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라토 / 임영록

2009.04.07 10:54

미문이 조회 수:65 추천:2

나는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숨죽였고 움직이지 않았다. 허름한 커피숍 화장실 벽에 붙어있던 이름 모를 사막의 낡은 사진처럼 그렇게 고정되어 있었다. 피닉스 256마일. 가끔씩 지나는 표지판이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니, 그들이 나를 스쳐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여섯 시간을 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연적戀敵 콜린 시크먼을 납치하려 이를 악물고 반나절 넘게 차를 몰던, 우주비행사 리사 노워크의 증오에 정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중력과 무중력 사이를 운전해야 하는 깊은 자괴감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녀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중력을 놓아버려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렸으니까. 차는 계속 어디론가 달린다. 멈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멈추었을 때의 두려움을 가늠해본다. 그들이었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내 인생을 그렇게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은. 사막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해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주위의 윤곽도 흐려졌다. 높지 않은 산과 들녘을 내다보는 언덕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숲 사이로 듬성듬성 집들도 보였다. 사람들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르는 이 시각을, 오히려 박완서는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시간이라 했었지. 그러고 보니, 마치 고향으로 가는 정겨운 길처럼 문득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가본 적이 있었다. 버려진 땅처럼 그곳은 개발의 손마저 미치지 않았다. 마을 어귀 신작로는 질척거렸고 길옆의 무성하던 아카시아 나무들은 온데 간 데 없었다. 마을 앞 군부대 옆으로 삼 층짜리 군인아파트 몇 동이 교만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련한 도막난 기억들이 산과 들을 보며 띄엄띄엄 되살아났다. 하늘을 찌르던 마을 뒷산은 늙어서 등을 구부리고 땅에 바짝 엎드려 있었고, 오금이 저릴 만큼 시퍼렇게 깊던 개울은 무릎에서 찰랑거렸다. 낯익은 사람을 한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마치 드라마 한편을 찍기 위해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과 버려진 세트장 같았다. -우리들의 배역은 이제 끝난 거야.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을까. 나는 운전을, 아내는 옆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아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같이 오래 살아보면 안다. 말하지 않아도 양어깨로 전달되는 무겁고 착잡한 공기와, 음성의 높고 낮음과 엷고 굵음의 그 깊은 차이를. 아내는 이 말을 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내 했을까. 난 ‘역할’과 ‘배역’의 유사함과 차이를 잠시 생각했다.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수동과 피동의 차이와, 아내와 나의 처지의 연관을 대입해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아니, 피식거리며 웃음이 새어나왔을 것이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아내의 눈은 동공이 터질듯 팽창해 있었다. 아내는 무슨 말을 다시 하려다가 입술 한쪽을 실룩거렸다. 조소였다. 증오의 눈빛이 시간 따라 그림이 바뀌는 거리의 광고판처럼 체념과 조롱으로 금방 바뀌어 졌다. -차. 세워줘요. 처음보다 더욱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그것을 설명해야 하는, 그 구질구질함과 소름 돋는 단호함의 괴리가 은근히 부아로 끓어올랐다. 길옆 가로수를 차로 받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빠르게 지나치는 차들처럼 스쳐지나갔다. 액셀을 더 밟았고 운전대를 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화가 나면 입을 닫아 버리며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아내에게, 그날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듯 핸드백을 움켜쥐고 있었고 문가로 바짝 다가가 있었다. 같은 자리에 앉아도 말굽자석의 남과 북극처럼 가운데를 비워놓고 떨어져 앉아 있는 모습, 그것이 우리의 현주소였다. -이제 더 이상 지긋지긋한 이사는 없을 거야. 김포공항에서 시애틀 행 비행기를 타면서 엄마가 한말이었다. 아버지로 인해 우리가족은 셀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싸야 했다. 군인 가족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타협을 모르는 아버지의 성격과 홀로 객지에 머물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만든 산물이었다. 80년대 신군부의 집권으로 반대편에 섰던 군인들은 줄줄이 옷을 벗었다. 아버지는 군복을 벗었고 형은 중학교 일학년 교복을 벗게 되었다. 난 초등학교 삼학년이었다. 친구가 생길만 하면 떠나야 했던 나는, 이미 이별에 익숙해 있었다. 가슴에 담아두기 보다 머리로 생각했고 남겨지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간편하다 여겼다. 패장은 유배를 가게 마련이라는 아버지의 어려운 말을, 엄마는 형과 나의 교육을 위해 남은 생을 거는 것이라 알기 쉽게 일러주었다. -우린 카스트라토가 되는 셈이지. 