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의 중국인을 말하다의 요약과 느낀점

       

1) <먹는 것이 하늘, 음식의 중요성>

 

       세상에 하늘보다 큰 것은 없다. 그래서 중국인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생각했고,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다라고 했으며 하늘 아래 먹는 일 빼고 무엇이 있을까라고까지 했다. 또한 사람()은 곧 입()이라서 인구라고 칭했다. 다른 말로 하면 생계를 도모하는 것을 입에 풀칠한다라고 했으며 직업이나 일을 밥그릇으로 표현했다. 이를 테면, 손재주로 먹고 산다느니. 혹은 입을 놀려 먹고 산다느니,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먹는 것으로 보고, 먹는 것으로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중국인의 이런 관념은 배고픔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이 매일 하는 첫 번째 일은 먹는 일, 혹은 먹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밥을 먹여줄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을 대신해 천명을 받은 자였고 민심을 얻는 좋은 황제가 되였다. 중국인들은 가장 중요한 일이 먹고 사는 일이어서 만나면 첫마디가 밥 먹었냐이다. 맹자는 심지어 ’70세 이상의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을 사회의 표준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곱 가지 생필품은 장작, , 소금, 기름, 간장, 그리고 식초로 모두 먹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정부는 쌀값을 안정시키고, 장바구니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심리 깊은 곳에는 먹는 것이 생명의 근원이며,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에 바로 생명을 부여한다는 관념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란 존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가 우선 젖을 주고 나중엔 밥을 준다. 이 과정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위대하고, 가장 신성하면서 숭배해야할 사람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곧 하늘이며 신이다.

 

      또한 고향사람은 나와 같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가깝다. 최소한 나와 같은 물을 마셨거나 같은 우물물을 마셨다. 고향사람이 가까운 건 바로 고향의 물에 이유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자는 먹고 먹이는 관계이며, 형제와 고향사람은 같은 것을 함께 먹는 관계이다. 함께 식사한다는 건 또 어떤 것인가? 서로 관계를 맺는 일이다. 모든 젓가락이 같은 반찬을 집고 모든 수저가 같은 국을 뜬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함께 먹는다는 거다.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것, 그래서 중국문화는 분명 먹는 문화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느낀점> 중국문화에는 무엇이든 먹는 것과 연관시키는 범식주의(泛食主義)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것과도 많이 닮아있다. 우리 또한 어른들께 드리는 인사가 진지는 드셨나요였다. 요즘은 먹을 게 풍족해서 식사하셨냐는 말보다 잘 계셨냐고 인사하지만 아직도 우리네 엄마들은 마치 밥이 전부인 냥 죽어가면서 까지 자식에게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는 말이 있다. 사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과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아마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도 있을법한 말들이다. 천석꾼의 딸로 자란 나의 어머니도 밥을 버리면 죄가 된다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 또한 딸들에게 밥을 버리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먹고 살찌는 것보단 버리는 게 낫다며 청승좀 그만 떨라고 야단들이다. 밥이 곧 하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새 시대의 여유로운 투정이다.



2). 의복


 

      옷은 몸을 대표한다. 옷은 몸에 가장 가까이 닿는 것으로, 자연히 감정 부여의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사용됐다. 몸은 또한 한 사람의 육체와 마음 전부를 대표한다. 몸이라는 글자는 하나지만 중요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는 을 써서 타인他人이라고 한다. 두 번째 뜻은 는 생명은 동일한 것으로, 영혼 역시 육체와 혼동하여 정신을 대표했다. 따라서 옷은 입은 사람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의복은 단순한 옷가지가 아니다. 거기에는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정신적 의미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옷은 바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연히 얼굴이고 체면이다. 그래서 상황에 맞게 옷을 입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중국 식당에서는 복장이 단정하지 않으면, 접대하지 못하니 양해바랍니다라고 써 있다. 식당에 못 들어간 사람은 물론 그날 복장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의복 문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다. 크게는 치국의 방법이고, 작게는 한 사람의 미적 취향이자 도덕 수양의 표현이며, 타인에 의한 존중과 예의이다. 다시 말해서 의복, 예의, 도덕은 삼위일체다. 예의를 잃으면 실례를 범하고, 실례하면 덕을 잃으며, 덕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 그래서 신분과 지위 그리고 도덕적 수양이 있는 사람은 입고 싶은 대로, 혹은 꾸미고 싶은 대로 꾸밀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색다른 차림을 혐오하는 중국은 유행을 가장 잘 좇는 나라이기도 하다. 특이한 차림에 반대하면서도 유행에 민감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 원인은 중국 문화의 사상핵심에 담긴 단체의식에 있다. 모든 사람은 단체의 일원이며, 개인의 생존은 모두 단체의 존재를 근거로 하고, 각자의 가치 역시 단체의 판단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게다가 의복이란 원래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는 것이다. 만약 보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이쁘게 입어도 의기가 없기 때문이다. 유행을 좇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는 성질이 있다.


