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리키의 인류의 기원 요약

2016.09.04 12:54

정국희 조회 수:414

                      

                       리처드 리키의 <인류의 기원> 요약

       

 

 

        인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해 오늘날에 이르렀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물음은 우주의 기원과 함께 언제나 우리 인간을 사로잡아 온 주제였다. 그리고 이를 밝히려는 과정은 오류와 편견, 나아가 선입관과의 끝없는 투쟁이기도 했다. 200년도 훨씬 전인 1758년에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그의 책 자연의 체계(system naturae)에서, 인간을 속명과 종명을 합쳐 표기하는 이명법의 체계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이름 붙이고 하나의 종으로 분류했다.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 후인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도 다른 생물로부터 진화해 왔음을, 다시 말해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 임을 암시했다. 이후 편견으로 가득 찬 고매한 인간 대신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인 토머스 헉슬리와 그 후예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큰 흐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데 전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부부가 있다. 그리고 부모의 뒤를 이어 케냐의 사막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리처드 리키가 있다. 리키박사는 로저 르윈과 함께 오리지(origins)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가 가장 최근에 쓴 저서이다.

 

        1969, 리키는 특별한 행운을 잡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는 케냐 북부 투르카나(Turkana)호의 넒은 동쪽 호숫가에 형성된 사람 퇴적물을 조사할 참이었다. 그로서는 이 조사가 최초의 독자적인 화석 지역 탐사였다. 그는 그곳에 중요한 화석이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에 이끌렸다. 그리고 층상 퇴적물이 원시 인류의 생활을 보존하고 있을 유력한 저장소라고 보았다. 그곳의 지형은 험하고 기후는 숨이 막힐 만큼 덥고 건조했지만, 경치만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미국 지리학회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팀과 그 지역 답사에서 돌아오던 도중 그는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전혀 손상되지 않은 두개골 화석이 오렌지 빛 모래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퀭한 눈구멍은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틀림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즉시 그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Autralopitbecus boisei)임을 확인했던 그 두개골은 오래전에 멸종된 사람종으로서 최근에 이르러서야 계절별로 강물이 흐르는 퇴적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175만 년 전에 땅속에 묻힌 이후 처음으로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서 , 일찍이 발굴된 몇 안 되는 온전한 원시 인류의 두개골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도 그것이 드러난 후 몇 주일 내내 억수같은 비가 마른 대지를 적셨을 것이고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연약한 유골은 홍수에 파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화석을 발굴하게 된 우연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 이후도 투르카나호에서 행해진 일련의 탐사에서도 많은 사람 화석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 속의 손상되지 않은 두 개골도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 간 인류의 한 가지였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인 양친의 그늘에 가려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는 화석 사냥 같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모험심이라는 신기한 마법이 이 일로 끌어들였다. 인류 조상의 흔적이 들어 있는 동아프리카의 건조한 퇴적물은 거역할 수 없었다. 흔히 화석과 원시 석기를 찾는 일은 낭만적인 경험으로 비치기도 한다. 낭만적인 면도 없진 않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조그만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스런 일면도 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황량한 곳에서 기본 자료를 찾아내야 하는 과학이다.

 

