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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소설 연구(1)

2005.03.09 21:27

박영호 조회 수:476 추천:46

  
   미주한인 소설 연구 (1)

   (1)미주 한인소설의 태동과
      삼일운동 이전의 소설
      

  출항하면서
한인이 미주에 건너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 이미 백 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오늘날 미주에는 이 백만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일찍이 그 누가 이 많은 하인들이 미주에 옮겨와 살게 될 줄을 알았겠는가?    
또한 앞으로 더 많은 한인들의 이민이나 북한 동포들의 대량 이민 등,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일들로 해서 앞으로 오백만, 아니 천만 이상의 우리 민족이 미주에 옮겨가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래서 우리에게 역사가 소중한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함께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앞으로 나타나게 될런지도 모를 미래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보다 바르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미주 한인들은 숫적으로는 아직 미국 전체 인구에 비해서 극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제 한인 아메리칸(Korean American’s)이라고 하는 미국 속의 한 소수민족 집단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우리 민족이 있는 곳엔 반드시 따라 있기 마련인 우리 문학도 일찍부터 미주 한인 이민역사와 함께 그 숨결을 이어와, 이제는 미국문학 속의 한 문학형태인 ‘한인 아메리칸 문학’(korean American Literature)이라고 하는 하나의 소수민족 문학 집단(Grope of Ethnic Minority Literature)으로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러한 미주 한인 문학은 일찍부터 본국에 앞서 꾸준하게 우리의 문화와 문학을 현지인들에게 알리고, 아울러 현지의 새로운 모습을 고국에 소개하는 등 우리 문화와 문학의 교류에 앞장서 왔다. 더욱이나 1990 년대에 접어들면서 1,5세와 2세 한인들에 의해서 발표되고 있는 많은 영문 소설들로 인해 미주 한인 소설이 미주 문단에 크게 부각 되고 있는 점은 특기 할만한 사실이고, 이런 점을 두고 유 선모(경기대 영문학)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미주 한인 소설의 르네상스’ 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이러한 소설들이 미국 주류 소설이 아닌 한낱 소수민족(Ethnic minority) 소설일 뿐미 주류문학으로 인장 받지 못한다 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고, 이러한 재외 동포 문학을 한국문학에 포함 시키는 문제에 조차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을 하나의 민족문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모두가 어김없는 우리 문학이어서, 우리 민족과 문학의 영역 확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으로 본국 문학에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김동수 교수(백제 예술대)가 그의 연구논문 중 ‘진정한 우리 민족의 문학사 정립으로 우리 민족 문화의 자주성 확보를 위해서는 우선 규제되고 일실(逸失) 되었던 해방 전 항일 지하문학과 함께 해외 애국 문인들에 의해 형성된 망명문학의 실체와 그 의의가 민족사관에 의해 시급히 우리 현대 문학사에 새로 통합 재정리되어야 한다. “ 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일 합방 이후 조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종속적 문학이나 다름 없었던 친일 동화 문학과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던 지하 저항문학과는 대조적으로, 해외에서는 많은 한인들에 의해서 망국의 울분과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구국운동이 극히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발현되었던 점은, 우리 민족 저항문학사나 구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가치가 민족문학사 위에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재중 동포 문학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미주 한인 문학에 대한 연구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리라 믿고, 이러한 재외 동포 문학이 하나로 통합되고 결집된 민족문학이나 해외 이민문학 등의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 민족문학사에 시급히 통합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소수의 국문학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 온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고, 특히 조규익 교수(경희대)의 연구를 통한 ‘해방 전 재미한인 이민문학’(전6권, 월인사 간 1999년)같은 저서 출간은 초기 미주 한인들의 그 실제적 삶의 모습이나 정서적 숨결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고, 해방 전 미주 한인 문학 작품을 거의 다 수록하고 있는 점 등은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광복 이전의 초기 소설에 한정되어 있음이 아쉽고,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적인 연구 정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자료수집 및 의미설정 등의 개요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어서, 하루 바삐 이를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해 가야 할 필요가 있고, 국문학사나 민족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미주 한인 소설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와 특색에 대한 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미주 한인소설에 대한 그 의식의 변화나 사회 변천에 따른 그 시대적 구분 등이 확실하게 설정되어야 하겠고. 또한 언어에 따른 이중구조나 작품 내용에 따라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고, 개별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연구 평가가 또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우선 미주 한인 소설을 역사적이고 소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이민 역사와 사회 변화에 따른 의식의 배경에 중점을 둔 미주 소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예견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연구에 임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 미주 한인 소설의 성격
