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 최영숙

2008.02.13 13:24

미문이 조회 수:289 추천:3

버스를 타고 찾아간 곳은 바닷가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지난 가을 고추를 부쳤던 산 밑 둔덕에는 비닐 조각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나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둔덕을 따라 산길로 접어든 노인을 부지런히 뒤쫓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운차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머잖아 노인이 발길을 멈추었다. 그앞에는 억새들이 수북히 자라 있었다. 낙엽이 쌓여 있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 내린 봄기운이 목이 꺾어진 억새 위로 흠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조는 듯 마는 듯 구부리고 있던 오리 나무에서 묵은 잎 하나가 부스스 떨어져 나갔다. 쯧쯧! 그새 이렇게 됐군.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이끼 돋은 길목을 잔뜩 틀어 막고 있자 노인은 썩은 나무 가지를 집어서 그것들을 걷어 냈다. 밑에서 녹슨 모터 오일 깡통이 튕겨 나왔다. 나는 갓 돋아난 별이끼를 밟고 서서 노인이 다가선 곳을 바라 보았다. 북쪽 능선 너머에서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억새로 뒤덮인 그곳은 산소가 분명했다. 노인은 발길로 억새를 다잡아 쓰러 뜨렸다. 그러고 나서 들고온 소주를 조심스럽게 종이컵에 따랐다. 간신히 형체만 남은 봉분 앞에 술잔을 내려 놓은 다음에 옆에다가는 담배를 붙여서 꽂아 놓았다. 담배에서 불꽃이 발갛게 살아나며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노인은 흡족한 웃음을 띄고 나를 건너다 보았다. 그 동안에 어지간히도 입이 궁금허셨던 모얭이여. 담배 타들어 가는 것 좀 봐라. 노인은 중절모를 벗어서 싸리 나무 위에 올려 놓고는 정성스럽게 절을 했다. 너두 위선 으르신네 헌테 절부텀 해라. 산비둘기가 가까운 언저리에서 울고 있었다. 봉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일어서자 갑자기 훈기를 품은 바람이 새순이 돋는 싸리 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노인은 어느 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닷물은 마주 보이는 섬쪽으로 빠져 나가 있었다. 아스라하게 멀어진 바닷물은 연 하늘색을 띄고 같은 색의 하늘과 마주 닿아 있었다. 내가 한 열살 쯤 되었을 때였어... 노인이 코맹녕이 소리를 내었다. 술기운 탓인지 노인의 얼굴은 검붉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김 익호라는 양반이 있었지. 아까 비석에두 그 양반 이름이 들어 갔다만...아주 똑똑헌 분이었다. 이 양반이 수원 고농에서 공부를 마치고 여기 고향엘 와 보니깐 헐일이 너무 많드려. 동네 사람들이라구 삼시 한때 죽 끓여 먹기두 바뻐서 죽어라구 갯벌 만 파던 까막눈 투성이었으니...나라를 뺏겼다구 해서 서러울 것두 읎구, 그저누가 나랏님이 되든 배만 안 곯으믄 천하 태평 인줄 알었으니깐....너남 읎이 다 그럴 수 밖에 읎었다만. 그래 위선 저 위쪽 바닷가에서 야학당을 시작허셨지. 근데 이 야학당이 몰래몰래 소문이 났겄다. 그러구나니까 여기 저기서 똑똑허단 젊은이들이 죄다 모여들구... 아무튼 낭중에 만세 운동이 터지구 나선 그 젊은이들이 수원꺼정 나가서 격문을 뿌리구 아주 대단했지. 을마나 대단했든지 대한 구국단에서 밀사가 내려 오기꺼정 했다. 사실 화성에서 만세 사건이 크게 일어난 건 그 양반들 힘이 컸어. 