형의 냉소와, 뜻은 모르지만 ‘카스트라토’라는 어감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슬픔과 기쁨, 비애와 설렘 사이의 어설픈 느낌으로 혼란한 나에게, 형의 일갈은 ‘돌격 앞으로’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륙하는 비행기 창밖으로 내리는 여우비를 바라보면서 금장식이 달린 긴 칼과 갈기가 긴 흑마, 붉은 전포의 흑기사를 상상하고 있었다. 말없이 멀어지는 희미한 불빛처럼 그렇게 난 또, 어설픈 이별을 하고 있었다. 여성의 고음을 간직하기 위해 변성기 전에 거세를 했다는, 형의 카스트라토와 나만의 카스트라토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AOK-all systems ok. 우주비행사들이 쓰는 말이다. 모든 시스템이 이중삼중의 보완 구조로 인류가 만들어낸 계기 중 완벽에 가장 근접하다는, 우주선. 그들은 우주선의 탑승으로 비로소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한 치의 착오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수년 동안 수백 번의 반복적인 트레이닝을 받는다. 우주비행사 리사 노워크는 말 할지 모른다. 그 끊임없는 완벽함의 추구가 공허의 감성을 무참히 흔들었다고.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고. 아내와 나, 집안 모두가 AOK이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매일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출근을 했다. 아내는 콜롬비아산 바닐라향의 커피를 끓여 작은 보온병에 담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닐라 향은 AOK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딸 제니퍼를 깨워 학교에 보내고 집안 청소와 자신의 일을 시작하곤 했다. 난 회사의 카페테리아에서 아침과 점심을 먹었다. 나가서 먹으려면 절차가 복잡했고 귀찮았다. 회사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위장된 군사 기지이었다. 은퇴 군인들의 주택 단지처럼 높은 담이 둘러져 있고 입구는 장전된 권총을 찬 두 명의 경비원이 지켰다. 타운하우스 같은 여러 동의 건물에 적지 않은 인원이 일했다. 서로가 하는 일을 서로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십 수 년 전에 이 회사에 들어오면서 서약한 첫째 조항이었다. 내가 하는 일을 왜 위장된 기지에서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성질의 일이 아닌데. 어렴풋이 내린 결론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위장시켜 준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위장의 이중 장치 같은 셈이었다. 난 컴퓨터 앞에 앉아 설계도를 하루 종일 그렸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미군 기지를 위한 것이었다. 때로는 군용 아파트와 도로, 그와 관련된 지하 설비나 벙커에 이르기 까지, 나의 마우스는 몇 백 야드의 지하와 지상을 오를락 거렸다. 설계도는 네트워크로 상급 관서로 보내졌다. 하지만 곧장 쓰레기 통으로 가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산을 배정 받지 못하거나, 군사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계획이 변경 또는 보류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처음엔 너무 약이 올랐었다. 점 하나, 선 하나에 아린 눈을 모니터에 바짝 들이대던 내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버려질 것을 그리라는 거지? -예산 청구서에 들어가야 하니까. 노랑머리의 동료가 엄청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 있어? 월급 받는데 지장 없잖아. 그가 다시 내뱉었다. 내가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의자를 돌려 자신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노란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가 왜 이따위 선을 하나 그려 넣는데 복잡한 수치 계산이나 무게 따위를 재야하는지. 당연히 일에 대한 열정과 성의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시간을 맞추고자 서둘러 대충 보내면 어떻게 알았는지 상급부서의 담당으로 부터 난리가 났다. 코드 I-4를 벙커 외벽 설계에 아직까지 적용하는 미친놈이 있다니. 아니 이따위 비효율적인 설계로 어떻게 예산을 절감하나. 오 마이 갓. 공기 배출구가 이렇게 대가리를 내밀고 적의 전투기에게 위치라도 알려 주자는 거야? 그것도 앵커 볼트 공법으로? 너 적군이야 아군이야. 내일 퇴근시각 전까지 수정하여 다시 보낼 것. 먼저 퇴근을 하던 노랑머리가 말했다. -이봐, 천천히 하라구. 급할 것 없어. 어차피 우리들은 잉여 인간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프로젝트를 대비한 잉여 자원인 셈이지. 소리치는 보스도 마찬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책을 덜어주는 일을 하는 것 뿐 이라구. 그렇게 가끔 늦게 퇴근을 하면 아내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맞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네 시 반이면 정확하게 퇴근을 하는 사람이. 하지만 그런 일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내는 늦은 이유를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당연히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의 행동반경이 아내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를 받아보면 이 설계도가 예산을 위한 것인지, 진정 건축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이 내게 생겨난 것처럼,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나, 집안 모두가 AOK이었다. 