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을 위한 서시
2022.02.27 09:33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들어도 몸은 왼쪽으로 끌리나 보다
아침마다 시트가 왼쪽으로 쏠려있다
누웠던 자리에선 밤새 능선을 넘었는 지
어둠을 털 때마다 주름 잡힌 사이에 산 그늘 담겨 있다
몇 년을 한결같이
왼쪽으로만 들이미는 현상이 참 희한하여
그 형태 위에 그대로 몸을 뉘어본다
잠든 뒤에 무엇이 등을 밀어 이토록 한쪽만을 고집하게 하는걸까
피곤한 날일 수록 더 바짝 쏠려 있는 잠의 무늬들
잠버릇이라 하기엔 당겨진 힘이 너무 세다
왼쪽으로만 쏠리는 속성에 비밀이 있다면
아마 태평양을 이우는 마당 깊은집 있기 때문일 게다
밤이면 한 가닥 암호처럼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바다냄새와
한 겹의 깊고 푸른 피부로 찰랑대는 작은 샘
다 철들어 떠나온 그곳에서
밤마다 오른쪽을 밀어내고 무슨 기별을 가져오는 건지
매일 아침 움켜쥔 주름 탱탱하게 펼 때마다
끈적한 물냄새가 손끝으로 모인다
- 정국희, 「왼쪽을 위한 서시」
잠버릇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 상상한 시네요. 시적 화자는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 있는, 왼쪽으로 “바짝 쏠려 있는 잠의 무늬들”을 확인하고는, 그 희한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자문합니다. 어떤 힘이나 본능이 오른쪽으로 누운 화자를 자기도 모르게 왼쪽으로 돌아눕게 하고 왼쪽 시트를 잡아당기게 하는 걸까요. 그야 아무도 모르죠. 이 시의 목적이 그 이유를 밝히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죠. 사실이건 아니건 그 현상에 대해 상상하는 과정, 그것이 시라고 할 수 있겠죠. 화자에 의하면 그것은 왼쪽 방향에 태평양이 있고 그 바다 너머엔 바로 고국과 고향이 있고 “마당 깊은집”이 있기 때문이라네요.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는 자꾸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공간, 자신의 유년과 정체성이 살아있는 시공간을 향해 돌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거죠. 가요나 상투적인 시에 흔히 등장하는 ‘꿈에도 그리는’ 나라와 고향집이 아니라, 온몸에 뼈에 살에 심장에 깊이 각인되어 저절로 자석처럼 끌릴 수밖에 없는 나라와 고향집이라는 것이죠. “다 철들어 떠나온 그곳에서/ 밤마다 오른쪽을 밀어내고 무슨 기별을 가져오는 건지/ 매일 아침 움켜쥔 주름 탱탱하게 펼 때마다/ 끈적한 물냄새가 손끝으로 모인다”는 문장에서 꿈을 넘어 뼈와 살에 각인된 고국과 고향의 자력, 흡인력이 잘 느껴집니다. 인위적으로 의식하고 작정하고 쓴 게 아니라, 일상에서 관찰한 것을 자연스럽게 쓴 것이기에 진정성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문제에 대한 강력한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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