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호의 - 이성열

2006.01.15 02:12

미문이 조회 수:805 추천:67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소일하나?
그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 습관처럼 이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아내 쪽을 만져 보았다.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내는 벌써 일어나 밖으로 조깅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자 이제 그녀는 매일같이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에 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내와 같이 하던 사업을 팔아치우고 인생을 이렇게 무료하게 보내야 하는 말년으로 접어들다니......
그에겐 앞으로 더 이상 뭐 해 볼 계획도 없으니, 말하자면 이렇다 해 놓은 것 없이 은퇴를 한 셈이었다. 해 놓은 건 없어도 그간 참 바쁘게 지낸 이민생활-.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처음 미국 와서 요즘처럼 무료하게 보냈던 일들을 생각했다. 그 때도 어디 친구가 있나, 말이 통해서 일을 할 수 있나, 아니면 지도를 알아서 어디 도망이라도 갈 수가 있나 정말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사실 미국에 오기 불과 1년 전 까지만 해도 이민이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럭저럭 그와 같은 운동권 학생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그런데 10월 유신이 터진 것이었다. 그리곤 그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기관에선 노골적으로 그를 불러다 놓고, 너 이민 갈래, 죽을래?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이민 가지 않을 경우 기관원을 시켜 미국에 있는 그의 약혼자를 납치해 강간해서 자기들 여자로 만들겠다고 까지 협박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먹게 되었다. 이민이 뭐 다른 놈들 생각하듯 조국에 대한 변절은 아니라는 것과, 언제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참에 미국 가서 박사학위라도 하나 얻어 보자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소문이 나자 어떤 놈은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또 다른 놈들은 냉담했다. 그러나 우선 좋아 라고 날뛴 건 그의 약혼자 명숙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었다. 미국에 와서 날 건달이 되기 전까지의 일.
  그 때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아내는 벌써 일하러 나갔고 그 혼자 아파트에 남았었다. 그녀는 어디 병원에서 리셉션니스트로 일하고 있다는데, 그는 그녀가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때도 아침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파트 앞길로 차량들이 질주하는 소음이 그를 더 침대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2차선인 아파트 앞길은 약간 하행으로 휘어 있어서 차량이 속도를 내면 조종이 원만치 않아 대단히 위험하였다. 차들이 하루건너 충돌하고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허나 그런 소란 법석이 지나고 나면 다시 운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피드를 내고 경주를 하듯 달려 지나갔다.
처음엔 그 광경만 구경하는 것도 심심치 않았다. 당시는 면허증이 없어 운전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남의 일로만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명숙은 단 번에 붙고 말았다는 운전면허 시험도 그는 세 번씩이나 가도 합격시켜 주지 않았다. 경관 옆에서 하는 시험 운전에 당황한 나머지 뭘 하고 왔는지 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손자병법의 말처럼 나도 알고 적도 알아야 이긴다는데, 그는 그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고, 시험관이 왜 그를 떨어 쳤는지도 몰랐다. 더 연습을 하고 또 다시 가서 시험을 봐야 하는데, 뭘 더 연습해야 합격을 할지도 몰랐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경관이 하는 말을 거의 못 알아들었으니, 이건 원 죽인다는 건지, 살린다는 건지......
할 말은 그런 대로 궁리해서 해 보겠는데 상대 쪽에서 하는 말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마치 속사포를 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알아듣고 바로 대항하지 못하면 마치 그 총탄에 얻어맞은 것처럼 하반신이 후들거렸다. 몇 년 먼저 이곳에 도착한 아내 명숙의 말에 의하면 2년은 지나야 귀가 뚫린다고 하였다.
그는 그 때 허구한 날 미국 티브이를 틀고 이들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몇 마디씩 들리는 듯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못 알아듣는 것도 버릇이 되었다. 티브이 영화나 연속 물은 말을 못 알아들어도 대충 이해가 갔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쳐 하는 말은 그 첫 가닥 잡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치르던 영어 독해력 시험을 생각했다. 시험은 언제나 첫 문제가 어려웠다. 수험생들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그는 의례 첫 문제를 넘기고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시간이 남으면 다시 첫 문제를 공략했다. 그래서였는지 언제든 그의 영어 점수는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실제 대화에선 첫마디가 넘겨 버릴 수 없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 첫마디를 알아듣고 해득할 수가 없다니-, 젠장 그 실력을 가지고 어떻게 대학을 입학해서 나머지 학업을 마치고 또 대학원에 가서 박사학위를 딴담.
하긴 그 때 그의 아내 명숙은 내심 그가 학교 간다는 걸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우선은 직장을 구하고, 그렇게 돈도 벌고 말이 늘은 다음 가도 늦지 않다는 거였다. 하긴 그녀 혼자 벌어봐야 아파트 세 내고 두 식구 먹고살기도 바빴다.