        투르카나 호의 동쪽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많은 중요한 발견 덕분에, 리키는 한때 완강히 거부하던 직업에 흠뻑 빠져들었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카모야 키메우는 좁은 협곡 경사면 위의 조약돌 사이에서 두개골의 자그마한 파편을 발견했다. 그들은 주의 깊게 두개골의 다른 조각들을 유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 그 팀은 다섯 계절에 걸쳐 발굴을 진행해 1.500톤의 퇴적물을 옮겼으며,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야외에서만 7달을 이상을 지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것이 150만 년이나 된 그 고대의 호수 자리에서 죽은 한 개체의 사실상 전체 골격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이 투르카나 소년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에 죽었는데 죽음의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 소년의 두개골 파편들이 서서히 전체 모습을 드러내어 150만 년 만에 다시 한 개인으로 태어났다. 인류의 화석 기록상에서 이처럼 완벽한 골격은 기껏 10만 년 전에 해당하는 네안데르탈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인류학에는 전문가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들이 많다. 선사 시대의 사람과에 속하는 여러 종에는 과학적인 꼬리표에 제각기 학명이 붙어있다. 물론 사람 자체에도 이름이 있다. 호미니드(hominid)가 그것이다. 그의 동료들은 호미니드란 용어를 모든 선조 종에 대해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들은 '사람(human)'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때만 써야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호미니드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지능,도덕성, 그리고 내성적인 의식의 깊이를 가진 동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르카나 소년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일원이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종이다. 우리는 700만 년 전에 최초의 사람종이 진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무대에 등장할 때쯤에 인류의 선사 시대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우리는 호모 에렉투스 이전의 모든 사람종이 두 발을 가졌으며, 많은 점에서 유인원과 비슷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들은 비교적 코가 작은 편이고, 턱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종이었다. 사냥을 생존의 중요 수단으로 삼은 최초의 사람종이며, 현생 인류처럼 달릴 수 있는 최초의 사람종이었다. 어느 정도의 구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어가 있었다는 사실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 의식을 자졌으리라고 생각했다.

 

        인류의 선사시대에 관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분석되기 까지 나는 네 가지 주요 단계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최초의 단계는 사람과의 기원으로, 두 발을 가지고 직립보행 하는 유인원 종이 신화한 것은 약 700만 년 전의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두 발을 가진 종들의 분화로서 생물학자들이 적응 반응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700만 년 전과 200만 년 전 사이에 두 발을 가진 여러 유인원 종들이 진화했으며, 각기 조금씩 다른 생태 환경에 적응해 갔다. 세 번째 단계의 특징으로, 사람속의 기원을 의미한다. 사람속은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궁극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간 인류라는 나무의 한 가지이다. 네 번째 단계는 현생 인류의 기원으로,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언어와 의식, 예술적 상상력, 그림 기술 혁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다.

 

                                                               최초의 사람

 

         1859, 다윈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서 진화의 함축적 의미가 사람에게 추론되는 것을 신중하게 피했다. 이후 개정판에는 인간의 기원과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빛이 비칠 것이다라는 조심스런 문장을 덧붙였다. 그는 종의 기원이후인 1871년에 발간된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에서 이 짧은 문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첫째는 인류가 최초로 어디서 진화했는지 와 관련이 있었다. 둘째는 그런 진화의 형태, 또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인류의 진화 방식에 대한 다윈의 견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학을 지배했으나., 이제 그의 견해가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윈은 인류의 요람이 아프리카라고 말했다. 그의 추론은 단순했다. 그의 결론은 전적으로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윈이 살던 시기에 알려진 사람 화석은 유럽의 네안데르탈인 시기의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인간의 역사에서 비교적 후기 단계에 해당한다.

 

