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달력-안경라
2007.01.19 09:15
마지막 한 개 남은 깍두기를 집어든다
밥상 위 늘 올려지던 그릇에
깍두기 스물 여덟개 혹은 설흔
설흔 하나 아슬하게 찰랑이던 세월
정교히 썰어진 마지막 살점 하나가
저무는 하늘 노을처럼 붉게 푹 익어서
익숙해진 입속으로 이동하고 있다
깍두기 속에서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누이의 한쪽 가슴이 사라지고
어머니는 칠순이 되시고
보글보글 익던 깍두기 속에서 여름이 가고 낙엽이 지고
잎 떨군 나무처럼 소식 까칠했던 그대
그리움 한 계절의 무게로
물컹물컹 시큼하여 눈물나고
어느새 눈물들이 깨져 눈발로 흩날리는 시간
살찐 무 열 댓개를 샀다
하나로 응축된 단단한 세월을
깍뚝 깍뚝 썬다
흠없이 하얗게 분리되는 심심한 살들
어머니가 지난해와 같은 양념으로
버무려 꾹꾹 눌러담글 무렵
반쪽남은 깍두기 들고 뉴욕 전화를 받는다
눈 멀어가는 한 사람의 글 공부 이제 막 끝냈다는 곽 시인님
시인의 목소리가 안개로 채워진다
고막이 뿌옇게 길을 잃고 있을 때
한 입에 꽉 깨물릴 남은 시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새 상에 올려질 365개의 깍두기
살을 파고드는 소금 켜켜이 섞어
그 가슴가슴에 때마다 싹 틔울 갖가지 씨들
다시 글 박힐 것이다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까지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 탁상달력-안경라 | 미문이 | 2007.01.19 | 216 |
445 | 소냐를 생각하면서-고대진 | 미문이 | 2007.01.22 | 308 |
444 | 생가 - 강성재 | 미문이 | 2007.01.29 | 254 |
443 | 목타는 도시-전지은 | 미문이 | 2007.02.08 | 255 |
442 | 나이테의 소리가 들리나요-유봉희 | 미문이 | 2007.02.19 | 209 |
441 | 안경- 정문선 | 미문이 | 2007.02.28 | 222 |
440 | 프리지어 간호사-윤금숙 | 미문이 | 2007.03.07 | 374 |
439 | 엄마의 골무-강학희 | 미문이 | 2007.03.19 | 222 |
438 | 걷는 꽃-석정희 | 미문이 | 2007.03.30 | 250 |
437 | 정(情)-정용진 | 미문이 | 2007.04.09 | 146 |
436 | 홍어-한길수 | 미문이 | 2007.04.17 | 255 |
435 | 사랑의 샘 제 10장 - 전상미 | 미문이 | 2007.04.24 | 281 |
434 | 존재의 숨박꼭질-홍인숙 | 미문이 | 2007.05.13 | 204 |
433 | 사랑의 바이러스-박경숙 | 미문이 | 2007.06.07 | 266 |
432 | 클릭-윤석훈 | 미문이 | 2007.06.29 | 199 |
431 | 표고목-이기윤 | 미문이 | 2007.07.10 | 197 |
430 | 내사랑 진희-이상옥 | 미문이 | 2007.07.20 | 356 |
429 | 당당한 새-이성열 | 미문이 | 2007.07.31 | 202 |
428 | 꽃밭에서-이윤홍 | 미문이 | 2007.08.20 | 158 |
427 | 떠 있지 못하는 섬-임영록 | 미문이 | 2007.08.28 | 6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