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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백주년 소설집을 읽고

2004.11.07 17:03

박영호 조회 수:539 추천:48

<평론>

미주 한국 이민 소설의 실상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 미주작가 대표 소설집을 읽고)
    

금번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소설가 협회에서 발행한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소설집’(전3권)은 여러가지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먼저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민 1세 소설가들의 대표 작품이 거의다 수록되 어 있어서, 오늘날 미주 이민 소설의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우선 의미가 있다고 하겠고, 아직은 우리 문학의 한 영역으로 뚜렷하게 자리매김이 되어있지 않는 미주 한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더불어 이민소설이 지니고 있는 국내 소설과는 또 다른 특색이나 그 특별한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 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1.5세나 2.3세들에 의해 쓰여진 영문소설 작품들이 실리지 않은 점이 조금은 아 쉽고, 여기에서 그들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미주에 서 우리 문학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우리문학의 세계화에 앞장 서있는 특별한 가치를 감안하면, 이러한 영어로 쓰인 작품도 마땅히 소개 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싶고, 아 울러 이러한 영문소설이 우리 문학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하는 문제가 하루 빨리 논의 결 정 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현 미주에는 약 300여명(본국등단 작가200 명 내외)의 이민 1세 내지 1.5세 문인들 이 한국어를 통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소설가도 50여명에 이른다. 또한 현지어인 영 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1.5세나 2. 3세들의 작가도 20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본국 에 비하면 아직은 숫적으로 미약하고 작가적 역량이나 작품의 수준도 소수를 제외하고 는 대체로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여건이 고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국사회에서 이 만한 작가들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특수 한 환경에서 우리 문학을 미국 사회에 알리고, 아울러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이바지 하 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미주 동포 문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변화가 있 어야 하겠고, 나아가서 미주 한인문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로 미주 한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가치가 보다 확실하게 밝혀져야 하리라 믿는다.

1, 나그네 문학인 이민소설
인류의 역사는 부단히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발길에서 시작된 이민의 역사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도 에덴동산을 떠난 나그네 삶으로 시작이 되었고, 아브라함 자손도 그렇고, 석가나 예수도 젊은 시절을 나그네로 방랑했고,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호머의 ‘오딧세이’도 이국을 떠도는 유랑의 길위에서 쓰여진 글이다. 이처럼 우리 인류는 끊임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삶 속에서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인간 은 어디론가 자꾸 떠나려고 하는 외부 지향적인 본능이 있어서, 보나 넓은 대지로, 대륙 으로 자꾸 떠나왔고, 어려서는 모두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성장해서는 부모곁을 떠나 타향이나 타국으로 이사도 가고 이민도 간다. 이처럼 자꾸 외부로 떠나려고 하는 인간의 나그네 본성이 결국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서 인류문화를 발전시 키는 원동력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강물의 역사이고 나그네의 역사이며 이민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적은 글이 바로 나그네 문학이 고 이민 문학인 것이다.
원래 소설은 항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가까이 떠도는 나그네 이야기 보다는 멀리 떠도는 나그네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울 수가 있고 더욱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아우러 이국에서 쓴 이야기는 고국 이야기보다 훨씬 더 소설적이고 다체로 운 것이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러한  이민 소설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과 새로운 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지름길을 발견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그네 소설인 이민소설은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도 하겠다.
”나그네의 문학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객지 생활인지도 모른다.” (‘객지문학’에서, 고원교수) 그렇다. 고원 교수의 말씀처럼 우리 인간은 인생 그 자체 전부가 본향을 떠나서 사는 나그네 삶인지도 모른다.

