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찾아서-이용우

2006.09.15 15:42

미문이 조회 수:577 추천:60

-꽁 트-
                          

명우가 밀어넣는 대로 택시 뒷좌석에 오르며 정환이 힐끗 돌아보니 문밖까지 따라나온 그의 아내는 멀리 수평선에 떠 있는 조각배를 바라보듯 몽롱한 눈빛을 짓고 서 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또 시작이군, 하는 체념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명우가 다녀 오겠습니다, 하니까 정환의 아내는 나부죽이 허리를 꺽었다.
-뭐야, 왜 또 미쳤어?
차의 출발을 기다려 정환이 묻자 명우는 씨익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준다. 정환이 종이를 펴보니 그것은 ‘황가네’ 라는 소주집 광고였다. 큰 접시에 갖가지 음식을 담은 칼라 사진과 함께 소주 한 병을 끼워서 얼마 하는 식의 광고지 전단이었다. 헌데 소재지가 가데나 였다.
-아니, 소주 한잔 마시자고 원정을 간단말이야? 친구야, 좋은 술집은 이 엘에이에 다 있어. 공연히 택시비 허비하며 가데나까지 갈필요 없다구.
그러나 명우는 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미소는 이미 변할 수 없는 각오를 단단히 한 명우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순수다. 우린 지금 소주를 마시러 가는게 아니라 순수를 찾아가는 거야, 정의의 싸나이를 알현하는 먼 도정을 나선 거다 이 말이다. 자 이걸 읽어봐.
정환이 명우의 손가락을 따라 광고지 하단으로 눈을 내려보니 -가라오께 FREE- 라는 글씨 밑에 선명한 붉은 색으로 이렇게 써 있었다.
[정의로운 사람은 결코 비굴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하하, 정환은 참지 못하고 그만 경멸의 폭소를 터뜨렸다.
-하참, 너 같은 별종이 또 하나 있구나, 야, 이게 소주집 광고문이냐, 독립선언서지. 그래, 여하튼 한번 가보자, 대체 소주를 얼마나 정의롭게 파는지 가보자구.

