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 "아귀" 감상
2015.10.11 12:35
아귀
경(經)은 아귀를 일러 배는 산만하고
목은 바늘구멍 같아 영겁을
굶주림에 울부짖는다 적어놓았으나,
정작 어물전 (이 아귀는 그 아귄가)
제 몸을 뜯어먹고 연명해온 듯
터진 전대 같은 배에
아가리만 크고 험하다
머리보다는 혹이 먼저 띄는 법이고
배보다 더 큰 배꼽이 왕왕 불치의 시대정신이 되듯
확실히, 배가 큰 것 보다는
입이 큰 편이 더 허기져 보인다
물면 놓아주는 법 없을 완강한 턱과 강력한 이빨들을 보니
뚱그런 배에 가느다란 목에 꽂힌
아프리카 난민 같은 그 아귀보다는 역시 이 아귀가
진짜 아귀 같지만
진위는 가려서 무엇하나
아직 솜털이 보송한 인간계의 젊은 여자가
그저 식재료에 불과한 아귀를 토막 쳐
비닐봉지에 담아준다
뼈와 가시와 이빨에 낀 허기 몇 점
뜯어 드시라고
아귀처럼
음식을 먹을 때 허천나게 먹는 사람을 보고 아귀처럼 먹는다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다고도 하는데 그것 또한 거지귀신이란 말로써 염치없이 지나치게 탐한다는 말이다. 아구라고도 부르는 이 물고기는 특히 입이 크고 험상궂게 생긴 게 특징인데 시인은 어물전에서 아구를 사면서 아귀에 대한 시적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때 입이 크면 잘 산다고 하여 입이 큰 걸 선호하던 시대가 있었다. 옛날 풍속에 집터가 세면 북어를 대들보 밑 땅속에 묻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 뜻은 액을 쫒아내기 위함도 있었지만 북어가 입이 커서 재물이 들어오게 해달라는 뜻도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귀가 훨씬 더 입이 크지만 흉악하게 생긴 데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있어 아무래도 우리 선조들은 온순하게 생긴 북어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시인은 시각적 대상인 사물을 보고 우연히 시상을 건져낸 발상은 좋았지만 이 시에는 내적인 울림은 없다. 아귀라는 한 물고기의 특성에 시인의 상상을 불어넣어 시각적으로 감각화했을 뿐 강렬히 돋보이는 문장을 창조한 것은 없다. 시인이 이 시에서도 말했듯이 배가 크든 입이 크든 진위를 가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그저 하나의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의 중간쯤에 나오는 <둥그런 배에 가느다란 목이 꽂힌 아프리카 난민 같은> 이란 대목을 읽으면서 김기택시인의 시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가 떠올랐다. 그 시는 아이에 대한 감정이나 연민을 제거하고 사물만을 냉정하게 드러냈음에도 울림이 있었다.특히 마지막 행에서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라는 대목에서는 생명의 의지가 은유로 실감나게 나타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굴러가는 것을 보면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라는 시가 떠오르고, 접시꽃을 보면 <접시꽃 당신>이 떠오르고, 국화를 보면 <국화 옆에서>가 떠오르고, 펄럭이는 것을 보면 <깃발>이 떠오르듯 사람은 무엇을 보든가 읽든가 하면 거기에 따른 연상작용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떤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렇듯 이 시는 아귀라는 사물을 보며 떠오르는 연상작용을 거쳐 마지막에 젊은 여자가 아귀를 토막쳐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걸로 시를 완성시켰다.
뼈와 가시와 이빨에 낀 허기 몇 점
뜯어 드시라고
아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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