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2005.11.20 09:54

미문이 조회 수:488



박완서[-g-alstjstkfkd-j-]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읽고

                                          미문이 4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2004년, 현대문학)을 최근에 읽었다. 6.25동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에 겪은 일을 담은 일인칭 소설 <그 남자네 집>은 화자의 어린 시절부터 육이오 사변까지의 얘기를 담은 그녀의 다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편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화자의 첫사랑에 비중이 크게 맞추어져 있어서 전기적인 느낌이 적고 작가 자신도 <그 많던...>에 붙어있던 ‘자전적 소설’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모든 소설이 그렇듯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을지 모르나 <그 많던...>과 비교해 훨씬 허구적인 요소가 많은 소설일 것이라고 추측해보았다.
   이 소설은 전후에 화자의 가족이 이사를 가 시집갈 때까지 살았던 동네를 우연히 다시 찾아가게 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자기가 살던 집터는 없어졌지만 자기와 사랑을 나누었던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다. 그 동네를 보며 화자는 어려운 시절을 극복해나가는 자신과 이웃의 가족사, 그 황량한 시대에도 피어나는 청춘, 그 남자와의 사랑 등을 잔잔하고도 섬세하게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 남자는 아버지가 월북한 부잣집의 아들로서 화자와는 먼 친척뻘이 된다. 그래서 둘은 오누이처럼, 친구처럼 지내며 사랑의 표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속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화자는 결혼을 하고, 결혼생활 중에도 달콤한 일탈을 꿈꾸며 그 남자를 만난다. 어느 날 약속이 어긋나 헤어지게 되는데 화자는 그 남자의 머리에 벌레가 들어가 수술 끝에 결국 시력을 잃게 됐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몇 년이 지난 후 장님이 된 그 남자를 다시 만난 화자는 아직도 과거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남자에게 위악적인 꾸짖음으로 그에게 장님이 되었다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시켜주며 헤어진다.
   그 남자는 어머니가 물려준 재산으로 사회사업가로 변신하고 행복한 삶을 살다 세상을 뜬다. 화자는 그 사실을 신문의 부음난을 통해 안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 남자를 만나 그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포옹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문상은 가지 않는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나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갈등하며 사랑하며 헤어지며 살아왔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 읽었다. 어떤 삶이고 간에 그 내막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다. 어떤 형식으로든 삶을 치열하게 극복해가는 모습에서는 늘 감동을 받는다. <그 남자의 집>이 오래전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니라 나의 오늘과 직결돼 있는, 우리 부모님 형님, 누님이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라서 더욱 그러하다.
   작가는 이 소설집의 서문에서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축하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남아 있는 거라고는 살아남기 위한 아귀다툼밖에 없던 시절 문학이 그 누추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전후 최초의 문예지를 창간한 현대문학사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도 한 번 근사하게 나타내고 싶었다”고 박완서 소설가는 얘기한다.
   나는 이 문장 속의 ‘문학’을 ‘사랑’으로 바꾸어 읽어보았다. 우리 인생의 살벌함, 누추함, 황량함, 그리고 절망감 등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 밖에 없지 않을까. ‘문학’도 결국 ‘사랑’의 다른 말이 아닐까. 실제의 박완서 소설가처럼 화자는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화자와 고락을 같이 하던 작중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거의 모두 세상을 떴다.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모두 지나간 시대와 함께 결별하고 잊혀져 버렸지만 그들이 남긴 ‘사랑’만이 장편의 소설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때론 열정적으로, 때론 쓸쓸하게 떠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