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사평역에서'

2004.08.02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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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구 '사평역에서'





*** 3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1954 - ) 「사평역(沙平驛)에서」 전문

1980년대 젊은이들의 한 정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시다.
작품 속의 사평역이 지금은 없어진 남광주역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고 곽 시인의 고향에 있는 남평역의 이름을 고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두의 가슴에는 뚜렷이 느껴지는 시골 역의 대합실에서 잠시 피곤한 몸을 녹이는 나그네가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한줌의 눈물을 불빛에 던지며 때론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2004-01-05 23: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