나는 산소에 묻힌 사람이 김 익호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견해에 구태여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영웅은 시대가 만들었을 뿐이었다. 만세다 뭐다하구 난리쳐서 얻은게 뭐 있습니까? 나라는 이미 넘어간 뒨데. 그러기 전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은 다 뭐했습니까? 만세만 부르면 나라가 저절로 되돌아 오는 겁니까? 배불러지구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불타죽고 매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구요.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우리가 바로 독립 했습니까? 겨우 남의 힘으로 독립 얻어서는 그것도 제대로 건사 못해 반조각은 쏘련한테 넘겨준 조상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당했던 건 사실 우리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힘이 넘쳐 났더라면 일본을 삼키고 난 다음에 또 태평양인들 못 쳐들어 갔겠어요? 지지리도 못났던거죠 뭐. 노인은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 보았다. ....그려, 그런 말 들어두 싸다. 그치만 그건 모자라구 못나서만두 아녔어. 우린 애시당초 나라끼리 치구 받구 삼키구,그런 시상이 있는 줄두 몰렀구 거기에 껴보지두 못헌 인생들이여. 우리 맘대루 헐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었어야지.뵈는 거라군 흙탕물 일어나는 앞바다하구 송챙이두 굶어 죽는 벌건 산등성이 뿐이었어.높은 양반들이 살기좋은 시상이라구, 황국 시민이 됐다구 지화자 좋을씨구 돌쳐 가는 판국에. 그려, 단 한가지는 우리가 헐 수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참어내는 거 말여. 나는 숨을 삼켰다. 노인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서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 보았다. 난 말여, 무식해서 암것두 몰러. 그치만서두 그 양반들이 밤을 도와 걸어 다녔던 저 쪽길이나 여기서 뵈는 갯물을 보구 있으믄 말이여, 오죽이나 막막했구 답답했을까 허는 생각이 드는 거여.. 게다가 돌짝 틈에 찡겨서 피어 있는 해국을 보기라두 하믄 ....난, 코허리가 시큰거려. 그 놈은 말여, 바깥 시상 꽃들이 다 지구 매운 갯바람이 일어나는 겨울이 되어서야 꽃이 피지. 생각해 봐라, 그 양반들두 다아 우리와 똑겉은 사람들이었어. 매맞으믄 살이 아프구 굶으믄 배고픈 사람이었단 말여... 노인의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그런 양반을 내 손으루 그렇게 죽이다시피 하구 난뒤룬 말여...달을 봐두 별을 봐두.... 나는 그제서야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하지만 노인은 내 짐작과는 달리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누님이, 느이 할무니가 말이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데루 시집을 와 살림을 허구 있었다. 사둔 집이라구 해두 어린 내가 뭐 어려운 줄 알었겄냐. 더구다나 야학당 선상집이었으니. 그래 헐일 읎는 나는 시집간 누님 댁에 가서 사뭇 살다시피 했었지. 시집 온지 두어 달 밖에 안된 누님은 화초 같이 고왔지. 내가 가믄 슬그머니 엿덩이두 손에 쥐어 주구, 눈치 읎이 때거리에 들러두 아뭇소리 않구 누님 밥을 덜어서 주구 허니 내가 오죽이나 좋았겄냐. 근데 그날은 웬일인지 누님두 안뵈구 김 선상님두 안뵈는 거여. 신바람이 난 나는 왼 집안을 뒤져가며 맘껏 놀았지. 