2. 미주 소설에 대한 접근  
미주 이민 소설의 시작은 191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에 실려 발표되었는데, 이 초기의 소설들은 그 내용들이 주로 고국에 대한 애국애족에 관한 내 용들이어서 이를 구국문학 혹은 애국문학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일본 지배 하에 있던 고국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쓰여질 수 있었기 때문 에 가능 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현상은 조국이 광복되기 이전까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3.1운동 이후에는 부분적으로나마 교육사상이나 계몽사상 등의 사회적인 내용 과 함께 차츰 애정이나 가정 등의 개인적인 내용으로까지 확대 발전되고 있는 점이 이 시기 소설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초기의 소설들은 미주 이민소설의 태동 이라는 점에서 우선 의미가 있다고 보겠고, 그 작품들에 대한 가치는 ‘해방전 재미 한인 문학’ (전 6 권 조규익 교수. 숭실대1999년)에 수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동하 교수(문학평론,시립대)같은 분은 ‘소박한 아마추어 리즘으로 만 일관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미주 소설의 어제 오를 내일. 미주 문학 2002 년 겨울) 하고 단정적으로 그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또한 그 사례로 미주 이민소설을 국내소설 수준과 상호비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물론 순수문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합당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민문학이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고려되지 않은 일방적인 평가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않다. 이민 문학을 국내문학 의 연장선에서 보는 국내 문학 작품과의 상호 비교 평가는 고려되어야 하고. 이민 문학 이라고 하는 특수성이 절대적으로 참작되어야 하며, 최소한 이민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라도 그 가치가 인정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광복 이전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미주 소설의 시대적 특색으로는 19 30 년대에 나타난 한국인에 의해서 쓰여진 영문소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31년에 발표된 강용흘 (1899-1972)의 ‘초당’(The Grass Roof)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표현만 영문으로 쓰였을 뿐 내용은 한국적인 것이어서, 이 소설은 미국땅에서 한인에 의 해서 최초로 쓰여진 영문소설 이라는 점과 함께, 우리 소설이 최초로 현지인들에게 우리 문화와 문학을 소개했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어서 그는 다시 ‘행복한 숲’(The Happy Grove,1934)과 ‘동양 양반 서양으로 가다.’(East Goes West, 19 37)를 발표했는데, 마지막 작품은 앞서의 작품들과는 달리 최초로 한국인의 미주 현지 생활을 다룬 소설이라는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광복 이후부터 캐내디 대통령의 뉴프론티어 정책에서 시작된 이민 개방정책 (1965년 법안제정, 1968년 시행)으로 대량 이민 물결이 일기 시작한1968년까지를 다시 한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 시대에도 국문 소설은 이렇다 할 양적 질적인 큰 변화가 없었지만, 1950-60년대에 나타난 김용익과 김은국씨의 영문소설이 그 공백 을 메꾸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김용익(1920-1995)씨에 의해서 ‘꽃신’ (TheWedding Shoose, 1956)과 ‘겨울사랑’ (Love In Winter. 1956)이, 그리고 1964년에는 김은국 (1932-)씨의 ‘순교자’(The Matyred)가 발표되었고, 다시 ‘심판자’(The Inonsent, 1968)와 ‘잃어버린 이름’(Lost Name, 1970)이 발표되었다. 역시 표현 방법만이 영문 일 뿐 내용과 작중 인물 모두가 한국에 관한 것이고, 몇 편 되지않는 작품들이지만 그래 도 여러 문학상 수상과 함께 펄벅 여사로부터 노벨상 운운하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던 소 설들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 미주 한인문학이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얼마나 크게 기여해 왔는가를 실증해 주는 한 사례가 되고 있다고도 하겠다.
다음은 이민문호가 개방된 196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대 량이민으로 국문소설이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고, 질적 양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나 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진정한 이민소설로서의 확실한 자리를 잡아가 고 있고,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발전하여 국문소설의 경우 송상옥씨를 필두로 50 여명에 이르는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영문 소설 또한 ‘한인 아메리칸’ (Korean American)이라고 하는 한인1.5세. 2.3세에 의한 한인 문학이 미국문단에 소수 민족문학의 하나인  ‘한인 아메리칸 문학’ (Korean American Literature)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고국에 서는 볼 수 없는 민족 정체성이나 이중문화 같은 새로운 문학정신이1.5세나 2,3세를 통해서 작품 속에 대두되고 있어서, 이민 문학으로서의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영문소설가로는 1995 년에 ‘원주민의 소리’(Native Speaker)를 발표한 이창 래씨가 있고, 그는 여러 문학상 수상과 함께 미국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다. 다음으로 일찌기 딕테 (dictee, 1982)를 발표한 차학경(1982 작고)과 ‘The Yellow’의 단 리, 그리고 ‘토담’ (The Clay Wall, 1986)의 김난영 등이 있고,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발 표한 이혜리씨(Helie Lee), 그리고 작년에 ‘여우들’(The Foxs)이라는 소설을 발표해 서 유명해진 노라 옥자 캘리 등이 있다.