그 일이 있기 까지는. 나는 언제나 아침 여섯 시면 집을 나섰다. 운전을 하면서 바닐라향의 커피를 마셨다. 10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CNN라디오 뉴스를 듣거나 가끔 한국방송을 들었다. 같은 뉴스라도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CNN의 앵커는 심각한 뉴스도 농담을 섞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한국방송의 앵커는 재미있는 뉴스도 심각하게 말했다. 오히려 설렁탕집을 비롯하여 자장면, 사진관, 꽃집, 노래방, 마켓 등의 어설프고 어색한 광고가 들을수록 재미있었다. CNN은 잘 닦인 아스팔트 길 이라면 한국방송은 뽀얗게 먼지가 이는, 고향의 신작로 같았다. 처음의 미국 생활은 치열한 복잡함과의 연속적인 만남이었다. 수많은 인종과 각양각색의 자동차가 쏟아내는 치열함, 끝없이 펼쳐진 넓은 땅덩어리와 곧게 뻗은 도로의 불안한 단순함,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의 영역의 모호함. 팽팽하고도 진땀나는 긴장감과 치열한 복잡함이 오히려 자신을 안으로만 가두어 버리며 소통을 막아서 일까. 수십 수백 갈래로 퍼져나가며 정신을 혼란케 하는 것들을 한 가닥으로 묶어 버리는, 급조된 자아의 허상을 문득 느낄 수 있었다. 그 낯선 촉각은 블랙홀처럼 공허와 고독을 불렀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눈이 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가슴을 오므리고 누웠고 주먹을 쥐어야 잠이 들었다. 그렇다고 불안의 실체를 딱히 형상화 할 수도 없었다. 막연한 불안감 앞에 내 자아는 치적치적 가랑비를 맞고 서 있을 뿐이었다. 형과 나는 그것과 싸우는 방법이 달랐다. 형은 될 수 있는 한 카스트라토가 되기 전의 자신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면, 나는 그 반대였다. 형은 한국 친구들만 사귀고 어울렸고, 나는 한국 사람들을 제외한 아이들을 친구로 삼았다. 아버지는 밤이면 타운하우스 베란다에 서서 달빛을 바라보았다. 대지의 불빛에 달빛이 사위어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는 달빛보다 그 빛에 숨겨진 추억을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엄마는 틈틈이 세탁소에서 파트타임을 했다. 아버지는 그 시간에 한국 신문을 앞뒤로 몇 번씩 꼼꼼히 읽었다. 몇 개월 만에 엄마는 세탁소의 사장이 되었고 아버지는 보조가 되었다. 엄마는 잔소리가 늘게 되었고 아버지는 담배가 늘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은 자주 부딪쳤다.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는 불안과 소외의 좌절을 서로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은 학교에 불려 다녀온 아버지가 형을 방에 가두고 우산대로 온몸을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형의 잦은 결석을 통보받은 아버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둔탁한 소리는 베란다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에게 까지 들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내 발등을 적시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문득 낯설음에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마는 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몸이 떨려 왔다.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걸어 나오는 아버지는 비 맞은 사람처럼 몰골이 홍연했다. 네가 가 봐라. 아버지는 말하진 않았지만 부릅뜬 눈 가로 맺힌 물기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방은 어두웠고 바닥엔 부서진 우산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지를 묶인 맹수의 몰아쉬는 숨소리처럼 거친 숨이 음습한 방을 울리고 있었다. 형의 웃옷은 찢어져 있었고 피멍이 든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피 냄새. 비린내였다. 형. 경찰에 신고할까?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형의 노려보는 흰 눈동자가 나를 슬며시 주저앉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꼭 다시 돌아 갈 거야. 형은 내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거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신의 조각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각오로 들렸다. 한국에서 형의 성적은 전교 상위권이었고 모범생이었다. 그만큼 형의 원망은 점점 깊어졌고 더 불량해져 갔다. 형은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만 모아서 ‘K 서클’을 만들고 회장이 되었다. 물론 그들은 학교와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형과 같은 부류의 학생들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없는 낮에는 그들이 집에 진을 쳤다. 아버지 대신 담배를 피워댔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흥이 나면 기타를 치면서 밥딜런의 노래를 불러댔다. -내가 발가벗겨져 꿇어 앉혀지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 열차 한 가득한 바보들이 자기장에 들러붙어 버린 거야. / 찢어진 깃발에 반짝이는 반지를 찬, 한 집시가 이렇게 말했어. / 얘야, 이건 더 이상 꿈이 아니고 현실이란다. 그들의 영어 발음이 투박하고 촌스럽게 느끼는 데는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어깨를 들어 올린다거나 과장된 손짓으로 미국사람처럼 행동했지만 그럴수록 내겐, 더욱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클래스에서 만나는 한국에서 금방 이민 온 아이들이 한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촌스런 존재였고 과거의 나의 촌스러움을 되살리는 존재였다. 