  미주 한인 소설이라고 하면 우선 ‘미주에서 한인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소설이 쓰인 공간과 필자의 신분에 관한 일반적인 표현일 뿐, 미주 소설이 지닌 고국과는 또 다른 사회적 집단의식이나 제재(題材)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따라서 이민자들의 이민 신분이나 세대나 그 표현 언어에 따라 각기 다른, 그 시대적 사회적 특성과 함께 재제상의 특색을 살펴 보는 것이 바로 미주 한인 소설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선 이민 초기소설이 지니고 있는 재제상의 특색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점이 바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세계의 모습은 현지의 실제 모습과는 또 다른 세계로, 이는 떠나온 구세계와 현지의 모습이 이중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또 다른 별개의 세계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민이란 결국 삶 형태의 한 전환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떠나온 구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불안정하고도 일시적인 혼란의 현상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환경이 바뀌면 이중적인 측면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옛 구조에 대한 탈피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 탈피와 건설은 인간의 의식 속에 이중적이고 복합적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 환경에 대한 건설이 바로 신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꿈의 실현인 것이고, 옛 구조에 대한 탈피라는 것은 과거 구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인데. 이는 건설이 끝날 때까지 병행해서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구조적인 측면에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공간과 사상 내지 정서의 배경 등이 한결같이 이중적이고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바로 미주 한인 소설의 일반적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조 규익 등 많은 분들이 경계인(Marginal man)이라는 성분상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국과 이국의 두 공간 세계가 그렇고, 과거의 구세계가 현실이라면 새 세계는 하나의 미래로 나타날 수도 있고, 또한 동양과 서양의 대립도 그렇고, 모두가 이중적인 세계가 복식 또는 혼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새롭게 전개되는 배경이 새 세계 일지라도 인물의 근원적인 성격은 과거의 세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도 있는 셈이고, 이런 점은 우리가 소설의 인물 성격론에서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라는 말을 상기해 보면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세계가 아무리 새로운 세계일지라도 두고 온 구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가 없고, 몸에 베어있는 관습과 전통의식이 미숙한 신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떠나온 구세계인 고국을 근원적으로 떠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초기 한인 소설이 근원적으로 한국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구세계가 본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의나 타의로 이민 초기 한인 소설 속에 자리잡고 있고, 이러한 점을 관념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는 일종의 민족적 주체성(Ethnical identity)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체성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지에 대한 접근이나 도전 속에서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되고 약화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혼란을 통해 나타나는 동화나 패배의 과정에서 더러는 주체성과는 또 다른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개념으로도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정체성이 바로 미주 모든 소수 민족 문학의 일반적인 특색이 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는 이러한 정체성이 하나의 문제로(Crisis Identity)대두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는 미주 소설의 미래를 예견해 볼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정체성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화되어 나타나는 이중문화나 그에 따른 인간상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이민소설이 새로운 세계문화(Global Cultural) 창조에 기여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주 한인 소설이 고국 소설과 구분될 수 있는 표현상의 특색에서도 그렇다.  미주 한인 소설이 우선 표현 언어가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는데, 우선 영어로 표현된 소설이 우리 문학의 범주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영문으로 쓰인 소설이라도 한인에 의해서 쓰여졌고 한국적인 내용이 주제나 소재로 쓰이고 있다면 이는 당연하게 한국 소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와 같은 다수의 공론일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지 미국인들이 영문으로 쓰인 이러한 한인 소설을 순수 미국문학으로 보지 않고, 미국 문학 속의 일부인  ‘소수 민족 문학’ 이라고 달리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인에 의해 영문으로 쓰인 소설 모두가 미국 소설이면서 한국 소설 일 수도 있다고 하는 표현은 합당하자지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인에 의해서 쓰인 소설이라도 작자가 완전한 미국인의 의식구조를 지닌 이민 2.3 세의 한인이라면 그 작품은 이미 한국 소설을 떠난 미국 소설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미주 한인 소설은 그 성격이 형식 내용 양면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그 성격을 보다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성격 별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여긴다.

가) 한국 문학으로서의 한인 소설
미주에서 살고 있는 1세나 1.5 세 한인들은 모국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관습이나 가치 기준 등의 의식 세게는 여전히 한국적일 수 밖에 없어서 그들은 여전히 한국인이다.  결국 그들은 미국 속의 한국을 살고 있는 셈이고. 그들이 아무리 미국에서 살기를 원해 고국을 떠나 왔어도 그들은 완전한 미국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의 관습이나 사고에 젖어서 자란 2,3 세들도 있지만, 그들도 직간접적으로 한국인 부모들의 영향 아래서 자라 그들이 완전한 미국인이 되기란 쉽지가 않다. 따라서 그들이 쓴 소설도 영어로 쓰인 소설이라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앞서 기술한 연유들로 해서 미국 문학의 한 부분일 뿐 순수 미국 소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정서가 깃든 소설은 표현 언어에 관계없이 한국 소설일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점은 우리 문화나 언어의 세계화나 이중 국적 등 앞으로의 유동성을 생각해 보면 한국문학 범주에 관한 문제가 자연스럽게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찍이 미주에 최초로 이주해온 유럽인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들이 이곳 신대륙에 이주해와 살면서 그들이 작성했던 기록은 그것이 실용문이었던 문학적인 기록이었던 간에, 그 기록은 유럽의 전통적인 사고와 관습과 정서의 연장선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욱 손쉬울 것이다.