3 미주소설 읽기에 대한 이해
이처럼 미주 이민 소설은 국내 소설과는 또 다른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과 함께 또 다른 인물(외국인)에 대해서도 쓰여졌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이민소설 읽기는 본국소설 읽기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고 고국 작품과 똑같은 기준에서 접근한다면, 조금은 그릇되게 이민소설을 이해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라고 하는 본연의 가치와 기준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이해나 기준등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적인 사회에서 비교적 비판적인 인물이 미주 사회나 미주 소설 속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부분적인 문제가 더러는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화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주 소설에 보다 바르게 접근 하기 위해서는
첫째, 미국사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라고 하는 사회에 대한 지리적 문화적 도덕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이민 소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곳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인종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던가, 미군은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의 집단이라던가, 강도천국 이라던가 하는 등의 과장된 상식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재미동포도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우리 동포라는 생각과, 그들에 대한 애정 을 갖지 않고서는 이민소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국을 떠나면 무언가 비애국이라는, 그래서 친구도 이민을 가면 나와는 이해관계가 없어 차라리 이웃만도 못하다는, 그런 배타적인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이민소설 속의 한국인의 바른 모습 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셋째로 소설 속에 나타나는 한국인이 본국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새로운 인물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지만 이중문화 속에 서 살아가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본국과는 다른 가치 기준이나 다른 이중문화인의 모습 으로 살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필자가 전개하고 있는 이 글의 내용도 순수 문학적인 가치 기준에서 보다는 어디까지나 이민 문학이라고 하는 측면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4 미주 소설에 나타난 향수의 미학
미주 이민 1세들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 미주소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바로 이 고국에 대한 향수다. 이러한 향수의 미학에 대해서 많은 국내 문학자들이 거의 짜증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점에 대해, 본인은 물론 이제 이곳의 많은 문인들조차도 단연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그분 들의 주장을 바꾸어서 말하면 조금 극단적인 표현 같기는 하지만, ‘고국을 떠나 이민을 갔으니 이제 한국인을 떠나서 적극적으로 미국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 기와 다를 바가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민 문학은 나그네 문학이다. 향수가 없는 나그 네는 나그네가 아닌 돌아갈 곳이 없는 한낱 유랑인일 뿐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의 삶이나 미래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뒤만 돌 아보는 성숙치 못한 감상적 향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향수의 미학은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이민 소설이 언제까지고 붙들고 가야 할 숙명같은 것으로, 이러한 고국에 대한 향수가 바로 한국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정신적 지주이고, 이러한 정신이 담긴 문학이라야만 한국적인 문학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향수의 미학은 우리 초기 이민소설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바탕이고, 시작이며 또한 가치이고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재외 동포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필자. 문예 사조. 2003 3) 따라서 이러한 향수의 미학이 없는 그래서 한국적인 혼이 배제된 소설은 결국 한국 소설을 떠나게 되고, 한낱 무국적 문학으로 전락해버린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이러한 한국적인 혼이  있어야 다중문화 속으로 섞여가더라도 결코 한국혼을 잃지않고, 그래서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이바지할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 문화나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세계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향수의 미학에 대해서 필자는 소설집(1권)속에 작품과 함께 수록된 임헌영 교 수의 비평의 글을 먼저 읽고. 그 글 중에서  ‘모국 회귀의 정서로부터 탈피하지 못한 ‘어 디 가나 조선 사람’ 이란 의식의 소산들이다.’ 라고 여타의 고국에 대한 향수나 귀향의 꿈 을 다룬 작품들과 함께,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지나쳐버린 송상옥씨의 ‘기묘한 삶’을 먼저 읽었다.
송상옥씨는 1960 년대부터 20년 이상을 본국에서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해온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이어서 비교적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가 거의 없는 화자의 자전적인 내용들을 소재로 고국의 어린 시 절에 대한 추억과 함께 현재의 이민의 삶을 표현한 소설인데, 그 구성 또한 극히 평면 적이고 이렇다할 상대적인 인물이 없어서, 얼핏 보면 이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패배 의식의 출구로, 향수와 귀향을 꿈꾸는 ‘어디 가나 한국사람’ 이라는 소극적이 고 부정적인 인물을 다룬 작품으로 보이나, 필자는 이와는 달리, 이민의 삶에 적극적으 로 적응할 수 없는 보다 원천적인, 어디 가나 ‘한국사람’일 수 밖에 없는 한국인에 너무도 충실한 인물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도리어 이 소설의 엄청난 가치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민 생활의 심한 고통이나 치열한 갈등 등이 없는데도 그저 ‘기묘한 삶’ 으로 밖에 느낄 수 없고,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도대체가 기묘한 곳이고 기묘한 삶일 수 밖에 없다는, 그래서 향수나 귀향의 꿈을 숙명적으로 지니고 살수밖에 없다고 화자는 이 민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운명적인 패배나 좌절에서 오는 그런 패망의 향수가 아닌, 숙 명적으로 한국인을 떠날 수 없는, 그래서 이국생활이라는 것이 힘들다거나 희망적이라 거나 하기 이전에, 도대체가 기묘한 삶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가 말하는 기묘한 삶이란 이민 생활에서 누구나 다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일들뿐이고, 구체적으로 기묘한 삶이 묘사된 기묘한 점은 하나도 없다. 결국 작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점은 기묘한 삶이 아니고, 기묘한 삶으로 밖에 느낄 수 없는 화자의 성격, 즉 어디를 가더 라도 한국사람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전형적인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 요가 있다. 적어도 소설을 오랫 동안 써온 노련한 작가이니 치밀한 계산에서 이러한 점 이 의도적으로 구성 되었으리란 생각이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 그 어디에서도 다른 특 별한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점이 바로 증명이 되고있다.  또한 화자가 꿈꾸고 있는 향수 나 귀향은 이곳에서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공통적으로 한번쯤은, 아니 매일같이 생각해 보는 표본과 같은 생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그 어디도 아닌 자기 자신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이민살이 란 억지춘향이 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인 달훤이라는 미소년에 대한 기억과, 어린 시절에 보았던 미군들의 기묘한 모습에 대한 기억, 이 두 기억이 이제 달훤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은 아름다운 조국에 대한 추억과 향수로 상징되고, 또 다른 하나인 어린 시절 고국에서 보았던 미군 들의 기묘한 모습은 이제 현실적인 기묘한 삶으로 나타나서, 두 기억은 서로가 대조적 인 방향으로 확대되어가는 대비법에 의한 상대적 표현이 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또한 어린 시절의 연날리기나 바다에 대한 추억 같은 것은 화자의 젊은 날의 꿈에 대한 상징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상이 표현되고 있고, 연이 잘 날리기도 하고 아니 날 리기도 하는 등의 회상은 현재까지의 운명의 변화를 암시하는등, 이러한 모두가 작가적 구성에 의해서 치밀하게 얽히어져 있다고 하겠다.
