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을 보고난 아무추어 감상문입니다. 목회자가 한 번 꼭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께서 한 번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김 성 - 이창동 감독의 신작영화 밀양이 제60회 칸느영화제에서 호평과 함께 수상이 점쳐지고 있다.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멀지않았다는 프랑스 일간지의 보도와 함께 황금종려상이나 그랑프리대상까지 점쳐진다고 하니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칸영화제에서 거둔 심사위원대상에 이어 또 한번 한국영화의 쾌거를 기대해도 좋을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기대해 본다. ▲전도연이 27일(현지시간) 칸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작품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축하키스를 받고 있다. 밀양을 감독한 이창동은 무명의 설경구를 일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배우로 각인시킨 영화 박하사탕을 만든 감독이고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감독이다. 이전 그의 영화 초록물고기라든가 박하사탕, 오하시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신작 밀양은 무조건 기대를 가지게 한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이창동과 전도연이라는 두 이름이 주는 어떤 신뢰가 영화를 보게끔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살러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하려던 주인공 수애에게 비극이 찾아든다. 어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괴범은 돈을 노렸다. 범인은 다름아닌 자신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수애는 남편의 죽음에 이은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쥐어짠 걸레처럼 온몸이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통곡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약국을 하는 이웃의 권유로 어느 교회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기서 목놓아 처절하게 운다. 신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처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통곡일 것이다. 통곡중이던 수애의 머리위에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수애의 통곡은 잦아든다. 그리고 갑자기 수애가 변했다(!) 그녀가 갑자기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아마 심방전도사로 보이는 전도사의 인도 아래 드려지는 가정예배에서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음을 고백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되었다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그녀는 매주 열심히 교회를 출석할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찬양하며 노방전도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녀는 누가보더라도 은혜를 받았고 변화를 받았고 열심을 가진 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가겠다고 나선다. 목사와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고 수애는 교도소 면회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범인과 마주 앉는다. 수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수애의 입을 통해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며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수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수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다시 수애는 변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 앉아 있어도 나는 못하겠다는 식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는다. 교회에 들어가 두눈을 부릅뜨고 미친사람처럼 두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댄다. 자신을 위한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린다.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훔치고 그 훔친 음반으로 교회의 야외집회를 조롱하며 훼방한다. 그리고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 교회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가지려고 한다. 수애는 확실히 다시 변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팔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하고 미수에 그쳐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미용사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말썽많던 딸이다. 수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박차고 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스스로 머리를 싹둑 싹둑 자른다. 영화는 그렇게 머리를 자르는 수애의 집 마당을 비추며 끝이 난다. 고장난 차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비춤으로써 시작했던 영화는 수애의 집 지저분한 마당을 비춤으로써 끝이 난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은 종교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라고 했다. 아마 감독의 이 말 속에는 불필요한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거나 특정종교세력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과 용서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이때 종교적이라는 말은 특정종교를 포교하거나 혹은 반대하기 위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영역의 문제, 즉 구원과 용서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참된 용서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애도 범인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수애는 고통으로부터, 범인은 죄로부터. 두 사람다 용서를 말한다. 수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범인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영화는 비극이다. 왜 그럴까? 밀양은 바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수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허상이 아닌 참된 구원과 용서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수애의 돈을 노린 웅변학원원장은 어느 술자리에서 수애가 좋은 땅을 사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보다는 목좋은 땅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수애의 말을 듣고 범인은 수애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수애는 이곳 저곳 땅을 소개 받아 둘러보러 다닌다. 하지만 사실 수애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수애는 유괴범과의 통화에서 자신에게는 사실 땅을 살만한 돈이 없음을 고백하며 요구하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쩔쩔맨다. 단지 돈많은 사람으로 보여야 새로운 터전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애는 그런 허세를 떨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의 죽음은 수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수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난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수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용서하는 믿음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얼만큼은 자신의 그런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용서앞에서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고싶은 마음도있었을 것이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다녔던 것처럼 수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차라리 범인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됐지 굳이 면회를 가서 범인 면전에 대고 용서한다고 말할 것까지야 뭐냐고 말하는 종찬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의 세계를 굳이 눈에 보여주고자 했던 수애의 마음에는 분명 영적인 자신감과 범인에 대한 영적인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평안을 주셨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주러 왔다”는 수애의 말 속에서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 문제는 수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바, 수애는 범인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용서 앞에 감격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범인이 오히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극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애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수애의 이 말은 그녀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며 그러기에 그녀의 용서 퍼포먼스가 실은 영적인 허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수애는 마치 하나님께 시위라도 하듯 자신이 나가는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벌이고자 한다. 