      중국인이 옷을 입는 원칙에 대해서는 세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만 중요하고 뒤는 중요하지 않으며, 겉옷이 중요하고 속옷은 중요하지 않으며, 예복은 중요하고 평복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갑자기 불이 나는 것은 안 무서워도, 넘어지는 것은 무섭다라고 했다. 만약 넘어져서 더러워지거나 구멍이 나면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옷을 입는 것은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였다.

 

      <느낀점>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내 자신을 잘 안다는 거다. 즉 나는 어떤 옷을 입어야 내 신체의 단점을 감추면서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안다는 뜻이다. 그것은 교육수준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멕시칸 명동이라는 알바라도에서 옷을 판 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불법 체류자로 막노동을 하면서 좁은 아파트에 네 가족 혹은 다섯 가족이 모여 사는 사람들이다. 쉽게 말해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라고 하겠다. 그들이 옷을 사러 오면 손님은 이게 맞겠어요하고 어떤 옷을 권하면 절대 안 된다. 그들은 사이즈나 색깔에 구애받지 않고 끼어서 들어가기만 하면 배가 튀어나오든 다리통이 터져나가든 상관을 안 한다. 유행이면 그냥 입고 나간다. 어떤 때는 되레 내가 부끄럽고 민망해도 팔려면 가만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사는 베벌리 힐스 사람들은 옷을 세련되게 잘 입을 줄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체형과 생김새를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옷이 어울릴지를 안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바로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3). 체면


 

       중국인은 죽어도 체면이다. 죽어도 체면이란 말은 체면을 위해 죽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죽게 한다거나 이다. 인간관계는 체면에 따라 처리되고 유지되며, 사회생활도 체면에 따라 결정되고 만들어진다. 옛 사람들의 체면은 아주 실제적인데다 얼굴이 두껍지가 못했다. 초의 군주였던 항우는 줄곧 백전백승이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참패하여 체면을 구기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이는 무슨 낯으로 그들을 보러 가겠는가였다. 그는 결국 볼 낯이 없다하여 자살했다. 그가 죽은 이후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죽음으로 체면을 살린 것이다.


       중국인은 왜 죽어도 체면을 지키려할까? 그것은 중국 문화의 사상 속에 담긴 단체의식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은 단독의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자 실제로 체면을 차리려는 것은 타인과 마주하기 위해서다.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고 잘못은 옳지않음을 나타냈다.

 

      죽어도 체면이란 말은 절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체면은 최소한 몸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면 마침 방문한 집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다가 함께 먹자고 권해도 체면 때문에 배가 고프지만 거절한다는 말이다. 체면이 몸보다 중요하다는 분명한 증거다. 체면은 얼굴만을 이야기 할 뿐 속은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주로 얼굴이다. 속담에 밖에 나가면 하늘을 보고, 집에 들어오면 사람의 안색을 살피라했다. 안색을 잘 살피지 못하면 체면에 금이 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면이 있을 때는 얼굴이 있고 체면이 없을 때는 얼굴은 없고 뻔뻔스러움만 있다.

 

      체면의 가장 큰 실리는 체면이 있으면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체면은 중국인의 사교에서통행증과 같다. 그것이 있어야 모든 일이 순조롭다. 어쨌든 원시시대부터 사람은 죽어도 체면이었다. 따라서 중국인이 체면을 차리고 싶다면 품행이 방정해야한다. 품행이 방정하려면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그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는 눈치껏 행동해야 하고, 둘째는 사리분별을 해야 한다. 눈치껏 행동한다는 것은 상대의 안색을 살펴 상황이 어떤지를 아는 것이고, 사리분별을 하는 것은, 예의를 알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면은 잃는 것은 어떤 경우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래서 죽어도 체면이다.

 

      <느낀점>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 체면이 밥 먹여 주냐는 말이 있다. 그만큼 체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즉 내 코가 석자인데 체면은 무슨 얼어 죽을 체면이냐는 뜻이다. 시쳇말로 요즘엔 체면생각하고 있다가는 손해 보기 십상이다. 체면이란 다른 말로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존심 지킨다고 점잖 빼고 있다가는 사랑하는 사람도 뺏긴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단 자존심은 접어두고 용감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게 요즘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체면 차리다가는 기회를 놓친다는 뜻이다. 그 말은 바로 손해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인의 체면을 넓은 의미로 달리 해석해 본다면, 어쩌면 체면치레라는 말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올바로 살려면 체면치레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체면치레란 다른 말로 인간의 도리이다. 즉 나만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며 인간의 본분과 예의를 지키며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게 아마 중국인이 말하는 체면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바로 내 체면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우정


 

      <부부와 우정> 링컨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정이라고 했다. 중국은 생명은 고귀하고, 우정은 더 고귀하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치대로라면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 간의 사랑이 더 진실하고 깊은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국의 전통결혼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목적이 아니고 종묘를 섬기고 대를 잇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를 위해 위험을 불사한 이야기는 많아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위험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군다나 아내를 위해 노래한 시도 없다

.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태도도 부부사이의 냉담한 감정문제에 대해서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끔찍한 것은 이런 부부관계가 가장 정당하고 도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부부간에 사랑이 없었으므로, 친구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부부 결합의 근거가 사랑이 아닌, 사회적 필요와 윤리적 의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례적으로 부부는 군신관계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남편이 하라는 대로 절대복종을 해야 했다.