그들이 우람한 흑인 가드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황가네’는 초저녁인데도 빈 테이블이 별반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광고 문구처럼 정의롭게 소주를 팔기 때문에 이렇게 장사가 잘될 거 라는 생각을 하지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명우는 이것 보라는 듯 정환을 향해 턱을 꺼떡 치켜 올렸다. 정환은 누가 뭐래,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 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잡고 술과 안주거리를 시켰다.
그런데 주문한 것을 기다리며 홀 안을 슬슬 둘러보는 정환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열 두어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삼삼 오오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남녀의 비를 조화롭게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화를 조금만 들어보면 이번엔 그들이 처음부터 동행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농담에 끽끽, 까르르, 호들갑스럽게 웃는가 하면, 술이나 음식을 권하는 어간에 저급한 예의를 과장되게 깔고 있었다. 은밀한가 하면 호기롭고, 부자연스러운가 하면 지나치게 끈끈했다. 정환이 -야, 정의로운 쐬주집이 어째 야리꾸리 하다, 라고 명우에게 말하려는 데 웨이터가 주문한 것을 들고 왔다. 소주와 안주 두어 가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꽁지머리 웨이터가 상체를 살짝 낮추며 저어, 하고 입을 열었다.
-저쪽에 앉아계신 여자분들... 괜찮으시다면 테이블로 모실까요?
정환과 명우는 그게 무슨 말인지 미처 상황판단을 하지도 못한체 우선 웨이터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미쳐 보지못한 주방쪽 테이블에 삼십 중반의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각 테이블 사이에 어깨높이의 칸막이와 함께 각종 화분들이 여러개 놓여있어서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없이 여자들에게로 돌렸던 얼굴을 서로에게로 향했다. 둘의 동공이 각각의 눈 속에서 비맞은 개미처럼 허둥 거렸다.
-아가씨... 를... 말 하는 거요?
정환이 더듬거리며 무색해진 얼굴을 웨이터에게로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우의 구둣발이 테이블 밑에서 정환의 발등을 눌렀다.
-오케이, 좋아요. 딱지 안맞게 잘좀 해보시오.
가슴을 한껏 젖힌 명우는 숙달된 조교처럼 호기롭게 말했다. 아가씨 어쩌구 하는 정환의 말에 레몬 씹은 표정을 짓던 웨이터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허리를 꺽으며 물러 갔다. 정환은 이거 어찌되는 거냐, 하는 눈으로 명우를 쳐다봤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믿어, 정의를 믿으라구!
명우는 비장한 기대감으로 입을 굳게 다물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 우섭지도 않은 일이어서 정환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사이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웨이터를 앞세운 여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웃음을 역시 조금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예의란 늘 그러하다는 듯 여자들의 술잔을 향해 명우가 소주병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였다. 얼굴이 갸름한 여자가 아, 하며 한 손을 들어 제지 했다. 순간 당황한 명우가 그러나 호감어린 미소를 풀지않은체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 대답은 겹귀걸이를 한 여자가 했다.
-저희들 독한 술은 못마시걸랑요.
아, 그러시군요, 하면... 하고 어차피 총대를 멘 명우가 재차 물었다. 겹귀걸이는 허리를 약간 비틀며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그바람에 겹귀걸이의 말은 배배 꼬여 나왔다.
-싸안사추운.
정환과 명우는 겹귀걸이가 한 말이 무엇인지 몰라서 동시에 네? 하고 되물었다. 겹귀걸이가 미국에 오래 산 티라도 내려는지 리듬까지 라라라 넣어서 -싸안사추운, 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보졸레 지방에서 생산되는 무슨 유명한 와인의 이름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러자 갸름한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또렸한 발음으로 정정을 했다.
-아이, 산사춘 말이예요, 산사춘.
-아, 네에, 산사춘! 그 이효리가 광고 하는 산사춘, 맞지요?
명우가 얼른 그렇게 눙쳤다. 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네, 맞아요, 네에, 하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정환도 명우의 고개짓에 따라 -아, 이효리, 하며 하하하, 무안한 폭소를 걸게 쏟았다. 술동네 은어도 못알아 듣는 애송이 고딩처럼 잠시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 바람에 계산없는 웃음을 왁자하게 터뜨릴 수 있어서 그들의 분위기는 단번에 초등학교 동창회처럼 화기애애 해 졌다. 그녀들은 순진한 파트너가 걸려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얼른 지워버렸지만, 명우는 오히려 숙달된 여자들을 만난게 잘된 일 이라는 얼굴이었다.
-자, 이 밤을 위하여!
명우가 소주잔을 치켜들며 그렇게 선창 했다.
-그래요,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바름샷!
겹귀걸이가 역시 리듬을 듬뿍 친 목소리로 장단을 맞추었다. 목덜미에 쥐가 날 것처럼 유치했지만 명우의 말처럼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정환도 힘차게 잔을 들었다. 명우는 겹귀걸이의 산사춘 잔에, 정환은 갸름한 여자의 산사춘 잔에 ‘챙’ 하고 부디쳤다. 그리고 술잔의 바닥이 보이도록 목젖을 한껏 치켜 올렸다.

