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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소록도 이야기

2008.11.02 04:14

박영호 조회 수:226 추천:8

젊은 날의 슬픈 이야기 (2)
소록도 이야기 /박영호
소록도 사연 / 유승부
가슴 찡한 이야기/ 유승부

소록도의 슬픈 이야기 (1)

      소록도 이야기 / 박영호
      소록도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당시 소록도를 다녀온 뒤로 저는 한동안 
      소록도의 기억이 떠올라 한없는 슬픔에 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그 때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처음
      으로 하나님에게 제가 그 때 보았던 너무나 슬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
      비슷한 것을 드리고, 그리고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던 자신에 대
      해 안도감을 느끼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죽는 것이야 지금은 제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고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상중의 하나지만, 세상을 잘 모르던 스무살 적에 
      보았던 병든 그들과 그들의 사연이 나를 너무나 슬프게해서 그처럼 한
      동안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록도를 방문한 것은 제가 고교를 졸업하고 찾아 들어간 평일도라고 
      하는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도 작은 섬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록도가 있는 곳은 그 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고흥 반도끝에 있는 녹
      동이라는 포구의 바로 앞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있던 섬에서 육지로 가는 주 뱃길이 주로 서쪽에 있는 완
      도를 통해 목포로 가는 길이어서 그쪽으로는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
      러나 소록도가 있는 동쪽 여수쪽으로는 여행할 기회가 없어 소록도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습니다. 송광사가 있는 전남 승주에 사는 친구를 
      방문할 기회가 생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승주를 가자면 바로 녹동으로 
      가서 고흥반도를 따라 뻐스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봄 방학을 이용해서 가려고 작정하던 중, 소록도를 다녀온 마
      을 한 청년으로부터 소록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쯤이면
      해마다 소록도에서 소록도 병원창립 기념일을 기해 행사가 크게 열리고, 
      그날 하루만은 환자 가족과 함께 일반인들에게도 섬을 개방한다는 것입
      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을 맞춰 여행일정을 짜 모처럼 소록도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소록도 섬은 녹동 포구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곳에 있는 아름다운 섬
      입니다. 병풍처럼 육지 산자락이 둘러서있는 둥근 호수 같은 만의 한 복
      판에 자리잡고 있어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그 모습이 무척 포근하고 아
      늑해 보였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섬과 주변의 풍광이 워낙 뛰어난 
      곳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섬의 풍치가 너무 좋아 일찍이 일본 천황이 
      그곳에 별장을 지을 계획까지 세웠었다고도 합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 그들을 처음 본 것은 바닷가를 메워서 만든 항구 도시의 
      기차역 뒤 바닷가  돌밭 언덕에서였습니다. 그들은 거적 같은 것을 뒤집어
      쓰고 서너명씩 짝을 지어 그곳에 움크리고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그들은 늘 죄인처럼 말이 없었고, 언제나  고개를 
      깊이숙이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천형을 받은 거라고들 했지만, 
      그들은 본 나는 그들이 한없이 가여웠고, 왜 다른 거지들과 달리 사람들에
      게서 천대를 받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섬에 오르자 그곳은 여늬 부두와는 좀 다르게 무척 침울한 분위기였고, 
      청년단원 비슷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들 스스로 치안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자치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환자촌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으로 띠엄띠엄 서있는 파출소와 우체국 같은 
      관공서 건물이 서있는 길을 따라 조금 걸어들어가니, 커다란 출입문이 
      있고 그 양켠으로는 철조망이 끝없이 쳐 있었습니다. 섬 전체가 이처럼 철
      조망으로 일반인이 사는 곳과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이등분 되어 있어서 
      이 통로를 통해서만 환자들이 외부 세계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입문 안쪽은 길이 아주 깨끗하게 닦아져 있고, 길 양편으로는 무궁화를
      심어 같은 높이로 잘 다듬어 놓았습니다. 
      출입문에서 조금 들어가자 그곳에는 주로 관리 사무소 같은 여러 건물들이 
      섬에서 보기힘든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고, 생각보다는 시설물이 많고 
      규모가 커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도시의 그 어느 병원 못지않게 큰 
      병원 건물이 있고, 정원이 아주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었는데, 도시에서
      도 보기 힘든 새빨간 일본 봄단풍 나무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처음으로 설립했다는 일본인 원장의 동상이 인상적이
      었는데, 그 때는 동상에 새겨진 소개글대로만 훌륭한 분으로 알았는데, 
      후일 그분이 자살을 한 것이 아니고 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진상이 
      밝혀졌다고 하니, 혹 다른 분의 동상인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는 노릇입니다.
      