결국 이 소설은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람들 중에서, 향수와 함께 귀향의 의지로 고국을 철저하게 붙들고 사는 인물묘사에 치중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서 사건의 전개나 위기감이 전혀 없는 평범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작가가 사전에 인물묘사 내지 성격묘사의 단일한 효과를 위해서 이미 감수했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 작품은 이민 살이라는 특수한 배경 속에서 원천적으로 한국인을 떠날 수 없는, 그래서 향수와 귀향의 꿈을 언제까지나 숙명 적으로 붙들고 가야 할 전통적인 한국인을 나타내고 있다. 이민 초기의 여러 형태의 인물 중에서, 향수와 귀향의 보퉁이를 붙들고 나타나는 토속적인 한국인의 한 표본을 제시하여, 향수의 미학을 형상화한 이민 소설 작품이라는 점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흔히 보기힘든 순수소설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역시 같은 형태의 귀향의 의지를 다룬 작품으로 박요한씨의 ‘기를 흔들며’를 들 수 있는데, 이 소설이 송상옥씨의 소설과 구분되는 점은, 송상옥 씨의 소설이 이민 생활의 승패와 관계없이 원천적으로 향수와 귀향을 꿈꿀 수 밖에 없는 근원적인 한국 인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이 소설은 이민동기도 그렇고, 이민 생활의 어려움 내지 실패 에서 오는 일종의 패배 내지 도피의식에서 나타나는 귀향의 꿈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송상옥씨의 기묘한 삶이 인물묘사가 중심인 점에 비해, 이 소설은 귀향을 꿈꿀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보겠다.
9.11폭파사건 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배경으로 주인공에게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충격 적인 실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한 혼란과 고통이 결국 존 와커’라는 아랍계 미국인의 모천 회귀 정신에 힘입어 귀향을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그에게 아내의 불륜과 이혼, 딸과의 불화등의 개인적인 어려움과 고통이 나타난 다. 거기에다 9.11 사건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등의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인종차 별에서 오는 불화까지도 그를 압박해 온다. 그러나 그를 괴롭히던 백인 데이비드의 병문안을 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화해를 하는데, 데이비드는 의외로 한국을 잘 알고 있고 부러워 까지하며, 델레반 존와커에 대한 칭찬과 함께 자신과 같은 미국인들의 문제를 역설한다.  
“너희들에게는 회귀 본능이 있고 돌아갈 모천이 있다. 봐라 미국인은 멋대로다. 회귀 본능도 없지만 돌아갈 곳도 없다.”  “압둘라마드는 텔레반 병사가 된 놈이다. 그 놈은 미 친놈이 아니다. 모천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엄청난 충격과 또 다른 배신감으로 혼란에 빠지지만, 그래도 자신은 꿈속의 전원같은 고향이 있고, 산림보전 지역의 땅으로 돌아갈 모천이 있 다고 홀로 자위한다.
데이비드가 있는 병원을 향하는 차에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한다. 그 깃발은 작자와 데 이비드와의 화해의 상징이며, 알라스카 연어떼의 비늘이고, 인종과 종교의 화합인 동시 에, 자신이 돌아가게 될 모국을 향하는 깃발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9.11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이민생활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사회 적 모순이나 갈등을 모천회귀에 의한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소극적인 동기이긴 하나 역 시 귀향의 미학을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상미의 ‘겨울이 오기 전에’ 역시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귀향의 의지를 다루고 있다.
과거 고국에서 아마추어 화가이면서 교장이었던 최교장이 이제는 이곳 양로원에서 병 든 아내와 함께 생활하면서, 고국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을 통해서 이곳 양로원의 생활모습과 함께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귀향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곳 양로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노인들의 실상과 그들의 의식구조를 소상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돋보이고, 노인 천국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만이 있을 뿐, 고국보다는 훨씬 더 삭막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한인 노인들의 실생활 모습이 실감나게 잘 묘사되고 있어서 현장소개의 일차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겠다.
최교장도 고국에서4.19 폭동으로 아들을 잃고, 또 이곳에 와서도 4.29 폭동으로 딸마 저 잃게되는 비운을 겪게되고, 이제는 양로원에서 희망없이 살아가지만, 다행히 은희라 는 아들의 옛 친구인 간호사를 만나 그녀의 격려로 다시 삶에 대한 보람과 꿈을 갖게 되고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죽는날까지 버릴 수 없는 꿈, 망향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최노인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떨리는 손으로 매일같이 그림을 그린다.
이처럼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을 뜻을 한폭의 그림에 담고자 하는 것은,  최노 인의 마지막 소망으로, 이는 결국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귀향의 꿈을 그림을 통해 서나마  이루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그리는게 아니고 마음으로 그린다.
