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타인 / 백남규

2009.10.2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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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 우아한 갈색머리칼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머리를 흔들며 사뿐 사뿐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보자, 윤수는 숨이 컥 막혔다. 버몬 8가에서 아침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그 여자를 보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경쾌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자, 다급한 일이 생긴 것처럼 가까운 주차장을 찿아서 차를 세우고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까닭없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끌리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감정에 빠져든다. 윤수는 옛날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대학교 다닐 때였다. 이유없이 외롭고 괴롭고 막막하던 시절이었다. 적성과는 맞지 않는 학과에 들어간 윤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때. 신촌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청량리를 지나가는 차창 밖에 명멸하는 네온사인을 쳐다보며 그는 황홀감에 젖곤 했었다. 휙휙 지나치는 거리가 아름다운 꿈속의 나라같이 보였다. 꿈속에서 윤수는 막연히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구원의 여자.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이에 맞게 윤수는 어떤 여자와의 사랑을 꿈꾸었다. 이쁘고 상냥한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한 자기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거라는, 황당한 생각을 골똘히 했었다. 그래서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수업을 마치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든가 당구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에겐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이다. 구원의 여자가 그리웠다. 자기?사랑하는 여자가 운명적으로 자기를 향해 다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익어서 떨어지듯이. 첫눈에 반해서 자기를 향해 손을 내밀 것이라고, 그러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그는 일어나 씩씩하게 세상을 향하여 걸어나갈 것이라고. 그러나 젊은 시절을 다 보내는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접근하는 일이란 흔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 날 지도 모른다. 지금은 21세기 자본주의가 극성을 떨고 있는 시대이다. 돈 많고 잘 생긴 남자를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같다. 아니 남자가 잘 생기지는 못해도 돈만 많다면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친구나 직장동료들이 가끔 소개해 주는 여자를 만났을 때, 상대 여자가 처음에는 심드렁한 눈빛이었다가 “서울에 아버지가 물려 준 빌딩이 하나 있지요.” 라고 말하면 상대여자의 눈빛이 문득 생기를 띄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랜서 기자이다. 이따금 소설이나 영화평을 쓴다. 아는 선배의 소개로 본국 일간지의 미주판 신문에 가끔 기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다. 돈이라면 이재에 밝은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안다. 윤수는 젊은 시절이나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나 사랑의 신화를 믿고 있다.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졸린 표정으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것 같은 얼굴로 살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여자를 안 만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항상 한 발짝 슬쩍 비켜서서 사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없었다. 그래서 몇 해전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집에서는 한결같이 장가가라, 참한 여자 있다고 성화였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하기는 싫었다. 돈보고 시집오는 여자라면 질색을 했다. 뭐 영화배우나 공주같은 여자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첫 눈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여자면 족했다. 지난해에 미국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이트 클럽에서 한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듯이 말이다.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게하는 여자, 지위나 재산, 종교와 윤리를 깨끗이 잊게하는 여자. 전적으로 그 여자에게 빨려들어 순수한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게 되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가슴을 두둘기는 사나운 북소리에 떠밀려 마구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혼을 쑥 빼놓고 바라보게 되는 여자는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큰 키에 버쩍 마른 체구를 가진 윤수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꺼칠하고 활기 없는 그에게 여자다운 여자가 다가올 리 없건만 그는 여자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여자만이 그를 채워줄 수 있다. 일어나 걷게 할 수 있는 여자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윌셔쪽으로 달리듯이 걸어가면서 여자를 찿았다. 여자는 막 건널목을 건너려는 참이었다. 여자는 얼굴이 갸름하고 창백했다. 키는 작지만 꼭 끼는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맵시있게 입고 있었다. 사뿐 사뿐 걷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띈다. 팽팽한 둔부를 보자 윤수의 내부에서 스멀스멀 눈 뜨기 시작하는 욕망은 어느덧 주체할 수 없이 저절로 자라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는 뒤돌아보며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러시죠?” 