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2005.07.15 15:21

미문이 조회 수:1247 추천:48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이 어 령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그 운(韻)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울 것이며 그 율조(律調)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서 본뜰 것이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振動)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의 진동이 바다 전체의 해류(海流)가 되는 신비하고 신비한 무한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시(詩)를 완성하거라. 당신의 시(詩)는 늪처럼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詩)의 의미는 바닷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긴 꼬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뭍에서 사는 짐승과 나무들은 표층(表層) 위로 모든 걸 드러내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작은 조개일망정 모래에 숨고, 해조(海藻)처럼 물고기 떼들은 심층(深層)의 바다 밑으로 유영(遊泳)한다. 이 심층 속에서만 시(詩)의 의미는 산호처럼 값비싸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바다는 대기(大氣)처럼 쉽게 더워지지 않는다. 늘 차갑게 있거라. 빛을 받아들이되 늘 차갑게 있거라. 구름이 흐르고 갈매기가 난다 하기로, 그리고 태풍이 바다의 표면(表面)을 뒤덮어 놓는다 할지라도 해저(海底)의 고요함을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고요 속에 닻을 내리는 연습을 하거라. 시(詩)를 쓴다는 것은 바로 닻을 던지는 일과도 같은 것이니….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바다에는 말뚝을 박을 수도 없고, 담장을 쌓을 수도 없다.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바다처럼 텅 비어 있는 공간(空間)이야말로 당신이 만드는 시(詩)의 자리이다. 역사(歷史)까지도, 운명(運命)까지도 표지(標識)를 남길 수 없는 공간…. 그러나 그 넓은 바다가, 텅 빈 바다가 아주 작은 진주(眞珠)를 키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초승달이 자라나고 있듯이 바다에서 한 톨의 진주가 커 가고 있다. 시(詩)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한 방울의 눈물을 티운다. 그것을 결정(結晶)시키고 성장(成長)시킨다.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 바다처럼 하거라. 바다는 무한(無限)하지는 않지만 무한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당신의 시(詩)는 영원(永遠)하지 않지만 영원한 것처럼 보이려 한다. 위대(偉大)한 이 착각(錯覺) 때문에 거기서 헤엄치는 사람은 늘 행복(幸福)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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