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넝쿨 흐르듯 / 성영라
2012.05.14 05:41
지난 두 주 동안의 마음졸임이 끝났다. 아니다.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을 번복하던 어머님의 혈압이 잠시 휴전중이다. 입맛 없음과 답답증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이시다. 원고마감은 코앞인데 일상의 해내야 할 일은 요일마다 줄지어 있고 마음은 편치않다. 그래도 오늘은 던져 둔 글들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독이며 랩탑을 들고서 뒷마당으로 나간다. 나에게도 광합성이 필요하다.
장미나무와 복숭아나무 사이, 볕이 잘 드나드는 땅에 푸른 물결 흐른다. 호박넝쿨 강물이다. 별반 기대없이 시든 애호박 묻어 둔 곳에서 피어난 기쁨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 옆의 이웃과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씩씩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요란떨지 않고 무심한 듯 거침없이 생명을 키워가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호박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나 자신 유순한 강이 되어 흐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일주일이면 손바닥만한 웃음으로 피어나는 잎들. 두어 차례 그 호박잎 쪄서 쌈 싸먹고 된장찌개 끓여먹고, 한번은 연한 잎 가려 이웃에게 주었다. 어느새 두 팔을 벌린 것보다 웃자란 넝쿨을 만들었다. 며칠 전엔 봉오리더니 오늘은 노란 꽃들 별처럼 달려있다. 신라면 면발보다 디지털파마 머리카락보다 예쁜 웨이브를 가진 호박손을 건드려보다가 내친 김에 물까지 준다.
전혀 몰랐다. 일주일 전에서야 알았다. 호박넝쿨 줄기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을 말이다. 잎을 통해 흡수된 물이 그 빈 줄기관을 통해 넝쿨 전체로 전달되는 것임을. 딴에는 잘 한다고 어머님 오시기 전 날 쯤에 줄기까지 제법 넉넉히 똑,똑 따버렸던 것인데... 혈압약 드시고 살살 걸어보려고 뒷마당에 나오셨다가 살 몇 점 붙어있는 생선 뼈같은 넝쿨을 보신 거다.
호박넝쿨이 건강하게 살려면, 열매를 맺으려면, 벌레에게 파먹혀 상하거나 쇠해진 잎들이나 어린 잎들 적당히 듬성듬성이라도 한 몸으로 붙어있어야 하는 거라며 안타까워하셨다.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호박잎들 다시 자라주었다. 고맙다.
올 여름, 16년 동안 한지붕살이를 하시던 어머님이 독립하여 살아보시겠다며 노인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셨다. 옮기시기 전 심은 늙은 호박이 푸른 넝쿨을 이루었다. 물 주던 것 멈추고 호박잎 두 손으로 받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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