당연히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없었다. 난 백인아이들과 어울렸고 그것이 진정한 카스트라토의 길이라 믿었다. 이름도 김정식이라는 촌티 나는 이름대신 제이슨 킴이라 바꿨다. 하지만 가끔 클래스에서 진땀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온 애들이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 선생님들은 내게 도움을 청했다. -제이슨, 네가 통역 좀 해주겠니. 아. 코리안 이었지.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급우들 사이로 나지막한 이방인의 언어를 토해내는 내가 싫었다. 아내와 나, 집안 모두가 AOK이었다. 그 일이 있기 까지는.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선을, 그리고 또 선을 그었다. 내가 일하는 방에는 도서실처럼 칸막이가 된 책상이 여섯 개가 있고 네 명의 인원이 일을 했다. 한명의 직원은 몇 개월 전에 해고를 당했다. 근무시간에 인터넷 게임을 몇 번 즐긴 것이 이유였다. 작업 중 일반 인터넷의 연결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해킹을 당할 염려가 있어 누누이 강조되는 보안사항이었다. 감찰반의 모니터링에 적발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가 인터넷 게임을 즐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후로, 칸막이와 빈 책상이 서로와 서로를 더욱더 완벽하게 격리시켜 주고 있었다. 물론 대화의 필요성은 원래부터 없었다. 보안시스템이 완벽하게 장치된 네트워크 이메일로 프로젝트를 받고 보내졌다. 단절과 완벽의 시스템이 나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서서히 죽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가끔 해고당한 직원이 나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입사하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숨처럼 멈추지 않았었다. 처음 몇 몇 년은 참았고 그다음 몇 년은 견뎠고, 또 그다음 몇 년은 바깥세상의 것들과 비교하느라 그렇게 지나갔다. 보상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던 셈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아내의 이메일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테러 대비 훈련으로 반나절이나 일찍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아내는 제니퍼를 픽업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고 대기화면에 아내와 나, 그리고 제니퍼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와 웃고 있었다. 몇 개월 전에 내가 올려놓은 것이었다. 마우스를 움직이자 아내가 보고 있던 이메일이 모니터에 떴다. -보낸 파일이 왜 안 열린다는 거야. 압축파일을 열려면 우선 알집을 다운로드 해서 시행해야해- 아내는 받은 파일을 열지 못했는지, 상대는 그것에 대한 시행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한 줄의 야릇한 내용이 눈에 띄었다.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압축파일과 알집은 발기된 나의 그것과 달콤한 너의 그것인 셈이지. 때마침 들어오는 아내의 차 소리에, 서둘러 방을 나왔다. 마치 나의 위장僞裝이 들켜버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내는 외가 쪽의 친지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아내는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다. 나는 막 대학을 졸업하고 이 회사에 취직이 확정된 직후였다. 한 달 동안의 여유가 내게 주어졌다. 카스트라토가 된지, 십사오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나가게 되었다. 사실 난,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동구라파 쪽을 여행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든든하게 자란 작은 아들을 친척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다.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아내가 내게 붙인 첫 마디였다. 나는 단지, 안녕 하세요 제이슨이라고 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삼학년 때 미국 건너가서 처음 귀국했다고 하니까, 버터 냄새라도 물씬 풍길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면 나의 발음이나 행동이 서툴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강남의 번화한 거리의 풍경과 아내와 내가 앉아 있는 카페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내 눈은 화려한 도시의 부조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통유리로 스토아 전면이 훤한 세븐 일레븐 스토아와 골목 옆으로 숨어 길가에 이것저것 내놓은 너저분한 식품점. 고급스런 맥도널드 스토아 옆에 호떡을 굽는 리어카. 대리석으로 벽면을 화려하게 치장을 한 패션회사 건물 앞을 지나는 허름한 차림의 등 굽은 노인. 그 간격이 야릇하게 서글픈 정감으로 되살아나며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거버먼트 일을 해요....... 음.......공무원? 무슨 일을 하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내말이 맞는지 아내에게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니까 아내와 나의 대화는 그런 작은 장애를 사이에 두고 이어졌다. 