쌀쌀한 어조로 말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아, 예 ” 이런 경우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알 수 없는 윤수는 그저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열적은 표정이 되어 어정쩡한 태도로 그녀의 뒤를 비실비실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이상한 놈 다 봤다는 표정을 짓고 홱 돌아서 걸어간다. 뭐가 그리 바쁜지 찬바람을 내면서 빨리 걸어갔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쫓아가서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바쁘시더라도 잠깐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무슨 이야기요?” “아무 얘기든지 좋아요.” “아, 그만 이 손 좀 치우세요.“ 뒤돌아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성의 없이 말했다. “지금은 바쁘니 전번 주세요.” “전번요?” “전화번호요.” 윤수는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맥주를 마셨다. 조금 전에 헤어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데체 무얼하고 있는 여자일까? 결혼은 했을까? 고향은 어디일까? 수많은 의문이 구름처럼 머리에 오락가락했다. <중략> 남편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늘 허둥대었다. 성격이 꼼꼼하지 않아서 늘 서류가방을 두고 나간 뒤 헐레벌떡 다시 돌아오기를 밥먹듯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남편과 결혼한 것은 미국의 유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굴지의 로펌에 입사해서 경력을 쌓은 후 지금은 엘 에이에서 개업한 변호사라는 데 마음이 끌린 건 아니었다. 남편은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서울에서 대학 졸업후 유학와서 전공을 법학으로 바꾸고 앞 뒤 돌아 볼 사이 없이 집과 도서관, 학교를 맴돌다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저 남들처럼 애 낳고 키우고 살만한 사람이라 여겨졌었다. 뉴욕의 로펌을 그만 두고 엘에이로 옮긴지 얼마 안 되어 정보도 좀 얻어야되고 친해 두어야할 사람도 있고. 그래서 술도 좀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를 제 때에 안 주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려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조금만 이해해 달라고 남편은 말했다. 돈이라니? 그게 핑계가 안되는 건 그도 안다. 돈이라면 시아버지께서 걱정을 도맡아 하신다. 아들에게 그런 걱정을 시키실 분이 아니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행콕파크라는 동네의 조용한 집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찿아오지 않는 집에서 청명한 햇살을 받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끔 미풍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뜨락을 내다보면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기도 한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소리지만 그 평화로운 새소리를 들을 때 견딜 수 없는 권태감이 여자에게 찿아들곤한다. ‘이런게 사는건가?’ 마치 조용한 연못의 고인 물처럼 시나브로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불쑥 불쑥 들었다. 서른 두해, 사는 것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특별히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즈음 그녀는 괴로웠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깨끗이 정돈이 잘 된 뜰에서서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느닷없이 사는게 참 재미없다는 생각이 가슴에 꼳혔다. 어쩌다가 쉬는 날 남편은 하루종일 TV만 쳐다봤다. 주로 스포츠 중계를 즐겼다. 대형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땀이 번들거린다. 부릅뜬 두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다. 관중석의 고함 못지 않게 남편도 소리치고 발을 구른다. “ 나 어디 아픈거 같아.” “응, 그래...어디가 아픈데.” 남편은 건성으로 민숙을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우리는 사이좋은 이웃같기는 하다. 만나면 반갑지만 헤어져도 아쉽지는 않는 관계이다.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남편의 질문이 있다. “마음에 드세요?” “뭐가요?” “내가 마음에 드시냐구요?” 민숙은 뭐라고 대답해야할 지 몰랐다. 왜냐하면 좋다든가 싫다든가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후 물론 그녀도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마켓에서 먹을 것도 산다. 다만 아무 흥미도 가지지 않은 채 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왔다 갔다 했을 뿐이다. 이 집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소리내어 울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만 생각일 뿐이었다. 윤수를 처음 만난 날, 남편이 서류를 두고 나가서 윌셔가에 있는 사무실에 가기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편외에 다른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 하고 싶다는 접근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연애가 하고 싶었다. 상대의 마음을 애태우고 싶었다. 결혼전 남편은 베낀 게 틀림없는 연애편지지만 일주일이 멀다하고 보냈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고 나니 밖으로만 돌려고 한다. 막상 마누라가 되고 나면 신선한 느낌이 사라지나보다. 남편이 회사로 떠나고 휭하니 비어버린 빈 집에서 혼자 남은 여자에게 텅 빈 시간이 펼쳐진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집 앞의 노란 꽃을 바라보며. 여자는 미풍속에서 뭔가 유혹하는 소리가 숨어 있는 듯 귀를 기울였다. 윤수를 불러낸 날, 남편은 급한 일이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전해왔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곧 장대비가 되어 물을 쏟아부었다. ‘올해는 유난히 엘 에이에 비가 많이 오는구나.’ 혼잣말을 하는 중에 뉴스에서 말리부쪽 산등성이가 무너져 사람들이 다치고 집이 무너졌다고 한다. 느닷없이 눅눅한 습기가 가득찬 집에 잠시도 있기가 싫어졌다. 평소에 입지 않던 몸에 달라붙는 야한 티셔츠를 입어 보았다. 잘익은 과일같은 젖가슴이 탐스럽게 솟아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겨드랑이에 진한 향수를 듬뿍 발랐다. 입술을 새빨갛게 칠했다. 차를 몰고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민숙이 깨닫지 못했겠지만 인간은 옛날부터 진탕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으로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남미의 카니발 같은 것이 그런 의식이다. 