첨에는 먹을 걸 찾아 다닌거였는데 아무도 읎으니까 내 시상인줄 알구선 말여. 그러다가 헛간에서 뭘 찾아냈어. 짚더미 속에서 종이 뭉치를 본거여. 다발루 묶여 있는 종이가 으찌나 탐이 나든지.그때만 해두 우리네는 종이 귀경두 못헐 때였으니깐 . 어린 맘에 욕심껏 움켜 갖구 그냥 도망쳤지. 거기에 뻘건 색으루 자주 독립이니 뭐니 씌여 있는 걸 대충 읽을 줄은 알었지만 그게 무신 뜻인지 꺼정은 내 몰를 때였어. 그걸루 바닷가에서 딱지를 접구 있는데 순사들이 오는 거라. 이상헐 정도로 그 놈의 순사들이 나헌테 으찌나 슬겁게 굴든지 말여, 나는 아예 앞장 까지 서서 누님 집을 가리켜 주었지 뭐여. 낭중에 알었지만 그때가 사강에서 그 난리 났던 직후였으니까 왜경들이 을마나 눈이 벌개 있을 때였겄어. 이튿 날 새벽에 누님 집에 불이 났어. 난 얼결에 뛰어 나갔다가 먼 발치에 서 집 주변에 숨어 있는 왜경들을 봤지. 그때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뭔지를 알었지만 그냥 무섭기만 했어. 김 선상님은 그때 돌아가신거여. 누님은 천우신조로 친정길에 기셨기 땜에 화를 피허셨지. 그 놈들은 김선상님이 자고 있는 걸 확인하군 기다렸다가 새벽에 불을 질른거여. 그게 불질에 시발이었어. 산너머에 있던 느이 진오가 동네두 그참에 화를 당했지. 낭중에 들러보니 집터만 댕그라니 남아 버리지 않었겄냐 ..... 나는 이마에서 진득거리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환청이었을까? 문득 알수 없는 아우성을 들은 것만 같았다. 누님이 실성허지 않은 것만 해두 내가 감사헐 뿐이었다. 느이 할무니는 그때 태중이었어. 노인은 남은 술을 병 채 들고 마셨다. 그 뒤루 바깥 사둔네가 실성을 해버렸지 뭐냐. 누가 붙들어 놓지 않으면 주재소 앞에 뛰어 가서 만세를 부르시는거라. 왜경들이 그저 죽지않을 만큼만 패서 내던져 놓으면 사람들이 떠메서 모셔 오길 한 두번이 아니었구먼.... 내가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서 뱃놈이 되 버린 것두 바루 그 일 때문이었어.그런데 십년만에 돌아와 보니깐 실성했던 노인 양반이 안즉두 살어 기시지 않겄냐. 그때 읃은 장독으루 시난고난 허시면서두 목숨을 부지허구 기시드란 말이여. 그래 내가 맘을 고쳐 먹기루 했다. 느이 할무니는 암것두 모르구선 내가 그 양반을 돌봐디리는 것만 고마워서 들르기만 허면 빈손으루 안보내구 허신거여. 노인 양반이 그래두 수를 다허구 가시는 바람에 내가 쬐끔은 숨을 쉬구 살긴 했다만서두... 그러면 그 어르신네는 언제쯤 돌아 가셨나요? 꽤 됐지. 아마 느이 할무니 돌아 가시기 한해 전인가 될꺼다. 여기 댕기러 오셨다가 소식을 들으셨으니깐... 나는 할머니가 머리맡 봉창을 두드리며 탄식 처럼 부르던 노래 가락 소리를 기억해 냈다. 노인은 비탈길로 내려 섰다. 자갈이 흘러 내린 길을 따라 얼마큼 내려 가자 곧 해안에 가 닿았다. 방금 내려 온 산의 한자락이 바닷물에 깎여서 벌건 아랫 도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인은 수평선을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순태, 너 헌테 못헐 말을 했나보다. 죽을때 꺼정 아무한테도 말 안할려구 했는데.. 아니 땅 속 까지 지구 가서 느이 할아버님 한테나 이실직고 할렸는데... 그 양반 산소를 돌볼 사람이 읎어서 혀를 물고서 너 헌테 연락했다. 노인은 긴 여행에서 막 돌아 온 사람처럼 지쳤지만 푸근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조가비 모양으로 바다를 감싸 안고 있는 해안선에는 폐선 한 척이 엎어져 있었다. 닻을 매단 밧줄이 갯바닥에 길게 늘어진 주변에는 진 초록빛 이끼가 탐스럽게 돋아 있었다. 섬 바깥 쪽에서 부터 바닷물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물결을 따라 작은 배 한 척이 해안으로 다가 왔다. 그 뒷편에서 짙은 쪽빛 바다가 넝실 거렸다. -소설, <<고해>> 끝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