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 / 최향미

2008.03.11 14:07

미문이 조회 수:244 추천:1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시장기가 밀려온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 문을 연다. '아! 어제 먹다 남겨둔 잡채여' 전자 레인지에 데워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잡채를 한 젓가락 듬뿍 집어 입 속에 넣는다. 두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음- 바로 이 맛이야.' 두 아이들은 교회 일로 외출중이고 남편도 거래처 손님과 저녁 식사 약속이있다는 연락이 왔다. 덕분에 오늘 저녁은 느긋한 마음으로 대충 허기진 배를 해결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Video 한편 틀어 놓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먹는 잡채 맛은, 비록 먹다 남겨져 이분만에 데워진 음식이지만 일품이다. 한국 드라마에 심취되어서 먹다보니 어느새 잡채는 사라지고 접시에는 참깨 몇 알만 남아 버렸다.입안에서는 아직도 잡채의 고소한 맛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젓가락은 공허하게 빈 접시만 찝적거리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먹는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것이다. 미련이 남은 젓가락은 결국 접시에 남은 참깨를 하나씩 집어 입안에 넣기 시작했다.한 알갱이씩 톡톡 터지는 참깨의 맛이 이렇게 고소한 것인지 내가 예전에 미처 알고 있었을까? 젓가락으로 한 톨을 꾸-욱 눌러본다. 보일 듯 말 듯 배시시 기름이 베어 나온다. 그래 요것이 참기름이지. 새로운 것을 발견한 초등학생 꼬마처럼 작은 흥분이 일어난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가 터지면서 기름도 나오고 맛스런 고소한 냄새도 내 보내는 참깨가 대견해 보인다. 어렸을 적 나는 별명이 손가락만큼 많았다. 그 많은 별명 중에 유난히 듣기 싫었던 것이 '땅 꼬 마 '였다. 비쩍 마르고 친구들보다 훨씬 작은 키탓으로 불린 이 별명을 나는 너무 창피해 했다. 키 작은 외모 때문인지 나는 세상의 '작은것'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작은 사람이나 사물이 장한일을 해 내거나 기특한 모습을 보이면 공연히 내가 우쭐해지는 버릇이 있다. 요 참깨 알갱이, 볼수록 대견하고 신기하다. 참깨가 볶아지고 짜내어져서 참기름이 되면 얼마나 많은 음식에 향기와 맛을 더하는가. 문득 땅꼬마지만 참깨보다 엄청 큰 나를 돌아본다. 누군가가 나를 들들 볶아대고 꾹꾹 눌러대면 뭐가 나올까? 나의 고약한 모든것들이 걸러내지 못하고, 참아내지 못 한 채 냄새를 피우며 튀어나올것이 분명하다. 콩알보다 더 작은 참깨와 비교되고 있는 나의 모습에 피식 쓴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참깨 한 톨조차 남아있지 않은 빈 접시를 젓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본다. 그러면서 참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비록 보잘 것 없이 작은 사람이지만 늘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시금치, 콩나물처럼 주인공이 못 되어도 그 고소한 참기름 맛을 여운으로 남길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