그 때 수애는 자신의 몸을 거칠게 더듬는 장로 밑에 깔려 하늘을 쳐다 보며 비웃듯이 말한다. “보여? 이게 보이냐고?”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물론 신을 조롱하며 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수애에게 신의 거처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래서 벌건 대낮에 장로를 유혹해 보란 듯이 하나님 면전에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보았다고 고백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란 무엇일까? 그녀는 한순간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떠나본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끝내 참된 용서를 하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의 딸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미장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수애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처 할 수 없었던 용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지기 전에는 섣불리 할 수 없었던 용서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은 그녀의 허영에 불과했다. 그 영적인 허영이 그녀에게 또다른 파탄을 불러왔다. 종찬의 말대로 그냥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어느 날 진정으로 범인을 용서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수애의 허영과 함께 이 영화를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웅변학원 원장의 탐욕이다. 그는 돈이 탐나 자신의 학원을 다니던 어린아이를 유괴해 죽여버렸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인면수심의 죄를 지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탐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애를 재차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범인의 두 번째 탐욕이다. 바로 영적인 탐욕이다. 수애는 범인의 자기구원과 용서의 선포 앞에서 기절했다. 도대체 사람을 죽여놓고 저렇게도 평안하게 뻔뻔하게 자기구원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피해자는 피를 쥐어짜는 통곡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정작 가해자인 범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노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수애가 차를 운전하다가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부부인 듯이 보이는 두 남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수애에이렇게 따진다.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나는 이 대사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키가 된다고 본다. 그렇다. 사람을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니다. 죽인 죄에 대해서는 설사 용서를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대해서 어떻게 면죄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는 영원한 참회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것이 진정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 속 범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수애 앞에서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너무도 떳떳하게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한다. 수애는 그의 모습에서 최소한의 죄의식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내어버리고 사랑과 평안 운운하는 뻔뻔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 뻔뻔함 앞에 수애는 치를 떨었고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범인의 이 모습 속에 이른바 값싼 은혜를 탐하는 또다른 탐욕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뼈를 깍으며 참회하고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서둘러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고 그 댓가로 참회의 눈물대신 마음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은 분명 신의 은총을 이용하는 것이다. 죄인 스스로가 신에게 죄사함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수애의 말이 그 점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하나님께 이미 용서하셨다는 데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영화 밀양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앙적 질문을 던진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신은 죄를 지은 가해자인 죄인의 구원에만 관심하는가? 죄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 죄의 피해자, 즉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살인죄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시간 아무 영문도 모른채 자신의 가르치던 선생님 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아이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으며, 어린 자식을 잃고 피를 토해내는 고통에 빠져 있는 수애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죄인은 값싼 은혜덕에 최소한의 죄책마저도 안고 살지 않는 동안 그 죄인의 손에 죽어가거나 피해를 입은 가련한 영혼들의 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화 밀양이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죄인의 영혼구원을 위한 사죄의 은총, 신의 사랑과 용서, 분명히 죄인에게 복음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영혼은 어디갔는가? 그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피해자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나? 피해자의 구원없이 가해자의 구원만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인가? 참된 사죄란 신의 은총으로 그저 자신의 죄만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 안고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참회하며 피해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의 구원없는 가해자만의 구원이 과연 신의 은총이랄 수 있을까? Andrew Sung Park이라는 젊은 신학자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교회는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한가지 사실, 인간의 죄로 인한 희생자에 대해 간과해왔다> 죄와 죄인의 구원을 노래하는 복음의 그늘진 곳에 그 죄의 결과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영혼은 통곡하고 있다. 고통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영화속 수애처럼.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고통따위는 아랑곳 않는 가해자 죄인을 구원하는 값싼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의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신의 은총의 햇살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용서, 속죄처럼 허영 가운데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세계속에 감추어진 신의 은총의 햇살, Secret Sunshine(밀양)속에 있는 것이다. ( 김 성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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