  특히 초기 미주 한인들은 상당 수가 신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영주가 목적이 아닌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서 이민을 왔고, 정식 절차에 의한 이민자들까지도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호전만 되면 언제이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의식 세계가 이곳에 동화되어 가려는 현지 삶이나 꿈에 대한 적극적 노력보다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귀향의 의지가 앞섰던 것이고, 이러한 점은 이민의 삶 속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극히 소극적 자세라고 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이러한 점이 보다 근원적으로 한국적인 면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원천적으로 고국 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던 초기 미주 한인들에 대한 고국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 정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민을 가면 무언가 비애국이고 도망자인 듯한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 보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관습에서 오는 일종의 이질감이나 거부반응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이런 점은 일찍이 미국의 청교도 이민자들을 영국에서는 도망자 취급을 했고, 그들의 기록문을 도망자 문학이라고 비하했던 사실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 러나 한낱 도망자 문학이 미국 문학의 초석이 되었던 것처럼, 미주 한인 소설도 엄연한 민족문학으로 우리 문학의 영역확대와 함께 우리문학의 세계화의 초석이 되어 왔다는 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 미국 문학으로서의 한인 소설
미주 한인들이 쓴 소설 중에서 영어로 표기된 소설들이 우선 일차적으로 미국 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간단하지가 않다.  표현 언어가 영어이고 현지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 소설일 수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쓴 필자가 한국인이라는 점과 함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소재나 주제가 한국적인 것이라면, 이는 완전한 미국 소설이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현지인들은 소수 민족소설(Ethnic Minority Fiction)이라는 별도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그 작가 또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Korean-American Writers)라고 구분하고 있음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엄격한 미국 소설의 정의는 언어와 내용과 작가가 보다 ‘미국적이어야 한다’는 프레드릭 칼(Fredrick R Karl)의  ‘- Must became America’s Fictions.’ 라는 말과 같이 그 표현 문자와 내용과 그리고 작자가 공히 미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국적인 작가란 앨레인 킴(Elaine H Kim U.C 버클리)씨나 소설가 김 기정(Kichung Kim U.C Berkeley 문학박사 1960)씨의 지적처럼,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로서 미국에서 성장한 사람과 이와 비슷한 경우의 작가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주에서 쓰인 한인 최초의 영문 소설은 유 일한(Il-Han New, 1895-1971)에 의해서 쓰인 ‘‘When I was a boy in Korea’’(한국에서의 내 소년 시절. 1928년)이다. 이 소설은 일인칭의 자전적 수기에 가까운 내용이고, 표현만 영어로 되어있을 뿐, 내용은 필자 자신의 고국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함께 고국의 풍속과 풍물을 소개한 전기문 형식의 일인칭 회상 소설이다. 다만 독자인 현지인을 의식해서 고국의 고유한 전통 문화 내지 풍물을 많이 소개하고 있고, 미국 현지의 배경이나 정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순수한 미국 소설 작품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영문을 표현 수단으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미국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이 소설은 내용은 한국소설이지만, 형태적인 면에서는 미국 소설이라는 것이다.
유 일한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초기 영문 소설 작가들은 거의가 이민 1세이거나 이와 유사한 신분의 한인 작가들(Korean Writer’s In America)이라는 점이 특색이고, 표현만 영문으로 되어 있을 뿐 내용은 거의가 한국 소설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점이 바로 영문으로 표기된 소설도 한국 소설일 수 있다는 영어소설에 대한 우리 국문학의 확대적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미국소설로서는 불완전하지만 그리고 몇 편 안 되는 작품들이지만, 그래도 이러한 과도기적인 영문 소설들을 통해서 우리 문화와 문학을 현지인들에게 소개했던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고, 이러한 점이 바로 여타 지역의 재외동포 소설들과 함께 미주 한인 소설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가치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한인 일세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1930 년대의 강용흘, 그리고 1950 년대의 김은국과 1960 년대의 김 용익 등으로 이들은 펄벅 여사를 비롯한 많은 현지 작가들의 찬사와 함께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 했었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불완전한 영문소설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1.5 세나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2.3 세들에 의해서 미국소설에 근접한 본격적인 영문 소설들의 출현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난영이나 차학경, 그리고 이창래, 노라 옥자 등의 등장이라 하겠다. 이창래의 첫번째 작품인  ‘원주민의 소라‘(Native Speaker) 역시 많은 문학상 수상과 함께 많은 찬사를 받았던 작품인데, 이는 소설의 순수한 미학적 가치보다는 정체성이라고 하는 소수민족의 문학의 제재상의 특색이 하나의 가치로 인정된 것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은 종전까지 용광로 문화 (Melting Pot)라고 해서 일방적인 동화만을 주창해오던 것과는 달리 소수민족의 언어나 문화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샐러드 바(Salad Bar)문화나 스테인 글래스 (Stain Glass)문화로 비롯된 것이고, 이로 인해 1998년에 토니 머리슨 (Tony Morrison)이 최초의 아메리칸 흑인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던 점과도 유관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1990년대 한인 영문소설이 정체성에 대한 회의나 갈등을 통한 그 추구가 중심 주제였다면, 앞으로는 아마 그 정체성의 실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와 조화되어 나타나는 이중문화인 같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새로운 소설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미주 한인 영문소설도 이러한 현지 소수민족 문학의 특색과 장점을 살려 앞으로 출현하게 될 새로운 글로벌 문학에 참여하는 당당한 미국 주류 소설로 발전되어 가야 할 것이다.

다) 이민 소설로서의 한인 소설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종교적 역사적 그리고 생태학이나 지리적인 모든 측면에서 설명이 되고 있고, 근래에까지도 실제로 많은 종족들이 본래의 삶의 터전을 떠나서 살아오고 있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근세의 미국의 역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나라이고. 이민 문학(Immigrant Literature)이란 말도 미국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민으로 이룩된 나라이고, 지금도 이민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민 문학이 가장 활발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민자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개척자, 발견자. 항해자. 모험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앞서 기술한 것처럼 유럽에서는 그들을 두고 도망자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미주에는 1985 년경부터 한인들이 체류하기 시작했고 1903 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초기 이민자들의 성격 규정에 대해 초기의 재만 문학에서 표현된 지방문학(오양호’이민 문학론’)과 망명문학 (조동일, 강은혜 ’망명지 문학과 지하문학’)그리고 유이민(流移民, 윤영천)이라는 표현과 함께 미주의 경우는 일시 체류자(Elain Kim U.C Berkeley)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러한 신분 규정이 초기 이민 문학의 성격 규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민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의 집단의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러한 점이 바로 이민 문학의 특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이 쓴 소설이라도 거기에는 이민이라는 사회적 집단의식이 직간접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이러한 개인적인 글에서도 그들의 집단 의식의 세계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앨. 골드만(Lucien Goldman)이 그의 저서 소설 사회학 에서 ‘소설의 발생론적 구조주의‘에 의하면 ‘소설 속의 개인적인 사실들이라도 문화 창조의 집단이 사회이지 개인이 아니라는 집단적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 라는 주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이민 문학에서는 일반 문학에서 나타나는 미학적 표현에 앞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집단 의식에서 그 시대적 사회적 특성이나 문제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초기 이민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그렇다. 고향을 찾아가는 꿈의 세계에서 느끼는 일반적인 향수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서울과 이국에서 느끼는 향수가 다르듯이 시대적 사회적 지역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집단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롭게 찾아가는 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고, 이민 생활의 좌절 속에서 그리워하는 회상 속의 공간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귀향을 꿈꾸는 일시 거주자들의 귀향의 의지로 찾아가는 향수가 있다. 그것은 광복된 조국의 미래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이처럼 이국에서 느끼는 향수의 경우도 사회적 시대적 처지에 따라 각각 다른 집단적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초기 한인 이민소설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향수는 바로 마지막 경우인 귀향의 의지로 찾아가는 것이고, 그 실제적 노력은 애국이고 광복된 조국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 이민문학으로는 좀 특이한 것이고 어찌 보면 이민 문학의 본질적인 면에서 거리가 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에서 강 은일 교수나 조동일 교수 같은 분들이 초기 한인 이민문학을 두고 망명문학이리는 별도의 명칭을 도출해냈다고 할 수 있다.
