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익는 마을 / 정찬열

2007.10.1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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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밝다. 백중 보름달이다. 저녁을 먹고 뒤뜰에 나가니 달이 하도 밝아, 달력을 보았더니 칠월 보름이다. 백중은 추석처럼 큰 명절은 아니지만, 숨가쁘게 농사일을 하던 농부들이 술을 담궈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불가에서는 허물을 대중 앞에 들어 말하고 참회를 구하는 날로 삼았다. 몸과 마음을 추스리면서 가을을 준비하는, 추석으로 가는 징검다리 명절인 셈이다. 이날, 달이 둥실 떠오르면 우리 시골에서는 인근 마을 여자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몰려와 강강술래를 했다. 처녀를 좇아 총각들도, 엄마 따라 아이들도 왔다. “강가앙 수-월레에-” 느리던 템포가 “뛰어라 뛰어라 ㄸㅟㅅ띠나물, 강강 술레”로 빠르게 바뀌면, 흥이 오른 청년들까지 처녀들 사이에 끼어들어 손에 손잡고 강강술레를 했다. 강강술래소리는 보드라운 밤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번져갔다. 달 빛 아래 산천이 아늑했다. 백중같은 명절은 물론 술 소비가 많은 농번기, 특히 보리타작과 모내기가 겹치는 시기는 거의 집집마다 술을 담갔다. 술밥을 찐 다음 누룩을 섞어 옹기동이에 담아 아랫목에 이불을 씌워놓으면, 며칠 후 술 익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쌀로 담그는 막걸리가 많았지만, 진달래, 매실, 석류 등 철따라 얻게 되는 꽃이나 열매를 따서도 술을 빚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조주를 금하기 때문이다. 백중 무렵이면 연례행사처럼 술 단속원이 마을에 나타났다. 주조장에서 술이 잘 팔리지 않는 마을을 골라 세무서에 부탁을 하면 사람을 내 보낸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술 감독이라 불렀다. 그가 마을에 나타나면 온 마을에 금방 소식이 퍼졌다. 한번은 누군가 동네 마이크로 ‘술 감독 나왔다’고 광고를 한 덕택에 애먼 이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느 날, 술 단속을 나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술동이를 마을 뒷산이나 대밭 등에 숨기느라 바빴다. 걸리면 벌금을 물기 때문이다. 딸그만네 할머니도 술동이를 이고 바쁜 걸음으로 숨기러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골목길을 내려오던 술 감독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당황한 할머니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손을 놓아버렸다. 술동이는 박살이 나고, 술 건데기가 골목길에 질펀하게 쏟아졌다. 온 골목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 감독은 넋을 잃은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속원을 빤히 쳐다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두 다리를 펴고 “아이고 아이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던 젊은 단속원은 잠시 어쩔줄 몰라 하더니, 한참 후에 “할머니, 안 본 걸로 할테니 그만 그치세요” 하고 할머니를 달래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더 울던 할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며 코를 팽 하고 풀더니,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물었다. “참말로 안 본 걸로 해줄티요.” “아니 할머니, 이렇게 증인이 많은데 거짓말을 하겠어요” “오메 고마운거, 그런디 젊은양반, 다른 사람들은 으짤거시요”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알았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저도 할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하고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그날, 마을은 탈 없이 지나갔다. 그 일로 동네사람들은 딸 다섯을 내리 낳자 딸은 그만 낳으라고 이름 지었던 딸그만네집, 그 할머니를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백중달을 보면서 고향을 생각한다. 달빛 환한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며,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광경이 아른거린다. 지금도 어느 집 아랫목에는 술 익는 냄새가 나 것다. <2007년 8월 29일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