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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바라는 우화(羽化)의 기적

2006.09.26 17:34

박영호 조회 수:496 추천:58

<평론>

시인이 바라는 우화(羽化)의 기적
-  이창윤의 시「여름날의 기적」을 읽고 -

여름날의 기적

정원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자
매미 한 마리
벽에다 허물을 벗어놓고
무성한 굴참나무 숲으로 날아간다
우리가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을 뿐
기적은 이처럼
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
지은 죄만 깨끗이 없어진다는
이 기막힌 믿음 하나 붙들고
나는 몇 겹 허물을 벗어 놓아야
매미처럼 날아갈 것인가

매미들은 일제히 울음을 뚝 그친다
쳐다보면 그들은 보이지 않고
바람 이 높은 가지의 나뭇잎들을
뒤집었다 바로 놓았다 하고 있다
무한한 것이
약하고 작은 것들을 흔들어
그 얼굴들을 나타내는 일은 바라보면
여름 하늘 아래서 눈부시다
그러면 내가 가진 이 작은 어리석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커다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할 것인가
                         ㅡ시집  <다시 쓰는 봄 편지>에서ㅡ

시인은 벽에다 허물을 벗어놓고 숲 속으로 날아가는 매미를 보고, 그도 매미를 따라 숲 속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신과 자연이 펼치고 있는 그들의 신묘(神妙)한 세계를 그도 유영(遊泳)하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매미의 허물 벗기를 통해서 시인도 영혼의 허물을 벗고 가치 있는 삶이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가 위한 구도자적인 시인의 경건한 삶의 자세가 표현된 작품이다.  
이처럼 시인은 신령하게도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신이 자연을 통해서 펼치고 있는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사회의 사람들은 시인을 조금은 신령한 사람들이라고도 여겨서 반신(半神)이라고도 했다.
사실 사람들은 먹이 사슬에 매인 부지런한 개미와 숲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으른 매미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 매미의 노래가 개미를 위한 보다 근원적 미학적 가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매미는 여니 벌레처럼 쉽게 태어나서 그냥 쉽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길고 긴 세월을 어둔 땅 속에서 형옥(刑獄)과도 같은 인고의 삶 끝에 어둠을 뚫고 나와 허물을 벗고, 그에겐 그리도 갈망하던 본향이나 다름없는 밝은 세상에서 노래하며 한 여름을 산다. 이는 평범한 사실 같지만, 이는 분명 신이 자연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의 기적과 같은 일이라 할 수가 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모습으로 허물을 벗고 숲 속에 날아와 숲을 이름답게 하는 자연의 악사(樂士)의 구실을 하는 매미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시인이 수 없는 밤을 잠 못 이루고 깊은 사색과 산부의 산고와 같은 고통을 통해서 비로서 잉태되는 한 편의 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풍요롭게 하는 매미의 노래는 우리에게 그 어떤 글보다도 더 직접적인 감동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과 교훈을 주는 한 편의 시와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매미가 부르는 노래는 그들에겐 종족 보존의 한 본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숲 속을 다시없이 아름답게 하는 미의 전령사인 미학적 가치가 있어서, 우리가 개미를 농부의 구실에 비긴다면 매미는 바로 우리 시인들의 구실에 견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제 눈을 들어 신이 자연 속에 매일같이 이루고 있는 기적을 본다.

정원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자
매미 한 마리
벽에다 허물을 벗어놓고
무성한 굴참나무 숲으로 날아간다
우리가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을 뿐
기적은 이처럼
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연의 모든 사물을 유심히 살펴 보면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기적인 것이다. 이처럼 신과 자연이 남 모르게 펼치고 있는 기적을 보고 시인은 이제 조용히 자신의 영혼의 세계를 드려다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
지은 죄만 깨끗이 없어진다는
이 기막힌 믿음 하나 붙들고
나는 몇 겹 허물을 벗어 놓아야
매미처럼 날아갈 것인가