망국의 비애가 하나의 실향의식이고 새로운 고향에 대한 귀향의 의지가 구국에 의한 조국광복이고 보면 이는 합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이민소설과는 달리 1968년부터 시작된 대량 이민자들에 의해 쓰여진 소설에서는 극히 일반적인 이민소설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향수만 하더라도 두고 온 고국을 뒤돌아보는 일반적인 향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아울러 현지의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새로운 고향을 개척해 가는 꿈의 세계를 나타내는 등 이민 소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미주 한인 소설은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크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서, 우리는 그 문학적 가치에 앞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초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주 한인소설 속에 나타난 그들의 의식의 변천 과정을 유기적인 문학사적인 면과 그리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초기 한인 소설 의 사회적 배경                
소설의 일반적인 미학적 가치의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성격 분석을 통한 인물의 유형을 살피는 경향이 있지만, 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적이고 시대적 특성이 강한 이민소설의 경우는 우선 사회 구조학적인 측면에서 인물과 사회의 상관 관계를 통해 제반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  
따라서 초기 한인 소설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민 초기의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민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860 년대부터 극심한 가난과 기근을 피해 개인적 혹은 국가의 권장으로 중국 연변과 러시아 연해주 땅으로 이주를 시작하였고, 벌써 1900 년경에 중국과 러시아 지역에 이미 10 만 명이 넘는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미주에는 1985 년경부터 왕실의 새로운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인 목적에서 상당수의 외교관 및 유학생이 소수의 상인들과 함께 체류하고 있었고, 정식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Hawaiian Sugar planter’s Association. 1987 년 설립)가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한인 이민선이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3일이고 이때부터 이민이 일시 중단된 1905년 봄까지 총 칠천 이백 여명에 가까운 한인이 이주를 했다. 여기에 약 천 명에 가까운 사진신부가 포함되어 있고, 이들 중의 상당수가(약 이천 오백 여명)1905년 이후 미주 본토로 옮겨가서, 주로 북가주 샌프란시코와 중가주, 그리고 남가주 로스앤젤레스 등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한인 동포들이 고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고 있었던 19세기 말엽은 급속한 자본주의 팽창으로 강대국은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한 약소민족의 강점과, 식민지의 확장을 위한 약육강식 침략정책이 강국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고, 이에 편승한 일본 역시 영토확장과 세력 확충을 위한 침략 정책으로 1902 년의 청일 전쟁과 1905 년의 러일 전쟁을 거쳐, 1905년 우리나라와 을사보호조약을 채결하여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고, 1910년에 드디어 한일 합방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서 고국에서는 일본의 새로운 문화에 동조하는 친일 문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항일, 구국문학은 지하로 숨어들어 현실적으로 활동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1920년대의 시조의 부흥 주창 등으로, 과거에로의 회귀 등을 통해서나마 민족 기운과 구국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시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해외에서는 망국의 슬픔과 참담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울분을 거침없이 토로하고 있었고,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구국운동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로 해외 각지에서 발행되던 신문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었는데, 불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1909,11) 상해의 독립신문(1925), 쎈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1905, 11,22), 나성의 신한 민보(1909), 하와이의 국민신보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문학자들은 이를 통해서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과, 이를 위한 구체적 행동의지를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본국에 비해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앞서 기술한 해외 이민자들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주체성의 자각에서 오는 일종의 사회적 민족적 집단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의 미주 이민 초기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따른 초기 소설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은 새로운 세계보다는 차라리 떠나온 구세계인 고국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상징의 실체는 바로 애국이나 애족, 그리고 구국운동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초기 이민자들의 조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이면서 또한 하나의 귀향의 의지라고도 할 수 있고, 일반적인 이민 문학에서 나타나는 내용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초기 한인 소설의 시대적 구분
이처럼 사회적 집단의식이나 역사적인 시대 배경이 미주 초기한인소설의 중요한 요소이고 보면, 먼저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시대적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도 그 시대의 역사와 숨결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변하면 소설도 함께 따라 변한다.  그러나 역사란 인위적인 것이어서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숨결에 따라 시대와 역사가 변하고 소설도 함께 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보면 미주 한인이민 초기의 소설의 그 시대적 구분은, 한인 소설의 태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으로 하나의 변화가 나타나는 삼일 운동이 그 기점으로 대두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꿈꾸어오던 조국광복의 꿈은 삼일 운동의 실패로 일시에 유산되어 버리고,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좌절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얼마 동안의 과도기를 지나서, 서서히 이제까지의 의식 구조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련의 교육 계몽사상이나, 개인의 자유 평등 사상, 그리고 적극적인 남녀 애정문제나 실용주의적 신교육, 그리고 현지 삶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적응과 조화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점은 광복이전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기점으로 이민 초기의 한인 소설을 삼일운동 이전과 삼일 운동 이후로 나누는 시대적 구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민 초기의 한인 소설은 태동으로부터 삼일운동 이전까지로 그 시대를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3) 초기 한인 소설에 나타난 형태상의 특색        