그런데 아내는 그런 사실 자체를 아주 즐기거나 맘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언가 자꾸 파내어도 재미있는 것이 많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서로가 갖음직했다. 나와 아내가 결혼을 결심한 것도 문화적 차이의 갭에서 만들어 내는 적당한 너그러움이 한 몫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아내를 맞아들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한국인 친구를 갖지 않았고 여자친구도 백인만을 고집했다. 한국음식 마저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동안 입에 대지 않았었다. 엄마도 나를 위한 식단을 따로 준비해주었고 식구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음식도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의 범주 안에 집어넣은 것은, 어쩌면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었다. 피부색깔을 바꾸고 코를 높일 수 없는 만큼 한국음식은 내게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나름대로의 의문을 내 자신이 풀어낼 수가 있었다. 아니, 회귀의 본능으로 제풀에 스러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갑자기 도수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형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미국회사의 성실한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금발의 미인을 애인으로 사귀었다. 그녀는 미국에 온지 일 년 조금 넘은 남미 이민가정의 출신이었다. 금발에 까무잡잡한 피부, 눈동자에서 깊은 바다 색깔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더듬거리는 영어는 야릇하게 내가 잊으려고 꾹꾹 눌러 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들춰내었다. 김치와 된장찌개의 맛과 고향의 개울과 뒷산의 추억, 그리고 잊힌 언어의 초라함과 아스라함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내가 그토록 명확하게 구분지어 놓고 싶었던 영역이, 그렇게 봄날에 얼음이 녹듯 나른해지고 모호해졌다. 나와 형은, 파리넬리와 리카르도 형제처럼 아망我望의 예정된 몰락을 지켜보게 된 셈이었다. 카스트라토의 깃발을 들고 형은 광야로, 나는 바다로 나선지 십여 년 만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곳은 광야가 끝나있던 바다 끝자락이었다. 형의 얼굴은 상처 투성이었지만 미소의 조각이 잔잔하게 남아있었고 나는 그 반대였다. 형은 그제야 넓은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난 그제야 외로운 바다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회귀의 본능으로 아내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퇴근 후, 집 근처의 인터넷 카페에 들렀다. 몇 개의 번호를 대입해보고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아내의 이메일 비밀번호는 은행 구좌의 비밀번호와 같았다. -안녕하세요, 김미숙님. 받은 편지함에 0개의 읽지 않은 메일이 있습니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잠시 주춤했다. 내가 장난 메일을 잘못 본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쓰지 않는 아주 오래된 메일 박스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몇 개의 숫자가 보였다면 덜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0개의 읽지 않은’이라는 문구는 무한대의 숫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불랙홀 같았다. 아내는 빠짐없이 메일 체크를 하고 있고 매일 상대와 채팅으로 소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의 박동이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의 검지에게 까지 전해졌다. 아내의 메일 박스는 말끔히 청소가 되어있었다. 몇 십 개의 스팸 메일 만이 눈에 띄었다. 이메일 휴지통도 깨끗했다. 내가 엿보았다는 것을 아내는 알았을까. 아니면, 외설적인 상대의 농담에 소통의 중단을 선언한 것일까. 마치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야릇한 풍습을 맞닥뜨린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한국의 부부는 서로간의 사생활의 영역이 어디까지 쯤 인지. 부부가 상대의 부정을 서로 감지했을 때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하는지. 배신감과 의혹, 분노와 안도의 미로를 헤매는 감정의 초라함에 더욱 깊은 자괴와 증오로 끓어올랐다. 가끔씩 동료들끼리 자신의 고장에 대한 얘기를 하곤 한다. 노랑머리는 오클라호마 출신이고 안경 낀 뚱보는 코네티컷이 고향이다. 그들에게 나의 고향은 철원이 아니다. 한국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나의 고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모르는 것을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난 실상 한국을 잘 모른다. 어렴풋이 느낌과 정으로만 아스라이 소통하는 것이다. 몇 번 한국을 다녀 올 기회가 있었지만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일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바쁘게 살피다가 돌아오곤 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이 아내를 소개받던 그해의 한 달 이었다. 그때처럼 내 생애에 설레던 적이 있었던가. 아내를 만났고 친척을 만났고 이별했던 것들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다. 어설픈 이별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다시 만나서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땅을 밟는 순간 나의 묘비를 붙들고 통곡이라도 할 줄 알았었다. 