 

      전통 예교에서 볼 때, 아내는 밥상을 이마 앞에 받쳐 들고 남편을 손님처럼 공경하는 것으로 공경을 강조했지 사랑을 강조한 게 아니었다. 남편이 걸으라면 걷고 뛰라면 뛰고 그렇게 참고 견딜 뿐이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아름답고 섹시한 여인을 요물이라 했다. 그래서 소박하고 냉담한, 혹은 섹시하지 않는 여자, 즉 아내는 아이를 낳는 일 외에는 다른 적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아내와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지만 친구는 가장 평등하면서 가장 자유로운 관계다. 친구의 첫 번째 특징은 평등이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서로 같음이다. 그래서 동문을 붕이라 하고 동지를 우라고 했다. 세 번째는 잘 맞음이다. ’은 조개 두 개처럼 같은 것을 가리키고 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서 서로 잘 맞음이란 뜻이다.

 

       중국인은 우애와 우정을 중시한다. 우애와 우정은 사랑보다 장려되고 칭송되며 동시에 가장 진실 되고 돈독한 정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지기知己를 사귀는 것이며, 세상 어디에서든 지기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중국 문화의 사상 핵심은 단체의식으로 온 세상이 모두 형제라는 경지를 추구하여 더 많은 친구를 사귈 것을 장려했다.

 

      <느낀점> 중국은 아무래도 봉건적인데다가 남성위주의 사회이다 보니 부부보다는 친구를 더 중시했던 게 확실하다. 물론 남자들에겐 그지없이 좋은 환경이었으나 여자들에겐 절대적인 복종뿐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내 딸 친구는 중국남자와 결혼했는데 사랑받는 것은 물론이고 일이라면 남편이 다 한단다. 여자는 집에서 팽팽 놀면서 손톱이나 다듬고 남자는 퇴근하자마자 앞치마 두르고 밥하랴 청소하랴 혼자서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실지로 두 눈으로 안 봤으니 곧이가 안 듣기지만 중국인 남편에 대해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다.

 

      외국에서 살다보면 가족이외에 제일 소중한 게 친구다. 그렇지만 친구를 사귀기가 참 힘든 곳이 또한 외국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교회를 중심으로 친구가 맺어지긴 하지만 대게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지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친한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문화는 친구보다 사랑이 먼저고 가족 중심이여서다. 더군다나 이민 온 사람들은 각자 먹고 살기 바빠서 친구하고 수다 떨 시간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쩌다 한국을 다녀오면 잠깐 동안 우울증에 빠지곤 한다. 한국은 남자천국이면서 여자천국이기 때문이다.



5). 인정


 

      정이란 만남에서 생긴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친척이라도 멀리 있으면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즉 자주 만나야 정이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이 있는 곳에 인정이 있다”.라고 한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기쁜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인정에 무감각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동정이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도와주었다면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서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설 수 있게 해주고,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면 남을 죽여서도 안 된다.

 

      인정은 본질적으로 이다. 내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가장 믿을 만하다. 얼굴은 거짓으로 꾸밀 수 있지만 정감은 분명 진심이다. 그리고 정감에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정을 중시함과 동시에 보답도 중시한다. 그러므로 인정의 기본원칙은 보답이다. 중국인은 보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고, 원수를 졌으면 원수를 갚는 것이 불변의 진리다. 원수와 은혜 이 둘을 비교하면 원수를 갚는 것보다 은혜를 갚는 것을 더 중시한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더 많이 보답하면 물방울 같은 은혜를 용솟는 샘물로 보답 받았다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은 왜 반드시 갚아야 할까? 감정은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정은 다음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진정한 감정으로서 진심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의식화된 것으로 표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공리적인 성질을 띠는데 반드시 돌려줘야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인정은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 이를 테면, 만들어진 표정이든 우러나온 진심이든 모두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인정이라는 게 좋은 것이긴 해도 제법 골치 아프다. 없으면 안 되지만 , 지나치게 많아도 감당하기 어렵다. 인정이 모자라지 않으면서 인정에 구속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방법이 있다. 그건 요령이 좀 필요할 뿐이다.

 

    <느낀점> 세상에 이란 말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하고 가만히 되뇌어보면 우리의 할머니의 삶이, 그리고 어머니들의 눈물이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인생살이가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아마 우리 한국사람들처럼 정이 많은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마디로 정에 살고, 정에 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것이 다 정으로 똘똘 뭉쳐있다.


     헤어지고 싶어도 미운정 때문에 못 헤어지고 산다는 사람들이 많다. 미운정이라는 말은 마음속에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뜻도 되지만 무엇보다 애틋한 정이 묻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마나 한국적인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정이 있었기에, 아니 우리 자손들이 이런 정을 받고 자랐기에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용맹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양심이라고 해도 되겠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인정이 없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추악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고 보니 모든 만물의 이치가 다 으로 이어져 있다. 정은 바로 눈물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없다는 건 인정이 없고 독하다는 뜻이고, 눈물이 있다는 건, 남의 아픔을 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이 정을 나누면서 남은 인생을 좀 더 값지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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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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