우선 문자상으로 초기의 모든 소설이 근대 국어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아래 아 점’이 완전하게 쓰이고 있고, 근대 한자어 발음 위주의 구개음과 된소리 모음이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는 한자말이나 옛 우리말이 더러 쓰이고 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가 현대어에 근접한 표기법을 쓰고 있어서 큰 불편은 없다. 다만 완독(緩讀)을 해야만 하는 불편이 따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필자가 편의상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대어로 바꾸어 표기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다음으로 구성상 특색을 보면 일차적으로 ‘짧은 소설’ ‘단편 소설’ 등의 장르에 대한 구분이 표현되고 있어서 근대소설의 장르에 비교적 익숙해 있음을 볼 수 있고, 구성상의 기교 등에서도 본국에 앞서 있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미주 초기 소설 작자들이 본국에 앞서 서구의 문예사조나 기교 등을 먼저 익힐 수도 있어서 나타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소필오(小必誤)같은 작자의 신문기사 속에서 고국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글(175 1910. 3. 15)을 통해 볼 수가 있고, 동해수부(東海水夫)의 소설 ‘옥란향’ 에서는 고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기법에 의한 최초의 서구의 탐정 소설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인칭 서술 형식의 수기나 전기문 내지 위인전의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이 많고, 몽유적 표현이나 작자의 해설적 개입 등이 심하게 나타나는 등, 아직도 부분적으로 구소설의 잔재를 지니고 있어서 근대소설로서 완전한 외형적 형태를 갖추었다고 말 할 수 없다. 또한 형식이나 구성기법에 대한 이해가 일반화가 되지 않아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콩트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소품도 눈에 뜨이는 것 또한 특색이다.  다만 수기나 전기문 같은 내용을 위인이나 영웅전 형식으로 재 구성하는 등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간접적인 형태로 바꾸어 표현하려 했던 점에서는 허구가 실체인 소설미학에 접근해가려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만,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이루기엔 아직 역량이 부족한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국과 마찬가지로 구소설과 신소설인 근대소설이 함께 섞여 있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초기 한인 소설의 작가적 특색
초기 소설 작가를 살펴보면 실명을 사용한 사람은 많지 않고 거의가 필명이나 성씨만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작자 미상도 많다.  이처럼 실명의 필자가 많지 않은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소설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소설을 한낱 이야기로, 그리고 소설가를 이야기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의 작자들은 상당한 식견이나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직접 독립운동 등의 정치활동과도 연계된 사람도 있었던 관계로, 신분 노출을 꺼려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은 초기 소설 연구에 한 장애적 요소가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래도 소수 작자에 대한 자료가 나타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고, 특히 신한 민보의 중심 인물로 많은 평문을 발표한 ‘만리경’의 소필오나  ‘철혈원앙’의 동해수부 같은 작가의 자료가 이 시기의 다른 작가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필명 중에 영어 이름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도 우리는 많은 작가들이 유럽과 현지의 문화에 상당히 익숙해 있는 상류 지식인들이고 지도층에 있는 애국자들이었다는 점을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작가에 대한 연구는 작자의 소설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소설 속에 나타나는 계몽사상이나 애족사상 등의 소설 주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초기소설 작자 중 가장 크게 눈길을 끄는 작자는 동해수부(東海水夫)이다. 이분은 신한 일보에 관여했던 분으로, 가장 많은 작품(시, 소설. 산문)을 발표했고 특히 광복 이후에까지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다.
다음으로 만리경의 작자 소필오(小必誤)는 그의 필명으로 본명이 이 항우 다. 일찍이 영국에 머물다가 도미해서, 소설을 발표하던 즈음에는 신한 민보 주필을 역임했고, 많은 글을 발표했던 그 시대의 대표적 저술인으로 ‘우리 친구 생일’ 이란 글에서 친구에게 자신의 필명에 대해 설명한 바로는 자신은 동포로 하여금 실수를 적게 하기 위함이고, 이것이 바로 동포와 나라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의 필명을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이분이 글 쓰는 목적은 문학창작에 있지 않고, 바로 동포와 나라를 위한 애국 애족에서였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는 사회적인 글과 문화에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하여, 고국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이나 고전소설의 답습 등 문학이나 문화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역설 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소설 집필 의도나 주제의식을 엿볼 수도 있다.
아무튼 초기소설의 보다 구체적 연구를 위해서는 작자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 필수적이어서 앞으로 꾸준하게 작자에 대한 자료 발굴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5)초기 한인 소설에 나타난 일반적 주제의식
  광복 이전까지 발표된 소설은 모두 30 편이고, 초기 한인 소설은 최초로 작품이 발표된 1909년부터 삼일운동 이전까지로 이 시기에 발표된 소설은 미완성인 4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모두가 17편이고,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L.A의 신한 민보에 발표된 것들이다.