        인류학자들은 다윈의 견해를 몹시 싫어했다. 그 이유는 특히 열대 아프리카를 식미주의적인 경멸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검은 대륙이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고상한 생물의 기원에 적합한 곳일 수 없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사람 화석이 추가로 발견되기 시작하자 아프리카 기원 가설은 더욱 경멸을 받았다. 이런 식의 태도가 수십 년간 널리 펴졌다.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내린 두 번째 결론은,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중요한 특징, 즉 대지를 딛고 선 두 다리와 기술 능력, 뇌 용량의 증가 등은 한꺼번에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윈은 직립 보행의 진화가 석기 무기의 제조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진화적 변화가 사람의 송곳니의 기원과 연관된다고 말했다. <인간의 초기 선조는 아마 커다란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경쟁 상대와 싸울 때 돌이나 몽동이 또는 다른 무기를 쓴 습관이 생기면서 인간의 조상들은 턱과 치아를 덜 쓰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치아와 함께 턱의 크기도 작아졌을 것이다.>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최초의 사람종은 단지 두 발을 가진 유인원 이상이었다. 이미 그 종은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라고 평가하는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 설명은 강력하고 그럴 듯해서 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중심으로 설득력 있는 가정들을 짜 맞추었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과학은 아니었다. 다윈의 주장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영향력이 있었으며, 실제로 사람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를 둘러싼 논쟁의 주된 원천이기도 했다. 1961년 당시 예일대학교에서 연구 중이던 엘윈 시몬스는 획기적인 과학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라마피테쿠스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유인원 비슷한 생물이 그때까지 알려진 최초의 호미니드 종이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시몬스는 유인원의 이빨처럼 뾰족하지 않고 납작한 점에서 라마피테쿠스의 어금니가 사람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송곳니가 유인원보다 짧고 무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시몬스는 완전하지 않는 위턱을 다시 짜 맞출 수 있다면 모양이 사람과 비슷해 오늘날의 유인원처럼 u자 모양이 아니라 뒤쪽으로 가면서 조금씩 넓어지는 아치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 말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두 생화학자 앨런 윌슨과 빈센트사리히가 최초의 사람종이 진화한 시기에 대해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의 데이터에 사람, 침팬지, 고릴라의 혈액 단백질은 거의 균등한 차이를 나타냈다. 500만 년 전에 어떤 진화적 사건이 일어나 공통 조상이 동시에 세 방향으로 분화된 것이다. 이 분화로 현생 인류뿐 아니라 현생 침팬지, 현생 고릴라의 진화가 함께 일어났다. 과거의 지식에 따르면, 침팬지와 고릴라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척 사이였으나 사람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사람과 유인원의 관계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믿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그 결과 격렬한 논쟁이 터져 나왔다. 논쟁은 십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 초 필빔과 그의 연구진이 파키스탄에서, 그리고 런던 자연사박물과의 피터 앤드루스와 그의 동료들이 터키에서 훨씬 더 완전한 라마티테쿠스 종의 화석을 발견하자 마침내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다윈의 가정이 부적절하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고고학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인의 동시 진화라는 개념이 옳다면 두 발 보행, 기술, , 용량의 증거는 고고학과 화석 기록에서 동시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 기록 중에서 한 가지만 살펴보아도 그의 가정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석기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석기 ( 자갈돌의 한쪽 면을 떼어내어 날을 만든 찍개)의 가장 초기 사례는 약 250만 년이라는 간격이 있는 셈이다. 두 발을 가진 유인원을 형성한 진화적 힘이 무엇이든 그것은 도구를 만들고 쓰는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두발 보행으로 변한 것은 진화생물학에서 볼 수 있는 해부학 구조의 가장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켄트 주립 대학교의 해부학자인 오웬 러브조이가 지적한 것처럼 그런 진화적 변모는 하찮은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1988년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집필한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뼈와 뼈에 힘을 주는 근육의 조성과, 팔다리의 움직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사람과 침팬지의 골반을 한번 보기만 해도 이러한 관찰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다. 침팬지의 경우 골반이 길쭉한 데 반해 사람은 골반이 옆으로 퍼져 상자처럼 생겼다. 또한 팔다리와 몸통도 큰 차이가 있다. 두 발 보행의 출현은 중요한 생물학적 변화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적응 결과이기도 하다. 인류학자들은 인간 진화에서 차지하는 두 발 보행의 중요성을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물건을 옮길 수 있도록 손이 자유로워진 점을 강조하는 학파이다. 다른 하나는 두 발 보행이 에너지 사용에서 훨씬 효율적인 보행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학파이다. 그리고 물건을 나르는 능력은 단지 직립 자세의 우연적인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두 발을 가진 최초의 유인원은 보행 방식만을 볼 때 사람이었다. 그들의 손, , 그리고 치아는 유인원과 비슷했을 것이다. 많은 생물학자들은 처음에 이 학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자들은 두 발로 걷는 방식이 네 발로 걷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의 두 발 보행 에너지 효율과 말과 개의 에너지 효율을 비교했디. 진화의 유형은 복잡하고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은 당면한 환경에 대해 작동할 뿐 결코 장기적인 목표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마침내 최초의 사람 후손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요소란 아무것도 없었다.