여자들이 담배를 피운다며 나간지 족히 20분은 지났다. 소주 세 병에 산사춘 다섯 병이 비는 동안 여자들이 흡입과 분사를 이유로 자리를 뜬 것이 서너차래 되었지만 이번처럼 오랜 시간을 소모한 적은 없었다. 명우가 적당히 풀린 눈에 의혹을 싣고 그를 건너다 보며 씨익 웃었다. 고개를 크게 주억 거린다.
-여자들이 가버렸나봐, 담배연기 타고 훨훨 날아간 거야, 그렇지?
-그럴거야, 나이트클럽으로 가자는 걸 거절할 때 여자들 눈빛이 달라지더라구. 너도 봤잖아, 한숨을 폭 내쉬는 거.
이런 쫌씨들, 그렇게 말하듯 겹귀걸이는 노골적으로 행, 하고 콧숨을 뿌렸었다. 내가 이까짓 산사춘이나 얻어 먹자고 이런 중노동을 치냐, 하듯 그 때까지 들고 있던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담배갑을 들고 발딱 일어 선 것이었다. 그들이 같이 술을 마시던 두어 시간 내 그래왔지만 갸름한 여자는 이번에도 겹귀걸이의 비서처럼 냉큼 따라 나섰다. 그렇게 여자들은 사라졌다. 짐짓 흥겹고 끈끈 하던 시간을 꿈처럼 깨어버리고 훨훨 날아갔다.
-야,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렇게 말도없이 가버린다냐? 말하고 가면 누가 잡나, 도대체 여자들이 정의감이라곤 약에 쓸래도...
명우는 거기까지 말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껌벅거리며 옆테이블에서 빈그릇을 치우고 있는 꽁지머리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우리 계산서 가져오고, 이집 사장님 면회좀 합시다.
꽁지머리는 명우의 서슬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정 큰 소리로 -네, 알겠습니다, 하며 허리를 깊숙히 꺽었다. 꽁지머리가 사라지자 명우는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술이 배어 벌건 눈으로 정환을 노려본다. 넌 그냥 보고나 있어, 하는 눈이었다.
계산서를 들고 온 꽁지머리 뒤에 왜소한 체수의 곱상한 사내가 새우 눈을 찢으며 붙어 서 있다. 가끔 돌아보면 언제나처럼 카운터에 붙박이로 앉아 있던 40초반의 사내다. 들고 나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거나 술값을 셈해주는 외에는 그저 벽에 걸린 TV 화면이나 바라보던 사람이다. 으레 사장은 아니려니 했었다. 업소 광고지에까지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우람하고 호방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황가네’의 그 ‘황가’에 어울리려면 장비처럼 배불뚝이 두주불사형의 거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명우도 그의 생각과 같았던지 술마시는 동안 두어 차래나 -정의의 싸나이는 부재중 인가 보다, 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곱상한 사내가 이 황가네의 사장이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이라고 합니다. 저희 업소가 개업 한 지 얼마되질 않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혹 저희들에게 무슨 실수가 있었더라도 널리 양해 해 주십시요, 차차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꽁지머리가 뭐라고 귀띰을 했는지 곱상한 황가는 처음부터 꼬리를 착 내리며 그렇게 공손히 인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정환은 -아 예에, 하고 머리를 꺼떡 했지만 명우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잔뜩 전의를 불태우며 목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상대가 계집처럼 곱상한데다 행동까지 나긋나긋하게 나오니 대책이 안서는 모양이었다. 명우는 한참이나 눈을 껌벅 거렸다. 그러다 아무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는 듯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개선 해 나가시겠다면, 이 소주집 안에 나이트클럽이라도 오픈 하실 건가요?
주인을 면박한 명우는 술값을 던지듯 내려놓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 선다. 정환이 슬쩍 올려다 보니, 명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곱상한 주인남자의 안존한 자세는 시종 일관이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가 아니면 -너는 짖어라 나는 잔다, 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주인 남자는 꽁지머리도 하지 않는 인사를 위해 문밖까지 따라나와 등이 보이도록 허리를 꺽었다.
잠시 후, 택시를 기다리던 정환이 소변을 보기위해 다시 황가네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꽁지머리를 앞에 세운 주인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 그렇게 해서 쫒아버리는 게 장땡이야, 영업 장소가 시끄러워 지면 손해 보는 게 누구겠어? 바보같이 코앞에 받쳐준 여자들을 놓치곤 그 분풀이를 나에게 하다니, 정의감은 고사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인간들이야, 쳇, 더러워서.

                                                               이용우 / 소설가



[그동안 처먹고 피우고, 또 기절할 사실이 계산서에 / 그 아줌마들 만나고 싶으시면요 엘에이 있는 몽쉘통통에 가보세요. 꽁지머리 웨이터가 선심이라도 쓰듯 그렇게 말했다. 몽쉘통통은 또 뭐야? 정환과 명우가 동시에 말하며 머리를 들자 꽁지머리가 답답 하다는 듯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이트도 몰라요? 엘에이 사신다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