“파아란 하늘이 보이네, 감나무에 오랜지빛 감이 잔뜩 익어 매달렸네. 한 남자 아이가 장 대로 감을 따고 있고 그 곁에 한 소녀가 앉아있네, 그리고 감나무 뒤로 초가지붕들이 납작 하게 엎드려 있고, 멍멍이가 뛰어가네.”
최노인은 자꾸 흐려가는 기억 속에서도 귀향의 꿈인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기준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겨울이 오기전에 저 그림을 완성해야만 하네, 제발 기도를 부탁하네.”
최노인처럼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노인들도 한결같이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귀향을 꿈 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망향의 꿈을 회화적으로 다룬 아름다운 소설이다.

5 미주 소설 속의 아름다운 인간상
다음으로는 시대나 장소에 관계없이 언제나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이민 소설들을 들 수 있다.
첫번째 작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의지로 아득한 과거에서 광년으로 떠나와 현재의 빛으로 빛나며, 미래에 대한 꿈과 기다림으로 옮아가는 별자리처럼 과거인 조국을 떠나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이민의 삶을 별빛처럼 아름답게 꾸민 김혜령의 ‘별들의 인사’ 가 눈에 띈다
거의 모든 이민소설들이 극히 서사적인 내용을 서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이 소설은 힘들고 어려운 이민의 삶을 극히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 민의 삶이라는게 정말 힘들고 외로운 투쟁이지만, 이 소설은 그 어디에도 고통이나 갈등 같은 어두운 모습이 겉으로 나타나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 다만 모든 것이 깊이 내장 된 채 오늘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별빛처럼, 기다림과 그리움의 꿈으로 미래라는 시간 과 공간을 향해 떠가는 이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이 내임 이스 엘리자배스” 라고 전화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고향 마을 누나와의 우연한 만남이 발단으로, 떠나온 고국처럼 먼 과거로부터 떠나와 오늘 빛을 발하고 있는 별빛처럼, 화자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의 흥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서, 과거라는 고국과 현 재라는 이민의 삶을 함께 사는 행운을 맛보게 된다. 옥자 누나의 토속적인 정감있는 말투도 그렇고, 손끝에서 나오는 고향음식 솜씨나, 가족에 대한 사랑스런 배려등 순박하 기 이를 데 없는 고운 마음씨가 과거인 고국을 이민의 삶속에 재현시켜,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 이어가는 새로운 가족의 별자리가 형성된다.
  미래에 대한 꿈을 찾아 고국을 떠나왔고, 다시 가족곁을 떠나 끝내는 가족을 버린 아 버지의 신앙에 대한 꿈도 결국 별빛같은 꿈을 찾아 떠도는 나그네이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과 미래에 대한 꿈으로 별빛을 보며 살아가는 화자인 주인공도 그렇고, 떼끼야루, 떼끼야루, 하고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 과거가 없이 오늘과 내일을 사는 어린 동생 은미와, 새로 나타난 옥자 누나도 모두 함께 별자리 속의 별들처럼, 이민의 삶을 살 며 미래를 향해간다. 다만 어머니만 홀로 다른 가족과는 달리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아 닌, 현실의 어려운 삶을 도맡아 붙들고 살고 있다,
‘학업이든 돈벌이든 무엇이 되었던 간에 아버지가 집안에 남기고 간 빈 자리는 자신의 힘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 동안 자식들과 떨어져 흘려보낸 세월에 수지를 맞춰야만 한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이러한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붙들려 있는 생각이, 바로 어머니가 가장의 빈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하고 있고, 이러한 어머니의 자세가 바로 이 소설의 균형을 유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자신의 꿈인 신앙을 위해 떠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선교사가 되어 오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어머니가 있기때문 이고, 결국 그런 남편이 생길 수 있는 상관관계가 성립된다고 보겠다. 가족이 모두 이민 의 삶 속에서 미래로 가는 별빛을 붙들고 살아가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과거인 고국의 전통적인 부덕(婦德)이라고 하는 것을, 과거에서처럼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당연한 현 실로 붙들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기다림이나 그리움이나 외로움과 혹은 고통이나 원망을 그 어디에도 나타내지 않고, 가장 당연한 것처럼 천연 스럽게 붙들고 살고 있는 점이 바로 이 소설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한가지 이유라 하 겠다.
모든 것이 화자가 바라보는 별자리처럼 오늘에서 미래로 자리를 옮겨간다.
밤마다 이세상에 없는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옥자 누나도 그렇다.
‘그리운 아그에게-’ 로 시작되는 편지를 가져와 영문으로 옮겨가고, 그래서 밤마다 함 께 편지를 쓰고, 영어를 공부하고, 아기 그림을 열심히 모으는 옥자 누나도 미래의 꿈을 위해 동화속 같고 꿈속같이 아름답게 살아간다. 이민생활의 고통이나 갈등이나 치열함 도 모두 감추고 별빛처럼 그냥 살아갈 뿐이다.