      병원을 둘러보고난 저는 다음으로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철조망 가까이에 
      있는 학교를 찾아 갔는데, 이미 행사가 끝났는지 학교에는 별로 사람이 없
      고, 학교 건물은 의외로 교실 두세칸 밖에 안되는 아주 규모가 작아보였
      습니다. 한쪽 교실에 문이 열려있고 그곳으로 사람이 드나드는 것이 보여, 
      무심히 그곳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교실에는 학생들이 쓴 글을 벽에 
      붙여놓고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벽으로 다가가서 무심히 그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글을 체 다 읽기도 전에 저는 바로 목까지 왈칵 솟구쳐 오르
      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마구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에 엄마를 봅니다. 
          엄마!
          하고 소리치며 다가 가지만 
          엄마는 그대로 사라져 버립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왜 나는 엄마와 함께 살 수 없나요 
          나도 엄마와 함께 살고 싶어요
          엄마!
          엄마1 
      
      대강 이와 비슷하게 쓰여있던 그 글은 초등 학생이 쓴 시같은 글이었는데,
      부모곁을 떠나와 홀로 이곳에서 살면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너무도 슬픈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꿈 속에서 어머니 얼굴울 보고 그리워한다는 그 
      어린이가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죄가 있길레 그렇게 그토록 어린 나이에 그처럼 혹독한 고통과 외로움
      을 겪어야 하는지... 저는 흘러내리는 눈물로 그 글을 차마 다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곁에 보는 사람이 없어서 눈물을 훔치면서 다른 글들도 
      읽으려 했지만 끝내 다 읽지 못하고 교실을 뛰쳐 나왔습니다.   
      '파랑새 학교'
      학교 사무실인 듯한 조그만 건물에 붙어있는 학교 이름이었습니다 
      파랑새란 말은 마치 이곳에서 사는 그 어린이들이 파랑새라도 되어 부모형제 
      곁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그 어린이들 마음을 써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이곳에 사는 어린이들을 단 명이라도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미 거처로 다 돌아깠는지 주위에는 단 한명의 학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교 전시장을 떠나서 섬안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습니다.
      입구에는 두세개의 게시판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는 병균의 전염에 대한 
      주의 사항이나 환자 마을에 대한 소개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섬 안에는 일곱개의 환자마을이 있고, 병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정해 함께 
      같은 마을에 살고 있고, 섬 끝쪽으로 들어갈수록 병세가 심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마을에 이르자 그들이 사는 농가들이 보였습니다. 환자들은 일반 
      농가와 다름없이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인지 일하는 사람이나 나와 활동하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방문객인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곳 저곳
      에서 더러 보였습니다. 어는 농가 앞에서는 환자인듯한 젊은 처녀가 마당
      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ㅣ를 무릎속에 뭍고 울고 있고, 그 앞에 처녀의 
      부모인 듯한 사람이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앉아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정경이 그렇게 측은하고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첫번째 마을 지나자 섬 중앙에 뽀쪽한 십자가와 종탑이 서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다가다 교회안을 드려다 보았습니다.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른 
      여신도 몇분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위 벽에 그들을 내려보고 있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 앞 바닥에 엎드려있는 신자들들 함께 바라보면서 하느
      님이 주신다는 그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각기 다른 운명을 주시는 깊은 까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저로써는 아무 것도 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나와 세쩨 넷째 다섯째 마을을 지나니 어느 집에선가 가벼운 울음
      소리가 들릴 뿐, 단 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 어린시절 멀리 바닷가에 움막을 치고 살던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 가여운 사람들ㅡ  
      
      팔뚝에 찬 시계를 내려다 보니 어느덧 뱃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만 발길을 
      돌렸습니다만, 저는 그날 그곳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소록도! 그리고 가여운 사람들...
      섬 이름이 아름다운 것처럼 섬은 천혜의 섬처럼 다른  섬들과는 달리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뼈아픈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고, 이를 보고난 저는 너무 가슴이 아파 차라리 이곳에 오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제가 그들의 형제나 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습니다. . 
      그리고 그 때까지 막연하게나마 그들에게 느꼈던 혐오감이나 거리감이 얼마나 
      죄스럽고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새심 깨깨달았고, 그동안 그들에게 네가 죄를 
      짓고 살았다고 생각하고, 저는 교인이 아니었지만 저 스스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배를 타고 떠나오면서도 나는 파랑새 학교 교실 벽에 붙어있던 어린이들의 
      눈물에 얼룩진 슬픈 글과 글과, 상상되어지던 그들의 슬픈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울적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훗날에도 소록도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 때의 정경과 
      그 슬픔이 새삼 떠오르곤 했습니다.  
      
    -소록도의 비참한 이야기- (2)
    아래 두 이야기는 제 사범학교 동창인 유승부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사진:나무풀)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가 만나게 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을씨년스러운 건물
    -검시실입니다. 앞 부분은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 뒷쪽은 정관
    절제를 행하던 수술실.모든 사망 환자들은 본인이나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망원인에 대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섬 내에 있는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환자들을 스스로를 '3번 죽는다'고 자조했다던가?
    한센병 발병이 첫번째 죽음, 시체 해부가 두번째 죽음, 장례 후
    화장이 세번째 죽음. 지금처럼 화장이 일반화되기 전이니
    그 심정의 처절함이 오죽 했으랴..

