼 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하라고 할 거야.”

   이러한 역할 바꿔보기 기법을 통해서 작가는 삼각구도의 밑변에 깔린 나와 남편의 정부, 그리고 유부남을 사랑하는 친구가 결국은 모두 동일한 피해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삶이 황폐해진 두 여자가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가정이 깨진 여성들의 삶이란 남편으로부터 떨어져 새로운 인생이라는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남편의 불륜 희생자인 나와 남편의 불륜 대상인 여인(친구)은 모두 남성 중심의 사회의 희생자들로서 같은 배(크루즈)를 탄 운명인 것이다. 나와 친구와 남편의 정부 등 상처받은 여인들은 모두 바다(모든 생명의 근원, 즉 어머니, 여성성을 상징한다.)의 한 배에서 태어난 자매들인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페미니즘 경향이 잘 드러난다. 결국 <붉은 바다>는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피 흘리며 상처받는 수난의 모성과 여성을 상징하고 있다.

   친구는 고개를 바다로 향한 체 시선을 붉은 바다 속으로 떨어뜨린다.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눈물도 붉은색이었다.
그렇다! 붉은 바다 속에서 그 여자가 피를 흘리며 떠내려가고 있다. 붉은 피가 바다를 적신다.

  <붉은 바다>에서 ‘붉은’, ‘바다’, ‘배(ship)’ 등의 기표들이 피, 자궁, 출산, 어머니 등의 기표들과 겹쳐지며 연속적인 환유의 과정을 거쳐 가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유명한 라캉의 명제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소설의 글쓰기란 계속적인 일련의 환유과정이다.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좋은 소설이란 글쓰기를 통한 작가의 무의식적 환유과정이 독자의 무의식과 만나 공명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소설 <붉은 바다>는 기울어가는 황혼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유람하는 배 위에 올라탄 쓸쓸한 노년의 여인들의 짙은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을 읽고 긴 여운이 남는 오랜만에 전상미 작가가 터트린 수작이다.

  사랑의 배신이건 사랑의 아픔이건 이 죽일 놈의 사랑이라는 것은 고희에 접어든 전상미 작가가 떨처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쓰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쩔 수 없는 망령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저 사랑의 기저 밑에 숨은 욕망의 끝없는 환유과정인 것처럼, 우리는 욕망과 현실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그 간극에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이 시가 되고 한바탕 주절거림이 수필이나 소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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