‘향기로운 꽃들은 우리의 자매들이며 사슴, 말,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 나무를 오르는 수 액마저 우리의 기억을 담고 흐르는데, 나는 향기로운 꽃은 한 때 별 하나가 신호를 보내 듯 길게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다.’
이처럼 떠나온 고국도 향수도 우리의 가슴 속에 있고, 꽃과 새와 동물들도 우리 형제자매라는 주인공의 말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의 눈을 볼 수 있고, 이민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종화합이나 문화의 화합과 함께 자연친화의 정신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꿈까지도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이 디어 배이비’ 라고 편지를 보낼줄 아는 보조 간호원으로 미래를 향해 옮아가 있는 옥자 누나의 편지와 함께 다시 찾아낸 거울 조각이, 다시 한발 다가선 듯한 꿈의 열망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 점이, 이 소설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이 소설은 꿈을 찾아 고국에서 떠나와 열심히 살아가는 이민의 삶을 극히 긍정적으로, 그리고 낯설지않게 자연스러운 삶으로 형상화시킨 아름다운 이민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섬세한 여성적인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음으로 최영숙의 ‘떠나온 사람들’을 들 수가 있다.
이 소설 역시 고국에서 남다르게 불행하고 외로운 사연속에 살다 떠나와,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주인공과 화자를 통해서, 인간 내면 깊숙히 감추어진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 과 사랑의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한 소설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이복 동생으로부터의 중병소식을 접한 언니인 화자의 회상을 통해서 고국을 떠나가 살게된 동생 경애의 어린시절과 함께 복잡다난한 그녀의 한 생애 가 소개된다.  
  어머니의 매몰차고 한에 맺힌 말투 속에서 외롭게 소외된 채 성장한 경애가 결국 집을 나가 힘들게 떠돌며 살다 미국에까지 건너가 살게 된 것이다.
결국 병상의 경애와 재회를 하게되고 그가 죽고난 다음, 경애가 생명처럼 아끼고 간직 했던 몇점 안되는 낡은 유물속에서,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과 함께 동생 경애의 남모를 슬픔과 외로움과 인정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나타난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온 동생 경애의 가슴속 깊이깊이 내장되어 있던 어린시절의 영혼의 아픔이나 외로 움이 화자의 가슴을 울린다. 화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회한의 감정 이 가히 감동적이다. 결국 동생 경애의 불행이나 외로움 그리고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화자는 원망했던 아버지의 고통이나 외로움까지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침을 맞지 못하는 고통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매일 아침을 함께 한다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도 있었다.’
화자는 아버지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끝 내는 아버지의 영혼과 화해하고, 경애의 생모인 아버지의 그 여자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고국을 떠나와 살고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남다른 사연들이 있다. 그래도 그들이 그 힘든 이국살이를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서슬픈 사연들까지도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혜정의 ‘메이플 애비뉴의 비둘기’ 역시 도시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이민의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이웃을 돕는 따뜻한 인간애를 나타낸 아름다운 소설이다.
최극단의 밑바닥인 우범지역의 표본같은 뒷골목을 통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초기 이민 자들의 삶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고, 아울러 현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암울한 사회문 제를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점이 또한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자는 골목에 모인 모두가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비둘기들도 그렇고, 노 숙자들도 그렇고, 썬이라는 백인 젊은이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자기들의 본래의 삶으로부 터 벗어난 삶을 기약없이 살아간다. 노숙자들은 멀건 눈빛으로 종일 한 길만을 직선으로 갔다가 길이 끝나면 돌아서서 갔던 길을 다시 온다. 그들은 결코 길을 꺽어 다른 길을 가 지 못하고, 매일같이 한길 만을 왔다갔다 하면서 힘겹게 생존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밤이면 악마와도 같은 쥐들에게 발가락을 송두리체 뜯기운 비둘기가 한 발로 뒤뚱거 리며 모이를 쫓는 모습을 보고 작자는 중얼거린다.
“이 풍요로운 땅에서 발가락이 뭉그러진 것이 어찌 너희들뿐이랴! 노숙자도 이민자도 썬도 나도 다 너희들과 같은 비둘기란다.”
미국사회의 모순된 현실과 함께 이민의 어려운 삶의 실상이 그대로 들어난다. 이러한 뒷골목의 실상은 썬의 팔뚝에 난자한 주사자국과, 밤마다 그의 몸을 괴롭히는 힘센 빚쟁 이 남자와, 밤마다 음식 찌꺼기를 찾아 벌떼처럼 모여드는 쥐뗴들에 벌벌 떠는 그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썬의 불행을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그를 돕고야 마는 화자의 정겨운 모습에서, 우리는 인종과 신분을 초월한 모정같은 근원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결국 화자가 바라는 대로 썬이 대단원에서 베벌리힐스의 귀공자로 나타난다는, 비교 적 단편소설의 골격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는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소설은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생활의 단면과 함께 화자의 아름다운 영혼이 드러나 보이는 아름다운 소설이라 하겠다.