    (사진:나무풀)

    디귿자로 연결되는 감금실로 들어서는데, 차가운 손이 등을 훑어내리는 것 같은
    싸늘하고 무겁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진 것은 단지 내부에 불기가 없었기 때문일까..
    몇 몇 일행이 아우슈비츠를 연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진:단공)

    숱한 사람들이 여기에 세워진 들것에 실려와서 ....

    (사진:청사초)

    ...이 수술대 위에서 단종 수술을 받았을 것입니다.
    정관절제는 한센병 환자 근절을 위해 1927년 일본 한센 연구학자에 의해
    제기되어 실시되었는데, 개원 이래 실시되던 남녀 별거제는 1936년부터
    이 수술을 받은 경우 부부 동거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사진:단공 )

    詩라기 보다는 절규나 비명으로 느껴집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과 절망감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그리하여 더욱 미래가 까맣게 타들어 갔을..'
    이라고 사진을 찍은 단공 님이 말합니다.
    정관절제는 감금실에 수용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들의 벌칙의 하나로 행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진:종소리)

    일본의 한센병 환자들은 1998부터 나병환자 격리정책으로 인권을 침해 당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5월 일본
    구마모토(熊本)지방법원은 이 소송에서 정부의 피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고,결 직후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항소 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한센병 환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1만여명의 환자와
    유족들에게 환자 1인당 800만∼1400만엔씩 보상금이 지급됐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해서는 보상 대상을 규정한
    '후생노동성 고시'에 '소록도 자혜원'과 대만의 '낙생원'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보상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소록도 한센인 117명과 대만 '낙생원' 한센인 2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2005년 10월 , 대만 측 소송에 대해서는 원고 승소 판결을,
    한국 특에 대해서는 원고측 청구를 기각하는 엇갈린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제하에서 단종수술이라 불리던 출산권 침해는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어
    1960년대에는 가족계획시책으로 이름만 바뀌어 지속적으로
    실시됐습니다.

    한센환자에 대한 인권 침해가 비단 이 부분에만 머물러 있겠는가?
    해방 이후 그들에게 저질러 졌던 집단 학살 사건도 확인된 것만
    11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전남 목포에서는 탈옥수들이 탈주 도중 한센인
    마을에 들러 죄수복과 환자복을 갈아입자 이들을 쫓던 사람들이 죄수복을
    입고 있는 한센인 주민 40여명을 학살하기도 했고,
    경남의 한 한센병 공동체가 비토리섬을 개간하기 위해 섬에 상륙했을때는
    섬주민들이 천막을 불질러 환자 26명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천 비토리 사건)

    사회적 다수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이런 사건들도 사건이지만.
    그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차가운 시선들과 뿌리 깊은 선입견이
    불러온 사회적 차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진:태산목)

    이 추모비는 '소록도 84인 학살사건'이라고 불리는,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병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발생한 원생들과
    병원 직원들과의 다툼에서 몰살된 84명의 환자들을 기억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지구상의 한센 가족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인권회복을
    위하여'라는 것이,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의 주인공
    조백헌 원장의 실제 모델인 조창원 전 소록도 병원 원장이
    이 비를 세우고자 애쓴 이유입니다.

    (사진:오로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고
    한하운은 '소록도 가는 길'에서 노래했는데, 소록도 내의 대부분의 건물을
    짓는데 사용한 이 붉은 벽돌들은 물론, 현재 각종 관상수와 추모비 등등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 중앙공원을 조성하는데는 불구원생들이 강제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생들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사진:청산 )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는 이 詩碑가 있는 곳은,
    중앙공원의 중심부인데, 일제 때 4대 원장으로 취임했더 수호(周防正季)
    원장의 동상이 서 있던 자리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정수 원장의 실제 모델인 수호 원장은
    소록도를 세계최고의 시설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원생들을
    노예처럼 부립니다, 마침내 자신의 동상을 세워 원생들에게 참배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끊임없는 강제 노역으로 병세는 악화되고,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바다로 뛰어 들어 도주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등의 참사가 이어지자, 원생 이춘상(李春相)은 수호 원장을 칼로 찔렀고,
    원장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춘상은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
    시정을 바라고 싶었다고 당당하게 진술하고 사형당했습니다.



    * 가슴 찡한 소록도 이야기 (3)*


    시가 새겨진 커다란 이 바위는 완도군에서 옮겨왔는데,
    제대로의 장비가 없어 나환자들의 목에 나무를 매달아 이리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들에게 노동과 수난을 강요했던 동상 대신
    이 詩碑를 세울 수 있었음에 원생들은 힘이 덜 들었을까 ?...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둘째, 세째, 네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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