그러나 모래바람은 내 안에서 잠시 소용돌이치다가 이내 멈추었다. 대지는 촉촉했고 현란했다. 마치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세월이 뭉텅 잘라져 나가 있었다. 공항이나 택시, 상가 또는 은행에서 일하던 아줌마 아저씨들은 어디론지 전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곳에는 나와 동년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동년배의 외사촌 형은 나와 어디든 같이 가고 싶어 했다. 부모님들이 섭섭지 않은 대접을 부탁했는지도 모르지만, 그와 나는 서로가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서로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확인 하고픈 야릇한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김치를 먹고 자란 놈의 물건이 더 큰지, 햄버거를 먹고 자란 놈이 더 굵은지, 따위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야. 근데, 너 금발이랑 해 봤냐. 나이트클럽에서 맥주를 몇 잔 들이 킨 외사촌 형이 물었다. 처음엔 그의 질문을 금방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 보았다는 것인지. 공부, 연애, 사랑, 아니면 섹스? 한국 사람들의 대다수의 공통된 관점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서, 어떻게 노력을 해서 돈을 벌었는지. 얼마나 사랑하다가 같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따위는 부수적인 이해를 돕는데 사용되었다. 돈을 엄청 벌었다는 사실과, 누구랑 결혼을 하였다는 결과가 가장 중요했다. 미국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였다. 미국사람들은, 어떻게 만났니?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외사촌 형처럼 마지막 단계를 먼저 묻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도 그와 며칠간 어울리며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그의 질문과 의도를 단박에 알아듣게 되었다. 마치 잊혔던 수학 공식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응. 몇 번. 오호 몇 번씩이나. 외사촌 형의 눈이 부러움 섞인 호기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웨이터와 함께 두 명의 여자가 우리의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은 늘씬한 이십대 초반의 여자들이었다. 시쳇말로 부킹이 이뤄진 셈이었다. 조명 탓인지 여자들이 보통 미인이 아니었다. 술도 잘 마셨고 춤도 그에 못지않았다. 머리가 흔들릴 만큼 찢어지는 음악 소리와 내부 전체를 무대처럼 현란한 조명이 휘감았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으니 서로의 몸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나올 때에는 마치 연인처럼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택시를 타고 같이 호텔로 갔다. -아이, 하지 마. 안으려는 나의 손길을 슬며시 뿌리치며 그녀가 말했다. 엉거주춤 내가 떨어져 앉자 그녀는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의 자존심이 추락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후에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나와서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검은 레이스 팬티가 섹시해 보였다. 그녀의 말과 행동의 차이에 대한 판단이 당혹스러웠다. 하지 말라는 말과, NO라는 단어에 서로 간 영역의 반경 또한 금방 셈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의 뜻을 내게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잘못하다가는 강간범으로 잡혀 한국의 감옥에서 젊음을 보내야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록 첫 만남이었지만 아내에 대한 약간의 죄의식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그일 이후로 외사촌 형의 나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보통의 한국 놈이랑 다르다는 얘기였다. 좋게 표현하면 이성과 자제력을 겸비한 잘 자란 엄마의 둘째 아들이었고, 솔직한 표현은 머리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쩔 수 없는 미국 놈이라는 것이었다. 외사촌 형과의 유흥가 순례는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한국에 대한 야릇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요염한 자태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야한 팬티의 그 여자가 가끔씩 생각났다. 내가 이별하며 남기고 왔던 것들의 기억과 아쉬움이 범벅되어 그녀의 형상으로 떠오르곤 했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체득케 된 일종의 생활양식이나 경험에서 기인된 점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급박하고 막중한 일들로 여겨졌던 것들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실상 먼지처럼 아주 미미하게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의 차이는 깊은 완곡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체득케 된 것도 한 가지 요소라 할 수 있었다. 미국사회에서 정확한 의사표현은 상당히 중요하다. 다인종과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섞여있으니 필요불가결한 일 일 것이다. 