카니발에 참가한 사람들은 잠시 동안 광희상태에 빠져 외부와의 단절을 잊고 황홀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이 발달해서인지 후퇴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집단적인 의식이 현대로 올수록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집단적인 카니발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어 외로운 개인이 혼자서 홀짝 홀짝 마시다가 알콜 중독이 되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취약한 점이다. 민숙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용기가 생겼다. 핸드백에서 윤수의 명함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붉은 등불아래 하얀 얼굴, 까만 눈썹, 입술이 빨간 민숙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탠드바식으로 된 긴 탁자가 있는 술집이었다. 윤수는 가까이 다가가 옆에 앉았다. 여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진한 향수냄새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슬몃 그의 관능이 살아나는 듯 머리카락이 쭈볏해졌다. 여자의 주량은 센 듯했다. 남자체면상 그녀에게 질세라 평소의 주량을 초과해 마구 마셨다. 막걸리에 취해서 내다보는 풍경은 어디나 고향같다. 희미한 등불 아래 그녀의 풍성한 외투속에 얼굴을 묻으니 고향냄새가 났다. 외투속으로 윤수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뭔가에 푹 빠져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근처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정이 지나자 썰물처럼 손님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붉은 조명아래 흐느적거리며 그녀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적으로 셔츠를 가슴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탐스런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 되었다. 예기치 않던 장면에 윤수는 입이 벌어졌다. 아름답다는 경탄이 저절로 나왔다.자리로 돌아온 민숙은 윤수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다. 윤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이 굳어져왔다.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 그는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다. 여자가 평생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섹스할 수 있는가.지겹지 않는가... 어쩌고 저쩌고 횡설수설을 시작하는 순간 그는 골아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아침결에 간신히 눈을 떠 정신을 차려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생각되었다. 처음 부분은 조금 생각이 나는데,나중 부분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내 집까지 오게 됐는지. 뭐라고 큰 소리로 싸운 것 같기도하고. 민숙이 몸위에 올라타서 여자가 그럴 수 있느냐며, 심하게 몸을 흔들었던 것도 같다.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탁자위에 못 보던 종이가 한 장 놓여있다. 민숙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윤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온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성욕에 바탕을 둔 미적 경탄인지, 감상적 숭배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치기어린 감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곧 지나갈 한 때의 동경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져오며,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그리움의 현이 울컥 울려져 나와 코 끝을 싸하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뜨거운 감정을 전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같았다. 금지의 팻말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서 그녀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파도가 닥쳐올지라도 폭풍우를 헤치고서 그녀에게 헤엄쳐가리라고 다짐했다. 돌발적인 사태에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참으로 매력적인 여자이다. 귀여운 여자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예의 차리기같은 것이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대하고 싶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뜻 본 그녀의 아름다운 유방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다고 그녀로 향하는 그의 마음이 욕정으로만 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감탄한 것은 사실이다. 걷는 모습,말하는 모습, 먼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 귀에서 쟁쟁한 그녀의 나즈막한 목소리,부드러운 살결이 꿈결인 듯 그리웠다. 연일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울적한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산타모니카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허연 파도가 달려와 부서지며 굉음을 내며 스러진다. 파도의 선들이 울퉁불퉁 누가 마음대로 그려놓은 오선지같이 헝클어진 채 달려온다. 굵직한 빗줄기가 차창을 통하여 차 안으로 세차게 몰아친다. 해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포효하는 파도소리, 하얀 포말이 스러지는 모래밭, 점점이 흩어져 나르는 물새들....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닥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 혼잣말로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을 외워보았다. 오랫동안 파도를 바라보다가 무엇을 결심한 듯이 단호하게 발길을 돌렸다.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고’의 가락이 차안을 가득메우고 어두운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북돋아주는 곡조이다. 여자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차를 행콕파크로 돌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녀는 윤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자연스럽게 대문을 넘어섰다. 지루한 일상의 걸음걸이가 어떤 경계를 넘으면 황홀한 무용으로 변하듯이 두 사람의 발걸음은 나를듯이 경쾌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