5. 이민의 삶 그 실존의 모습들
  다음으로 이민의 삶 속에서 그 실존의 모습을 나타내는 현장소설들이다. 이러한 소설 들은 이민소설중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인 작품들이다.
먼저 이용우의 해븐스트릿은 두 형제가 이곳 미국 삶의 현장인 최일선에서 힘들게 부딫 치며 살아가는 비교적 극단적인 비운의 경우를 나타내고 있는 일종의 이민현장 고발소 설이다. 이민의 삶이 모두가 한결같이 이처럼 힘들고 처참한 것만은 아니지만, 비교적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삶의 현장을 묘사해서, 힘든 이민 생활의 고통의 실상을 나타내고, 아울러 미국사회의 인종문제나 마약문제등 일련의 사회적 문제를 극렬하게 폭로하고 있는 최전방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준호의 형 준태는 흑인폭동으로 가게가 불타고, 그 와중에서 폭도들의 총에 맞아 한쪽 다리를 못쓰는 불구자가 되고, 거기다가 아내는 충격으로 유산을 하고 끝내는 성불구자가 된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결국 생명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잃게되는 준태 를 통해서 4.29의 폭동의 참상과 함께 그로 인한 한 개인의 참담한 피해와 그 울분을 나타내고 있다.
불탄 가게를 다시 세우고 휴학을 하고온 동생 준호의 도움으로 가게를 꾸려가지만,  스킨해드로 상징되는 불량배들의 횡포가 그치지 않자, 결국 준태의 총구에서 불을 뿜고 야 만다.
준태의 총격은 그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삶의 현장에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삶에 대 한 불굴의 투쟁정신과 함께 현실적인 갈등이 폭발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인들의 삶의 현장인 어느 길거리에서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 치열한 이민의 삶을 박진감 있게 표현한  솜씨가 크게 돋보이는  소설이다.

다음으로 이성렬의 승자게임 역시 이민 1세와 입양아 출신 한인을 통해서 이민의 삶 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삶의 방식내지 적응방법을 나타낸 이민의 실상소설이다.
네살 때 입양되어 이곳에서 성장한 프레드를 통해서 그들의 의식구조나 그들이 겪는 삶의 한 단면이 일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프레드는 이름있는 좋은 차만을 고집하고, 또한 백인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꿈을 지니 고 있고, 그의 애인 또한 백인 여자다. 이러한 프레드의 의식구조는 자신이 동양인이라 는 일종의 열등의식을 탈피키 위한 일종의 방편이겠지만, 아무튼 고국인들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작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삶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곳에서의 이민의 삶이란 그 과정이나 방법보다는 우선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과론 내지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한인 이민 1세인 장씨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데, 장씨는 이곳 백인사회에서 중시하는 순위나 우선권을 강조하는 고정관념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프레드의 사고 방식에 대해 쐐기를 박고 있다. 삶도 하나의 게임과 같아서 결국 이겨야 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장씨와 같은 한인 이민 1세들의  투철하고도 적극적인 삶에 대한 자세가 있기에 우리 한인사회가 짧은 이민역사 속에서도 이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사회적 신분등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경제적 교육적인 면에서는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그러한 우선 순위등을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앞질러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곳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인 입양아들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고뇌와 함 께 초기 이민자들의 적극적이고 투철한 삶의 한 방식을 주제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 이 소설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6. 새로운 유형의 인물 등장

  박경숙씨의 ‘동굴을 떠난 동굴나라 사람 하나’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민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혼란 속에서 자신 의 정체성을 찾아 이국에 조화되어가는 긍정적인 삶의 모습을 나타낸 소설이다. 과거의 조국과 현실속의 이국, 이 두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관념의 혼란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을 묘사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결국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화자는 이 인식의 혼란을 통 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두 세계에 조화되는 새로운 인물로 변신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의 대상은 고국과 이국이고, 내용은 고국과 이국에 대한 감정과 관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민의 삶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현실인 이국을 상징하는 것은 푸른 눈빛을 지닌 백인 점원이다. 우선 그에 대한 인식의 흐름부터 살펴보자. 그에 대한 의식의 시작은 인 종과 언어등에서 오는 선입관념이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일종의 열등 의식과 경계의 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고국의 창피한 소식 등으로 해서 그에게 황당한 모멸감으로까지 발전되고, 자꾸 눈앞에 나타나는 T.V 속의 히틀러가 촉매가 되어, 신경과민내지 피해 망상증에까지 시달리게 되고, 끝내는 적대의식내지 살벌한 대결의식으로 까지 확대되 어만간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이민 생활에서 실제 겪고 있는 고통의 상징들인 것이다.