이중에는 단 1회용으로 발표된 소설도 4편이나 있으나 나머지 모두가 거의 연재형식으로 발표되었고, 37회의 긴 연재로 중편에 가까운 길이의 소설도 있다. 아무튼 소설의 형태가 크게 다르고, 미완의 작품이 많고, 필자의 형편이나 신문사의 형편에서 일 수도 있겠지만, 우선 소설의 게재의 형태적인 면에서 아직은 미숙한 편이고, 소설 내용면에서도 역시 소설의 미학적 가치를 충족시키기엔 크게 부족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처럼 소설의 일반적인 미학적 가치에 크게 부족한 면과는 달리, 소설의 한 기능이기도 한 사회학적인 집단의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초기 소설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고국에 대한 애국애족 사상과 함께 조국광복 염원에 대한 구체적 집단의식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점은 어찌 보면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이민 문학으로서는 거리가 먼 내용이고, 그래서 이민의 삶에 대한 현지의 모습을 다룬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이 이상하지만, 그들에게는 현실적 삶의 문제보다는 나라의 위급한 운명에 대한 개선이 시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귀향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구체적 기대가 조국광복이라는 하나의 민족적 집단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내용들이 지나치게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내용들을 배경으로 택한 점이나, 영웅이나 위인의 인물 설정 등 비교적 현실성이 없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향수와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낭만적 애국심’ 이라고 표현한 조 규익 교수의 주장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애국사상과 함께 하나의 축을 이루고 나타나는 점이 바로 남녀 애정문제다. 이러한 애정문제는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겠지만, 초기소설에서는 순수한 남녀 애정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소설은 없고, 거의 모두가 애국사상 표출을 위한 하나의 흥미와 사건 진행을 위한 보조적인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러한 점은 개인적인 애정문제 보다는 국가에 대한 사랑이나 구국운동이 우선이라는 사회적 집단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남녀 인물 중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여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돋보이고, 어쩌면 이러한 점 역시 애국전선에 여성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애국사상의 표현이라 할 수 있고, 또한 현지의 남녀평등 사상에 대한 현지문화 소개에서 기인된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주제가 새 세계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소개다. 이러한 내용은 소설 속에 나타나는 현실적 배경이나 사건을 통해서 직간접으로도 나타나고 있지만, 새로운 정신세계인 기독교 사상이나 서구의 교육사상 같은 내용은 작자의 의도적인 계몽정신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서구 사상의 표현은 구세계인 고국의 여러 구습과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대한 간접 비판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결국 계몽을 통해서 자각과 개혁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선구자적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삼일 운동을 고비로 차츰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삼일운동의 실패를 통한 좌절과 새로운 자각에서 오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전환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은 사회나 소설의 일반적인 발전 과정과도 상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작품을 통해서 본 구체적 집단의식
가) 애국 애족 정신의 발현
전기한 것처럼 초기 소설의 일반적인 특색은 바로 신세계에 대한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현지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하나의 상장적인 세계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야 할 고국의 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애국애족의 정신과 함께 구국운동의 발현이다.
총 17편에 이르는 초기 소설 작품 중 교훈적인 내용만을 나타낸 한두 편을 제외하곤 모두가 애국정신이나 구국투쟁이 중심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이처럼 그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조국광복이 최대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의식 발생 동기는 바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이 하나의 애국심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적 가치를 위해 애국사상을 차용한 것이 아니고, 애국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설이란 방법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국 국민들은 조국을 사랑하지만 이국에 사는 동포들은 조국을 사랑하다 못해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글이나 이민의 삶의 어려움이나 그 고통을 나타낸 글은 이민 초기 소설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들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바로 조국 사랑이고 그들이 찾아 가고자 하는 귀향은 바로 조국의 광복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의 실현을 위한 독립운동이 가장 자연스럽게 모든 소설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이들 중 애국 사상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 시대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만리경(萬里境 )> (小必誤. 1910.1.9)
  이 소설은 민씨 시해 사건의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신첨지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싸우는 항일 투쟁과 애국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 소설은 12회로 연재되었으나 완결이 되지 않아서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을 살필 수는 없으나, 12회까지 연재된 소설로 사건의 진행에 따른 인물 성격의 변화가 나타나는 성격 묘사가 나타나고 있는 점과 함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의 특색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소설이라 하겠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인 신 첨지가 민비 시해사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직접 항거하기 위해 나서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일하게만 살아가는 당시의 지배계급인 상류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학자(理學者)와 이장의 설득으로 포기하게 되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려는 그의 아들 경만이를 만류한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내는 일인들에게 까닭 없이 구타를 당하고 집이 불타고 그의 아내가 죽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결국 경만이는 가출을 하고 구국전선에 나서게 된다.  이를 극구 만류했던 신첨지는 차츰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아들을 대견해 하고, 소극적이었던 나라에 대한 사랑이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인 신첨지와 그의 아들 경만이, 그리고 양반인 이학자(理學者)와 이장, 이렇게 세 부류의 인물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 아들 경만이는 신세대답게 그릇된 양반들을 경멸하고 애국사상이 투철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류사회 양반들은 그 시대의 지배 계급으로 현실에 순응하며 안빈낙도나 즐기는 모습으로 그 혼탁한 시대적 배경을 잘 나타내고 있고, 주인공인 신첨지는 아들 경만이와 양반들 사이에 서있는 경계인물로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순수한 애국심으로 나서려 하나, 양반들의 현실적인 설득으로 현실에 순응하게 된다. 그러나 일인들의 만행과 함께 아들 경만이의 구국에 대한 정신과 행동에 감화되어 자신도 적극적인 애국인으로 변해가는 심경변화가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결국 구 세계와 신세계 사이에서 갈등과 방황을 느끼다 참된 애국자로 변신 하는 신첨지의 성격의 변화가 중심축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다만 표현 방법이 일인칭에 의한 서술 방식으로 근대소설의 표현 방법에 미흡하고, 소설의 주제나 성격변화에 대한 절정을 이룰 수 있는 사건에 따른 소설 결말이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따라서 소설의 내용 전개를 근거해 보면 이 소설은 미완의 작품이라는 추리가 타당할 것이다.

