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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명절에 4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가 휴가를 즐기고 온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제일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재소자와 그의 가족들이 아닐까요. 그곳은 겨울에는 바깥세상보다 더 춥고 여름은 바깥세상보다 더 덥다고 합니다. 우리야 겨울에는 난방시설을 가동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실내공기를 차게 하지만 교도소가 어디 호텔 같겠습니까. 게다가 정해진 일과, 정해진 식단, 정해진 보행 공간……. 자유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나날일까요. 죄를 짓고 온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억울하게 들어가 있는 사람은 억울함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형수나 무기수의 경우는 퇴소의 날이 정해져 있지도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지겹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할 텐데 바깥세상에서는 명절이라고 고향에 간다 해외로 놀러간다 들뜬 마음으로 보따리를 챙기고 있습니다. 명절을 앞둔 지금, 전국 교도소에 갇혀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좋을 듯싶어 시 한 편과 편지 한 통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립니다.



  자정 무렵의 기도
  ―사형수를 위하여

  이 승 하


  그대 몰래 뜬 낮달처럼
  낭떠러지에 진종일 매달려 있었다고
  때가 되면 밤 오니 다행이지만
  등댓불은 안 보이고……
  표류하는 배처럼…… 혹은
  난파 직전의, 혹은
  침몰 직전의,

  시를 쓰는 마음으로 잠자기 전에 기도한다고
  희망의 기도…… 아니, 원망의 기도를
  갈망의 기도…… 아니, 절망의 기도를
  그대 기도를 몰래 듣는 이는
  사람의 아들인가 신의 아들인가
  망령이면 살인자를 마음껏 비웃어주고
  감방 동료면 애도하는 마음을 가져다오

  그래, 시를 쓰는 마음으로 나 또한 기도하리
  고개 들면 아랫도리에
  수건 한 장 두른 이가 내려다보고 있어
  오금이 저리다 몸서리가 쳐진다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 섰던 몇 번의 기억……
  지금도 수치스러워 돌아버릴 것 같은데
  하물며
  그대의 죄목은? 그대의 형기는?
  그대의 생일은? 그대의 결혼기념일은?

  자정 무렵까지 기도하다 잠이 든 어느 밤에
  나 그대 꿈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면회 간 회수보다 많은……
  목이 달랑 매달리거나
  전기의자 위에서 숨을 거두는……
  아깝거나 아깝지 않거나
  다 똑같은 목숨이 이 가을에
  먼 감옥의 벽 안쪽에서도
  단단히 여물고 있으리


  남○○ 형께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서간문을 올리면서 형의 존함을 밝히지 않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는 사실, 형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니, 익명으로 호칭을 삼은 이 편지의 의미를 형이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남형은 지금 무기수로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 형은 벌써 9년째 복역하고 있고, 3년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지요. 문학사상사를 통해서 낸 졸저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을 어떻게 구해 읽은 남형은 작년에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습작시의 수준을 가늠해보고 싶고 시 창작 지도를 받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답장을 보내드리는 편에 책 보기가 쉽지 않을 그곳으로 간간이 책도 보내드렸지요.

「자정 무렵의 기도」를 『현대시학』에 발표할 때는 부제가 ‘무기수를 위하여’였고, 소월시문학상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나희덕 시인의 수상작품집에 함께 수록될 때는 부제를 ‘사형수를 위하여’로 고쳐서 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사형 폐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언론에서 자주 접했기에 부제를 그렇게 고쳤던 것이고, 시도 좀 수정을 했습니다. 시는 당연히, 남형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고 싶을 때 잠자리에 들지만 그곳은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이 정해져 있지요? 식사는 입맛에 맞는지, 동료들과 불화는 없는지, 노동은 할 만한지요? 무기수이니 출옥이 어느 시점에 이뤄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일 테지요. 때때로 엄습해 올 외로움, 죄책감, 불안감, 좌절감……. 형의 나이 어언 40대 중반,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출옥 후에 직업을 무엇으로 할지 생각하면 암담하겠지요. 혹 출옥 전에 병이 들어 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게 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일 겁니다.

  벽 안쪽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남형을 떠올리며 저는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무렵에 국군장병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이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저는 형의 출옥을 기도할 순 없었지만 마음 편히 계시라고, 몸 건강하게 지내시라고, 시작(詩作)에 진전이 있으시라고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이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를 읽어보셨다고요? 소월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누가 보내주었는지 형은 이 시를 읽었고, “특히 「자정 무렵의 기도」는 제가 주인공인 듯했습니다”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남형을 모델로 해서 쓴 시입니다.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보여드리지 않은 이 시를 그곳에서 그만 보게 되었군요.

  10월 9일 자로 쓰신 편지에서 형은 비로소, 자신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헤어졌던 여자를 정리하지 못해 살해하게 되었고 무기징역을 받았다고요. 사건이 일어났던 해가 서른여섯 살 때라 했으니 9년을 복역한 지금 형의 나이는 마흔다섯입니다. 언제쯤이나 출옥이 가능할지……. 아마도 남형은 그 여인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런 파국을 자행한 것이 아닐까요. 열렬한 사랑이 초래한 극한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보다 더욱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형의 시였습니다. 부쳐온 5편의 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일전에 봤던 시보다 월등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어 저는 문예지 신인상 투고를 권해드렸는데 남형은 2008년 신춘문예를 목표로 하고 있고, 여기에 안 되면 문예지 등단을 모색하겠다고 했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지요.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보니 너무나 아끼던 조그만 책상이 없어졌다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교도소에서 허가하지 않는 부정물품이라는 이유로 간수가 가져가버려 형은 두꺼운 국어사전 3권을 포개놓고 편지를 쓰고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서재에서 사무용 책상에 놓여 있는 컴퓨터에다가 이 편지를 투닥투닥 쓰고 있는데 말입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시를 쓰고 계신 남형!
  저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시를 쓰면서도 형편없는 태작만 쓰고 있는데 형의 시는 상상력과 표현력, 긴장감과 호소력이 편편에 넘쳐흘러 저는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학부 학생들에게도, 대학원생들에게도 복사를 해서 낭독시키고 남형 시의 수준을 논해보았습니다. 학생들은 문예지 신인상 정도는 거뜬히 당선될 수준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춘문예는 운이 꽤 작용하므로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만 그 정도면 등단 소식이 조만간 전해질 것입니다.

  그곳의 겨울은 사회의 겨울보다 더 춥고 그곳은 여름은 사회의 여름보다 더 덥다면서요? 저는 아직 영어(囹圄)의 경험을 해보지 않아 교도소 한 방에 몇 명이 생활하고 있는지, 노동 시간에는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신문과 텔레비전은 얼마나 볼 수 있는지, 식단은 어느 수준인지, 하나도 아는 게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책 읽고 싶을 때 책 읽고 시 쓰고 싶을 때 시 쓸 수 있는 자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밤도 새우고 자고 싶을 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자유, 여행의 자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 술을 마실 수 있는 자유, 영화를 볼 수 있는 자유, 연애할 수 있는 자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자유…….

  이 모든 자유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면서도 “더 치열하게 습작할 시기”라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남형! 부디 이번 신춘문예에서 좋은 소식 있기를 기원합니다. 당선 통지가 오지 않더라고 좌절하지 마시고 더욱 열심히 습작하십시오. 형의 시를 읽고 제가 감동하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삶에 연습이란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고 한 남형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겁니다.
  감기에 안 걸리게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2007년 12월 20일
                                                                           이승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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