이제 그의 고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화자는 고국을 습기가 많은 폐쇄적인 동굴이라고 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건조하고 밝은 세계를 찾아 이민을 떠나 왔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고국을 정치의 나라니 부패한 나라니 하는등, 늘 부정 적인 면만을 토로할 뿐 그 어디에도 고국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 고삐는 풀려가고, 차츰 고국을 다시 생각하 게 되고 옛 사랑에 대한 회한이 나타나는등 의식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이러한 점은 마켓에서 만난 여인의 말을 통해서 더욱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지만, 결국 이곳이나 저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상병 신이고, 도대체가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여인의 말에서 화자의 내면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화자는 자신의 고국에 대한 인식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그 혼란은 그가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영합 할 수 없는 이중성의 공간에 서 있어야 하는 현 상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중 국적인으로 동화되어가는 새로운 출산의 길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그는 밝아오는 새 아침에 드디어 눈물의 고해성사 같은 옛사랑에 대한 회한과 고 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서 오는 고독에 잠긴다.
‘나는 어느 곳에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동굴나라를 떠나 얻은 것은 더 나를 속 박하는 동굴의 형체였다. 그렇다. 자신도 분명 동굴의 일부였지 않느냐’
그에게 고국에 대한 자각과 그리움이 피어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내 눈빛이 푸른 백인 에 대한 마음에 빗장이 풀린다. 드디어 화해의 조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그저 경계를 풀고 내 모습으로만 산다면 그의 푸른 눈도 섬뜩한 밤바다가 아닌 바람 잔잔한 바다처럼 포근하게 느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극에서 극으로 전환되는 조화 내지 화합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밝아오는 새벽에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욕망이라는 껍질을 벗고 허탈한 빈 가슴 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는다.
결국 이 소설은 이민의 삶 속에서 겪는 혼란을 통한 이중의 정체성을 찾고, 회한의 눈물 끝에 싫어했던 고국과 미워했던 이국을 함께 끌어안는, 화해와 조화의 인물을 묘사한 주제의식이 뛰어난 이민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5미주  이민소설의 미래에 대한 좌표  
지금까지 살펴본 미주 이민소설을 총체적으로 크게 분류해 보면 다음 네 형태로 나누 어 볼 수 있는데,
  그 첫째 유형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언제나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인간의 아 름다운 마음의 세계를 일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민 소설들이라고 하겠고,
둘째 유형은 이민 생활의 여러 실존적인 삶의 모습을 여과없이 표현한 일종의 현실 폭로 및 현장 소설들이다. 이러한 소설은 새로운 이민이 계속 유입되는 한 언제나 나타 날 수 있는 극히 일반적인 이민초기의 소설들이고, 이러한 소설들은 각기 형태만 다를뿐, 내용은 거의가 다 동일한 이민 생활의 어려움이나 갈등내지 방황등의 실상을 나타내고 있는 소설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생만 한다면 살만한 가치가 없다.’ 라던가  ‘과정은 그래도 좋은 결과 가 있어야 가치가 있다.’ 라는 말도 기억하고 있듯이,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이민 의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 만으로는 의미가 약하고, 보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면으로 변화 되어가거나, 변화되어 있는 인물의 묘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국 창작이라는 의미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개성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나 내용 을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의 유형은 앞서의 둘째 유형과 같은 현실적인 실상소설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형태의 소설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향수나 귀향의 의지 를 나타내는 소설 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으로는 송상옥씨의 ‘기묘한 삶’처럼 특별한 가치가 있는 작품도 있으나, 대체로는 과거속의 조국을 찾아가는 소극적인 형태 라고 할 수 있어서, 비교적 개성적인 인물 묘사에 가치를 두는 단편 소설이나, 창조적인 세계에 도전하는 이민 소설로는 바람직한 형태로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네번째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고향 이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이 나타나는 소설들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서 오는 향수나 귀향이 아닌, 그렇다고 맹목적인 동화나 타협이나 모방도 아닌, 진정한 고향에 대한 향수나 귀향의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주체성이나 정 체성을 지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변화되어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우라 하겠다.  이언호씨 의 ‘리자드’나  박경숙씨의 ‘동굴’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영문 소설인 이창래씨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정채성과의 연관성을 들 수 있는데, 우선 이민1세 작가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이중성은 과거인 조국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현재의 이국을 찾아가는 것이고, 이창래씨의 소설 속 주인공인 이민 2세는 현재라는 미국문화 속에서 과거의 나인 조국을 찾아가는 그 방향 이 다를 뿐, 결과는 모두 함께 조화된 이중 문화인으로 변화되어가는 경우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화된 ‘코리언 아메리칸’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이중문화인이 바람직한 이민사회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인물들이 표현된 이민 소설이 바로 이민문 학의 가치에 근접해 가는 소설들일 수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미주 소설이 가치 있는 한국소설 내지 세계속의 소설로 남기 위해서는 우선 문 학적인 가치가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앞서 한국적인 혼과 정체성이 깃들어 있어 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주체성이나 정체성을 지닌 조화된 이중문화인으로 우리 것을 남에게 알리고, 나아가서 새로운 세계문화 창조에도 기여할 수 있는 그러한 소설 이 좋은 이민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앞으로 미주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보다 수준 높은 이민 소설이 나오리라 믿고, 아울러 우리 한인 문학이 미국 문단에서 보다 크게 빛을 발할 수 있는 미주소설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끝으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이민소설이라는 측면에 가치를 두고 쓰여진 글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