< 애국자 성공>(이대위. 1911. 1. 25)
  이 소설은 고대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통한 일종의 전쟁 군담 소설이다. 또한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애국이라는 주제를 도출해 내고 있는 점에서는 일종의 영웅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주인공 인물의 자전적 기록이 미흡하고 소설의 후반부에야 주인공이 등장하는 등, 역시 영웅적 인물 소개보다는 인물을 통한 조국과 민족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중심점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기원전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서 있었던 포외니 전쟁을 배경으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꾀했다는 점에서 소설적 가치를 살필 수 있겠고, 방대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전쟁을 통해 많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 등의 새로운 세계인 서구의 역사적 사실이 소개되고 있다.
이 소설은 17회나 연재된 비교적 긴 소설이고, 카다지 전제자의 끊임없는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일관되는 역사 군담소설이지만, 그 핵심은 주인공인 우래굴래스의 진정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그의 희생적 순국의 죽음이 모든 로마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로마가 카다지에 승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개인적인 희생정신은 조규익 교수의 지적처럼 일찍이 신라의 화랑정신이나 이순신 장군의 순국에 의한 노량해전의 승리 등을 연상해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이러한 점은 서구 사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으로 인류 구원과 연계될 수 있어서, 희생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찾게 된다는 기독교 사상의 간접적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우래굴래스의 애국적이고 헌신적인 순국으로 온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승리한 것은 사실적이고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이어서, 실제로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인물이 우리에게도 출현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온 동포가 애국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조국광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작가적 의도가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셈이다.

<난처난처 >(남궁시예라, 1911, 2. 8)
  이 소설은 단 일회로 발표된 아주 짧은 소설이지만 소설 기법상 초기 소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일인칭 서술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지만 그 표현이 여타의 소설과는 달리 간략한 표현의 사건 소개와 함께 그 감정 표현이 타 작가에 비해 월등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흥미와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발단은 의병의 아내인 여인이 자신의 내력과 함께 남편을 만나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등장되는 사실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군 진주, 어머니의 죽음, 강원도 이주 등의 자신의 내력과, 의병인 남편의 총상과 외국신부 도움, 그리고 자신과의 결혼 등이 다시없이 간략한 표현으로 빠짐없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 왜군들의 횡포와 위급했던 조국의 처지를 엿 볼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여인의 남편이 의병을 도왔던 연유로 일병에게 붙들리어 처형을 기다리는 위급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여인은 밤을 세워 호미로 벽을 뚫어 남편을 구한다. 그러나 다음날 이제는 아버지가 대신 붙들리어 다시 시한부로 처형을 기다리게 되자. 이에 여인은 일병에게 나아가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다. 이에 일병은 그에게 남편을 찾아오도록 하고 시한을 처형 시간을 늦추어 준다. 여인은 남편과 아버지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적 비극의 기로에서 갈등을 느끼고 남편을 찾아 나서게 된다. 고생 끝에 간신히 남편을 만나지만 여인은 그냥 남편을 안심 시킨 채 돌아온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남편이 뒤따라 오게 되고 일병에게 다시 붙들린다. 일병들은 그에게 의병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회유를 한다. 여인은 남편이 그들에게 회유될까봐 가슴을 조이지만, 남편은 끝내 회유되지 않는다. 목숨을 내건 두 부부의 애국정신이 여기에서 이 소설의 절정을 이룬다. 이에 여인은 남편이 자랑스럽고 존경심마저 갖게 된다. 남편이 바로 처형되려는 순간 총소리와 함께 의병들이 들이닥치고 왜병들이 달아나는 것으로 소설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다시없는 긴박함과 위기의 연속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사건의 흐름이 독자들에게 다시없는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성이 높은 소설이다. 특히 단편소설의 구성상 특색을 잘 살려 사건의 진행이 조금도 무리가 없는, 초기 소설에서 보기 힘든 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로, 이 시대에 쓰인 무리하고 장황한 해설이나 설명으로 주제에 대한 이해를 설득하는 소설들과 크게 다른 수작이라 하겠다.  

<미인의 마음(美人心. )>(동해수부, 1912, 1,15-1914, 6,18)
이 소설은 신한 민보가 잠시 정간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두 해에 걸쳐서 12회로 연재된 소설이고 서두에 특별히 ‘정치소설’ 이라는 구체적인 장르명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 소설은 유럽의 발칸반도 전쟁을 배경으로 매리와 현트라는 두 남녀 주인공을 통해서 남녀의 애정문제와 함께 애국사상 등을 표방하고 있고, 아울러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 할 수도 있다는 여성의 우월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애정과 애국심을 병합해서 다루고 있으나, 그 중심의 축은 조국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다.
러시아에 붙잡혀가는 부친으로부터 애국하라는 당부를 받고 자란 매리는 어려서부터 이웃으로 함께 자란 현트와 사랑하는 사이이나, 매리는 현명하고 애정과 애국정신이 강한 여인이지만, 현트는 이와 대조적으로 현명치 못하다. 매리는 이러한 현트를 도와 그를 통해서 나라를 구하려 하지만 현트는 끝내 매국을 하고야 만다. 이에 매리는 자결하는 것으로 남편의 죄를 대신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결국 그의 자결은 남편을 대신해 조국에 대한 남편의 죄를 속죄하고 조국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한 셈이다.
이처럼 남성보다 우월한 여성을 통해서 애국사상을 전달하려 한 점에서는 작자의 다른 소설 ‘철혈원앙’과 같지만, 여인이 직접 행동으로 나서게 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철혈원앙’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는 여필종부라고 하는 내조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대단원에서 나타나는 자살을 택한 그의 죽음은 남편 현트의 매국에 대해 국가에 사죄하고 상징적으로 국가를 살린다는 점에서는 그 어느 여인보다도 적극적인 애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에서 서구 정신의 중심이 되고 있는 예수의 대속과도 같은 기독교적 행동이 엿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서양 인물을 등장시킨 점이나 사건 전개가 비현실적인 점이 험으로 남는다 하겠다.

