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색깔의 아픔들 / 노기제

2008.11.03 09:21

미문이 조회 수:109 추천:1

여름방학을 시티칼리지에서 보냈다. 어디론가 휴가를 떠나고 싶단 생각이 없기에 새로운 과목을 배우기로 했다. 막연히 부러운 눈길만 보내던, 카메라를 목에 건 멋진 모습을 내 자신이 연출해 보는 기간이다. 여름방학 중 5주 동안을 거의 매일 학교에 간다. 디지털 카메라 사진 클래스에 등록 했기 때문이다. 제법 값나가는 카메라를 학교측에서 빌려 준다. 미국의 교육제도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음에 고마웠다. 첫날 강의를 듣고, 직접 캠퍼스로 나가 실습을 하면서, 새파란 20대 클래스메이트들과 실력을 겨룬다. 교수님의 강의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실습한 사진들을 곧바로 화면에 비춰보며 사진 이론과 더불어 평점을 받는다. 전문 용어가 잘 이해 되지 않아 엉뚱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따라가기 힘들거란 생각으로 아예 포기 할까 망설였다. 봄 가을 학기엔 다섯 달에 끝내는 강의를 다섯 주로 압축해서 하려니 숙제 분량이 엄청 많다. 날마다 100여장이나 사진을 찍어야 하고 빛과 노출, 구도, 창의성 등을 생각하며 새로운 사물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야 한다. 남편 출근 하면 집안 일 끝내고 저녁 준비 하기 전까지의 많지 않은 시간을 이용해서 학교 생활을 하는 내겐 무리한 과목이다. 해 뜰 때, 해 질 때, 해 없을 때, 달 뜰 때, 각양각색의 빛을 만나러 나가야 하니 숙제에 소홀해 진다. 결국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내게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완전치 못한 영어실력, 자유롭지 못한 시간대, 나이 차로 못 미치는 순발력, 찍은 사진들 컴퓨터로 옮긴 후 CD로 구워서 제출 하기까지의 과정이 내겐 숨막히는 순간들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나 스스로가 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 앉은 학생, 뒤에 앉은 학생, 옆자리에 앉은 학생, 여기저기 고개 돌리며 잠깐 여유를 보이는 학생에겐 막무가내 도와달라고 조른다. 착한 아이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알아 듣도록 설명을 해 준다. 수업시간에 맞춰 끝내지 못하면 직접 자기가 해 주기도 한다. 이 메일 주소랑 전화 번호를 적어 주며 언제든 물어보란다. 게다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까지 해 준다. 절대 그만 두지 말란다. 아주 잘 한다고. 매번 학생들이 해온 숙제들을 정리해서 잘 된 작품들만 화면에 올려 평가를 해 주는 교수님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내 작품 한 두 개는 꼭 뽑아 준다. 특별히 나만 용기 주려고 그러겠지 생각하면서도 슬며시 자신감이 생긴다. 30명 학생 중에서 작품이 뽑히지 못하는 사람이 10여명은 된다. 오르락 내리락 자신감이 춤을 추는 사이 끝 작품으로 자화상이다. 마지막 수업시간은 그 동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작품 둘을 골라 8X10 크기로 인화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스물을 한꺼번에 모아 또 다른 8X10 인화지에 담아오면, 교실 벽에 전시하고, 각자의 작품세계를 발표하며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 동안 내게 도움을 준 친구들을 대접하고 싶어서 학생 30명 분의 피자를 내가 사기로 했다. 나이로 보나 경제적 여유로 보나 내 몫임이 분명한 때문이다. 자화상에 나타난 모습과 그 작품에 붙여지는 설명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가 겪어 온 아픔들을 나누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가슴 뭉클한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조용히 들어나고 있는 숙연한 시간이다. 어둔 밤 남의 집 차고에 힘겹게 기대 앉은 걸인의 모습은, 알코올 중독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의 허망한 인생을 표현하고자 한 죠셉의 눈물 섞인 작품이다. 웃통을 벗긴 채 굵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입에 딸라 몇 장 물리 운 헝클어진 금발의 젊은 청년의 비장한 모습은, 러시아에서 유학 온 대니의 돈이 원수라는 설명. 돈이 없어 이것도 저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란다. 깨진 거울을 배경으로 축 쳐진 희망 잃은 긴 머리 고운 처녀의 모습은, 부모와 동생들을 돌보느라 간호 보조원 생활로는 전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절망스런 인생을 보인 필리핀에서 이민 온 마리아의 가슴 찡한 설명이다. 베이비 크립 속에 자신을 가두고 감옥에 갇힌 노예를 표한 흑인 닥터의 작품은, 기필코 의사가 되겠다고 이름도 닥터라 지었다며 아직도 조상들의 노예신분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듯한 자신의 신분을 이기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는 꼭 의사가 되겠단다. 내가 가장 심각하게 느낀 것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운 여러 가지 자태로 온통 작품을 메운 로버트의 설명이다. 멕시코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나, 미국인도 아닌, 멕시코인도 아닌, 더구나 한국인도 아닌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언제나 숨고 싶어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려 했다는 정체성을 찾고자 애쓰는 이제 스무 살 청년의 아픔이 내게 진하게 전해져 온다. 화려한 차림의 여배우를 방불케 하는 요염한 자태의 여인, 아이린의 작품은 역시 이민자의 고된 삶이 주제다. 부모형제들 치다꺼리에 자기 인생의 반 이상을 허비한 억울함을 화려함과 부유함의 상징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서 위로 받고자 내 논 작품이다. 이젠 무엇으로든 보상 받고 싶은 심리를 담았다고 한다. 요란한 응원과 함께 불려 나간 나는 62세의 연장자로서 하고 싶은 말은 누구의 인생에도 아픔은 있게 마련이다. 파안대소하며 밝은 표정의 자화상이지만 내 인생의 아픔도 너희들 못지 않은, 오히려 더 심한 고통이었다. 난 언제나 긍정적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내 인생은 밝아 졌고, 슬픔이나 고통을 가볍게 지나가는 지혜를 하늘로부터 받으며 하루하루에 올 인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고, 잘 웃고, 절대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순간에 만족할 수 있다고, 그러니 너희도 예수를 믿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해서 큰 박수를 받았다. 기억에 남을 좋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이 아직 젊고, 공부하는 처지고, 무엇이던 꿈을 갖고 펼쳐 나갈 좋은 시기건만, 그들 나름대로 심각하게 자리한 인생의 아픔들로 인해 눈물 보이는 지금의 저들 모습이 귀하고 아름답다. 그들 모두가 그 아픔을 딛고, 더 높이 비상할 수 있기를 고개 숙여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