그 사회에서 자신의 문화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NO면 NO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언어는 여운의 뒷맛을 길게 남기며 미련을 갖게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게 수용의 완곡한 표현을 했었고, 나는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아쉬운 환상은 위장된 군사기지의 모니터에서, 혹은 아내의 무표정한 일상에서 문득 엿보이기도 하였다. 건조한 아내와의 섹스에서 그녀의 쭉 뻗은 하얀 허벅지의 기억을 되살려보는 것도 양심의 가책으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는 그녀를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막연한 망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름이나 연락처, 소재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한국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아내도 심각한 충돌의 와중에 해소의 상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럴듯한 명분으로 나를 이해시키려 해보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아내의 표정과 행동에서 배신감은 커져가고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의 메일을 체크해 보았지만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낮에 확인을 할 수 없으니 아내가 확인 즉시 메일을 지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결근하고 인터넷 카페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교묘하고도 야비한 행태의 꼬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 일주일 휴가원을 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나왔다. 아내는 바닐라향의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잊지 않았다. 곧장 인터넷 카페로 출근을 했다. 갖고 온 노트북을 인터넷에 접속하고 아내의 이메일에 도착 알람을 설치했다. 야수의 눈이 되어 덫에 걸릴 먹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루의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엘에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차로 달려도 남는 시간이었다.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을 인터넷 게임이나 웹 서핑으로 보냈다. 가끔씩 울리는 알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열어보면, 번번이 스팸메일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내가 혹시 잘 못 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니면 정리를 했거나 다른 이메일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들었다.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조깅을 나가는 나의 운동화를 챙겨주었고 말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휴가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 되었다. 점심을 햄버거로 때우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알람이 울렸다. 보통의 알람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치 기름이 잘 칠해진 리벌버의 방아쇠를 가슴을 향해 당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내의 상대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해있었다. 리벌버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데도 계속 총소리가 났다. -도대체 웬일이야. 어디 아픈 것 아냐. 아니면 내가 잘못한 것 있어? 걱정이 돼서 죽을 것만 같아. 집에 당신이 없던 동안 난리가 났었어. 붉은 대추차가 우리 애들 다 데워 죽이려고 하는 것을 사력을 다해서 물리쳤단 말이야. 아무튼 연락 빨리 줘. 나 미칠 것만 같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중에야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내는 상대와 사이버의 부부로 지내는 사이였다. 아내의 아이디로 사이월드에서 그들의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상대가 주고받았던 수많은 밀어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남편-잃을 것, 잃어서는 안 되는 것 구분하지 않을 거야. 이제 당신을 위해서 다 버릴 거야. 당신을 위해서 더 많이 비워 놓을 거야. 사랑해. 아내-항상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당신이 너무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언제나 재미있는 얘기와,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을 빠짐없이 나를 데려가 주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참, 내가 보낸 바닐라향의 커피를 아직 못 받았나요? 아내는 사이버의 세계에서 바닐라 향의 커피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커피 잔에서 오르는 김과 은은한 바닐라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AOK의 계기판에 적색등이 껌벅이며 경보음을 내었다. 사이버와 현실, 아내와 나, 그리고 나와 또 다른 남편, 아내와 그 남자는 서로에게 위장된 관계였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런 연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