<희안한 사람>(1913.10, 30 대시생)
이 소설은 단 일회 게재된 것으로 사건의 진행이 거의 없는 아주 짧은 소품이다. 러시아의 왕정에 항거하는 망명정치인으로 보이는 윌넘이라는 한 러시아인의 국가를 위한 헌신적이고 비범한 영웅적 기개를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한 초라한 집에 외롭게 사는 수심에 찬 주인공이 소개되고, 많은 책과 장검과 갖가지 총기류가 취사기구와 함께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으로 그가 범상하지 않는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느 날 오후 피터라는 청년이 찾아오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멀리서 방문객이 오는 점을 암시한다.
다음 아라사를 떠나 런던으로 오던 모스코바 호가 암초에 부딪쳐 자신의 모친과 아내와 함께 오백 명 승선인원이 전부 익사 했다는 전보를 받고 월님은 기절하다시피 뒤로 넘어진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자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때여 때여 좋은 때로다. 이날 이 시로부터 모두 평생 좋은 때로다. 내가 항상 가족에 매인 관계로 나의 몸이 속박되어 일을 이루지 못하였더니, 하늘이 기회를 만들어 나의 가족을 불러 갔으니. 이제로부터 나의 마음은 자유로다. 때여 좋은 때로다. 대장부 일하기 좋은 때로다.”
하고 칼과 총을 차고 밖으로 나가니, 주위 사람들이 그를 두고 노국의 허무당 영웅이라고 수군댔다는 이야기다.
허무당에 대한 설명이나 구체적 투쟁목적 등이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가족의 죽음이 차라리 자신의 구국투쟁을 위해서는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투사의 영웅적 희생정신과 기개를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지만 지나친 과장과 별다른 사건 진행이 거의 없는 단일한 의미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꽁트에도 못 미치는 소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남녀 애정과  여성 우월성에 대한 표현
초기 한인 소설에서는 봉건사회인 미주 초기 소설에서는 여성 상위 정신이 나타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형태가 나타나고 데, 애국자 성공, 철혈원앙, 남강의 가을 등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남녀애정 문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세계로 표현되기 마련이어서, 미주 초기 소설에서도 이러한 애정문제는 애국애족 사상과 함께 초기 소설의 가장 큰 축으로 거의 공통적으로 모든 소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내용이 동일한 주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여기에서 보다 중심이 되는 축은 애국사상이다. 이러한 점은 그 시대의 사회적 집단의식이 개인적인 애정 문제보다는 국가적인 애국에 대한 의식이 우선했다는 집단 현상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애정 문제를 통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색을 볼 수 있는데, 여성 상위의 우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점은 앞서 소개한 ‘미인심’이나 다음에 소개되는 철혈원앙 등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가 있다.
동해수부의 작품 ‘철혈 원앙’에서의 주인공 풀로랜쓰와 ‘미인심‘에서의 매리는 모두가 애국 여성으로 여성 상위의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풀로랜쓰는 잔다르크적인 행동 투사로 표면에 나타나지만 매리는 남편의 내조자로 남편을 통해 애국을 실행하는 그 방법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여인상에 대한 표현으로 우리 것을 지키려는 주체성을 의식한 표현으로도 이해 할 수 있으나, 아무튼 남성보다 여성을 우월하게 표현한 점에서는 같은 것이고, 이러한 점은 여성들에 대한 자각을 호소한 것이라 할 수도 있고, 또한 여성을 애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끌어 들이려는 목적에서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그 시대의 집단적 의식의 표현이기도 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고,특히 동해수부의 페미니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드러나 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남강의 가을>(엣스 생 1917. 5. 3-1917. 7. 26)
이 소설은 배경이 외부 세계가 아닌 실제 고국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두 남녀의 사랑과 애국정신을 통해서 개인적인 사랑보다 국가의 장래나 독립투쟁이 앞선다는 앞서의 기술이 실증되는 소설이다. 두 남녀의 사랑이 아직은 완전히 결합되지 못한 채 독립투쟁 뒤의 미래의 꿈으로만 상징되어야 하는 점이 특색이다. 결국 남녀의 결합도 조국광복처럼 꿈이나 기다림의 의지로 표현되고 있고, 구국운동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애국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작자가 표제를 남강의 가을 이라고 표현한 점에서도 현실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애정이나 이룰 수 없는 독립 등그 시대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애정이나 독립활동에 대한 구체적 결말이 미제로 남는 등 구성상의 허점이 나타나지만, 다른 소설에서 보기 힘든 고국의 토속적인 배경을 택한 점이나, 소설의 서경적 전개가 나타나는 등, 소설적 미학적인 표현이 탁월하고, 부분적으로 시제의 복합적 구성 등이 나타나는 등, 근대소설적 특색을 많이 지니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만한 소설적 형태를 갖춘 점이나, 이중적 주제를 나타내고자 한 작가적 의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점에서는 고국 신소설에 결코 뒤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이 작자는 ‘가는 세월 ‘(462.1917. 12. 9) ‘친구를 보내노라 ‘(1917. 12.13-12. 20) 등의 시를 발표한 적도 있는데, 시의 내용이 상당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식을 지닌 문장가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소설은 많은 분들이 본국 이상협(李相協 )의 소설 재봉춘(再逢春)을 개작한 것이라고 하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한 나그네가 진주로 가는 남강 산기슭에서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