위에서 말하는 허물 벗기란 바로 결국 깊은 자각에서 오는 깨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육신의 변신이 아닌 정신적인 영혼의 변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만 열심히 믿고 살다 죽으면 지은 죄가 깨끗하게 없어진다는 기막힌 믿음 하나만을 믿고 살아가고 있다. 시인도 이를 구원의 확신으로 믿고 있지만, 시인은 이에만 붙들려 있지 않고 지혜롭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도 스스로 수 없는 깨달음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지혜롭고 합당한 자각인가? 그것도 단 한 번만이 아닌 여러번의 중첩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바로 생의 고행을 통한 해탈(解脫)의 깨달음에서 참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불자들의 생각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세상에 나와 자신의 몸집에 비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매미의 마지막 변신인 허물벗기 이전의 땅 속에서의 힘든 여러 해의 고행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위에서 알에서 깨어난 매미 애벌레는 나무에서 떨어져내려 어둠의 땅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성충인 매미가 되어 밝은 나무 위에서 한 여름을 노래 부르며 살기 위해 나무 뿌리가 얽힌 어둔 땅속에서 여러 해를 산다. 어떤 종(매직 캐다, magiccada)은 17년 동안의 길고 긴 세월을 어두운 땅속에서 살고, 평균 7-8년을 굼뱅이의 모습으로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성충은 나무 위로 가어 올라가 마지막 허물 벗기를 하고 날개를 지닌 매미로 변신을 한다.
이처럼 매미는 다른 생물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생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찍부터 매미를 하나의 신령한 곤충으로 여기고, 이로 인해 생겨난 많은 이야기들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주로 매미가 많은 아열대 지방인 동남 아시아에 이러한 전설들이 많은데, 중국에서는 게으른 여인이 매미가 되었다고 해서 매미의 전생은 사람이었다고들 믿는다. 또한 필립핀에서는 매미가 좀 다르게 울면 신이 노하여 폭풍우가 친다고 믿고 있고, 인도양의 안다만 열도에서는 매미가 기후와 계절을 지배하는 창세 신화의 주역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도마뱀들이 땅 속 매미들을 전부 잡아먹어 버리자 밤이 생기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새와 벌레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자 다시 매미들이 살아나고, 이들이 다시 크게 울자 다시 밝은 낮이 되어서 밤과 낮이 번갈아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미는 물과 밤과 낮, 그리고 사람의 전생과도 관계가 있는 신령한 곤충으로들 여긴다.  

매미들은 일제히 울음을 뚝 그친다
쳐다보면 그들은 보이지 않고
바람이 높은 가지의 나뭇잎들을
뒤집었다 바로 놓았다 하고 있다
무한한 것이
약하고 작은 것들을 흔들어
그 얼굴들을 나타내는 일은 바라보면
여름 하늘 아래서 눈부시다

  자연도 신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소리라 할 수 있는 매미들의 울음 소리를 제압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입김과도 같은 바람이다. 바람은 자연 속에서 보다 신에 가까운 신의 근위병인지도 모른다. 매미가 청각적이라면 바람은 시각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것만 아니라 보다 다양하게 자연을 움직인다. 이 모두가 결국 신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고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자연이 빚고 있는 기적을 아름다움으로만 느끼고 있는 것을 작은 어리석음 이라고 말한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이러한 어리석음이라고 느끼는 것은 바로 시인이 느끼는 자각, 곧 하나의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가진 이 작은 어리석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커다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할 것인가

이제 시인은 이러한 작은 깨달음이 언제나 큰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불자에서 어리석음이란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이라고 여긴다. 모든 악이나 그릇됨이 바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히 어리석음에 대한 일반 개념은 악한 쪽보다는 차라리 선한 쪽으로 친다. 무엇을 알기 전의 순진무구한 경우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잘못이나 죄악은 분별을 잘못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지혜는 이와 반대로 바로 선행을 불러오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는 선이고 어리석음은 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어쩌면 어리석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생을 어둔 땅속에서 살아가는 매미의 형옥(刑獄)의 삶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매미가 알에서 매미가 되기 까지 여러 번의 변신을 하는데, 이는 시인의 작은 허물 벗기인 작은 깨달음들과 같은 것이고, 시인이 이제 기다리는 큰 깨달음은 바로 매미의 마지막 허물 벗기인 것이다.
이러한 매미의 마지막 허물 벗기는 그들에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기적과도 같이 등이 터지는 아픔 속에서 비로소 샛노란 날개를 지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매미의 우화의 변신이다. 그리고 물감이 번지듯이 서서히 빛깔이 바뀌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이내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른다. 드디어 신이 자연을 통해서 빗어내는 기적이 이룩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기다리는 큰 깨달음은 바로 매미의 마지막 허물 벗기인 등이 터지고 날개가 나오는 변신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의 대속에 의한 구원이 아닌 시인 스스로가 살아 생전에 이룩하려는 인간으로서의 변신인 것이다. 이는 죽음도 아니고 육신의 변신이 아닌 영혼의 변신인 것이다.    
시인은 기독교 장로님이다. 신앙인으로서 이 얼마나 참되고 합당한 사색의 결실인가.
사십 년 가까이 시를 써온 이 분은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오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주로 전원과 같은 소도시에 묻혀 살면서 주로 서정시를 써온 분이다, 따라서 그의 시 세계는 실제 육신을 다루는 일이나 생의 아픔 같은 그러한 치열한 삶의 세계보다는 자연에 대한 온화한 정서나 서정적인 정서를 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의 시는 차라리 인간의 영혼을 드려다 보게 하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늘 전원 속의 안온함 같은 극히 자연 친화적인 서정에 잠기게 한다. 따라서 그의 시 세계에서는 인생의 피로나 생활의 권태 같은 음울함은 엿볼 수 없다. 다만 우리마저도 잠시 사색에 잠기게 하는 그런 깊은 철학적 명상과 수도의 세계가 깃들어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이제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새삼스럽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신을 차라리 작은 어리석음으로 느끼고, 이로 인해서 보다 큰 깨달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분의 시를 통해서 새로운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늘 크고 작은 큰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를 엿볼 수 가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도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쯤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