한 번은 그녀가 신문 구직 난을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전화를 들고, "두 유 스틸 해브 쟙 오프닝?" 어쩌고 하더니, 그더러 갈 데가 있다고 손을 잡아끌었다.
할 수 없이 그도 아내가 모는 미제 구형 승용차 옆에 앉아 따라 갔다.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약과 잡화를 파는 매장이 제법 큰 가게 앞에다 차를 세웠다. 그 가게에서 점원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가게는 약국으로 불리는 모양인데 말이 약국이지 잡화가 더 많으니 잡화상이나 진배없었다. 명숙이 안으로 들어가 "매니저 좀 만나려 하는데요..." 하며 서툰 영어로, 그녀도 이곳에 온지 3년뿐이 안되었으므로 말이 어눌하긴 마찬가지였다, 몇 마디하자 약 조제실이 있는 사무실에서 인상이 깨끗한 중년의 백인 하나가 나타났다.
명숙이 그를 소개시켜 거창하게 악수를 나누고, 몇 마디 질문이 있었고, 대답은 주로 명숙이 맡아 했다. 질문은 대강, "너 얼마동안을 이 나라에서 살았느냐?, 나이가 몇인가? 여기 오기 전 어디서 일해 봤느냐?" 등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집에 가서 기다리면 꼭 연락 해주겠다고 까지 해서 그들은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명숙은 얼마동안 그 전화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 전화는커녕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알고 보니, 생각해 보고 연락해 준다는 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고, 이들이 불합격을 그렇게 하기 좋은 말로 얼버무린다는 사실을 이곳에 오래 산 선배로부터 듣고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도착한 미국 남부 애틀랜타 외곽의 여름은 매우 풍요로웠다. 앞의 바쁜 차도를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넘어 걸으면 곧 과수원과도 같은 개인 정원들이 나오는데 그곳 나무들엔 복숭아 자두 등 여름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과일 무르익는 냄새를 맡으며 숲 속을 잠시 걷다보면 그림 같은 집들이 하나 둘 서 있다. 이렇게 과일 나무 아래를 걸어 다녀도 아무도 시비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주인인 듯한 노부부가 나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며, 필요하면 과일을 따서 가져가도 좋다고 까지 친절을 베푼다.
하루오후는 보던 티브이도 진력이 나고 해서 그는 청바지를 꿰어 입고 과수원에 나가 산책을 하려는데, 웬 키가 장대같이 크고 얼굴이 태양에 익어선 지 아니면 대낮부터 한 잔 걸친 탓인지 시뻘건 사내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래층에 살고 있는 레이였다. 아래 위 층에 살고 있으므로 지나가다 만나면 "하이!" 정도는 하고 지내는데, 언젠가는 아내 명숙에게 그가 티브이를 너무 크게 틀어 낮잠을 잘 수가 없다고 불평을 하더라는 작자였다.
레이가 그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얼굴만 봐도 그의 인생이 얼마나 험악하게 영위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앞니까지 두 개나 빠져 도대체 이 자에 대한 호감이 가질 않았다. 그런 레이가 뜻밖에 와서 장황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요즘엔 티브이도 크게 틀지 않고 조심해서 보고 있는데, 레이가 무슨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한담. 그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무지 열심히 뱉어내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불평인지, 죽인다는 말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레이는 지독한 남부 사투리를 쓰는 데다, 앞니까지 빠져 발음이 형편없이 미끄러지고 새어 나오고 있다고 아내도 흉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어떻게 좀 단서를 잡아 보려고 열심히 듣다못해 그에게 사정을 했다.
"플리스, 플리스! 당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해 줄 수 없겠소?"
레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다시 천천히 말을 했으나 이해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빨라진 말로 연실 씨부렁대고 있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반복은 했으나 그는 결국 레이의 말하는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자포자기해서 간신히 단어 몇 개를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나는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소! 내 와이프가 곧 돌아오니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레이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아파트로 사라졌다.
얼마 후 그의 아내가 일에서 돌아 와 그에게 말했다.
"아래층에 사는 레이가 자기더러 트럭 조수 노릇을 하지 않겠냐고 묻던데? 요기 아래서 내가 오는 걸 기다렸다가 그렇게 말하더라구. 매일 그렇게 티브이만 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대요. 자기가 모는 트럭을 따라 다니면 영어도 가르쳐주고, 또 돈도 벌게 해 주겠다는 군. 보다보다 딱해서 도와주고 싶다는데 뭘 못 알아듣고 그래요!"
아내 명숙의 말을 듣고 그는 울화통으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머리통을 쳐 박고 싶었다. 레이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의 그 고마워하는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획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기껏......트럭 조수라니......싱거운 녀석......
(한국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