 

                                                                인류의 조상들

 

         내 계산에 따르면 사람종 개체의 화석 표본은 적어도 1,000개는 된다. 종류도 다양하고 보존 상태도 천차만별이다. 이 표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고고학 기록의 초기 부분, 400만 년 전부터 거의 100만 년 전까지 시기의 유물에서 발굴되었다.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람 화석은 거의 200만 년 전의 화석일 것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 사람들의 활동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사람 화석 기록에 대한 인식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다. 그 발전은 레이먼드 다트가 유명한 타웅 아이(Taung child0의 발굴을 발표한 1924년에 시작되었다. 한 아이의 불완전한 두개골 즉 두개 일부, 안면, 아래턱, 그리고 두뇌의 구멍이 포함된 이 표본은 남아프리카 타웅 석회석 지대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석회석 지대의 퇴적층의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는 없지만 과학적 추정치는 그 아이가 약 200만 년 전에 살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타웅 아이의 머리는 많은 유인원의 특징, 즉 작은 뇌와 앞으로 튀어나온 턱을 가지고 있었지만 , 다트는 그것 역시 사람의 특징이라고 인식했다. 즉 턱이 유인원 경우보다 덜 튀어나왔고 어금니가 납작하고 송곳니가 작았다. 주요한 증거는 대후두공의 위치였다. 그것은 두개골 바닥에 있는 구멍으로 그 구멍을 지나 척수가 척추로 연결된다. 유인원의 경우 그 구멍은 두개골 바닥에서 비교적 뒤쪽에 위치한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는 중앙 쪽에 훨씬 더 가깝다. 그 차이는 사람의 두 발 직립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유인원의 자세에서는 머리가 앞쪽으로 기울어 있다. 타웅 아이의 대후두공은 중앙에 있었는데, 이것은 그 아이가 두 발을 가진 유인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트는 타웅 아이가 호미니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화석이 먼 옛날의 유인원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데는 거의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인류학에서 최초로 현대 지질학 연대 결정법을 적용한 결과 진즈(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175만 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진즈라는 이름은 그것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의 동아프리카판 변형, 또는 지리적 변종이라는 가정에 따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로 바뀌었다. 이 종은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자는 키가 1.5미터가 넘는 데 비해, 여자는 겨우 1.2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조사 결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진화 유형이 초기 인간의 두 가지 기본 형태라는 것이다. 한 형태는 작은 뇌와 큰어금니를 가진 다양한 오스트랄로피테크스 종이다. 또 하난의 형태는 확장된 뇌와 작은 어금니를 가진 사람속이다. 계통수는 두 개의 큰 가지를 뻗었다. 100만 년 전쯤 모두 멸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종이 그 하나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진화한 사람속이 다른 하나이다.

 

        가장 초기의 사람화석은 동아프리카에서 나왔다. 트르카나 호에서 우리는 약 400만 년 전의 팔뼈, 손목뼈, 턱조각, 치아 등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디오피아 아와시 지방에서 비슷한 연대의 다리뼈를 찾아냈다. 이 대목에서 뼈 이야기는 접어두고, 우리 조상들의 행동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인 돌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침팬지는 능숙한 도구 사용자이다. 그러나 침팬지가 석기를 만드는 것은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었다. 초기의 도구를 제작한 원인이 유인원보다 뛰어난 정신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운동 신경과 인식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인류학자들을 사로잡았던 문제는 누가 도구를 만들었는가 이다. 고고학 기록에 도구가 처음 등장할 무렵,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종이 일부 있었고, 사람속의 종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기록은 그렇게 분명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부분을 사람속의 경우 육류를 섭취했다는 점일 것이다. 초식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도구 없이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은 최초의 도구 제작자는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오른손잡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 속의 뇌가 이미 진정한 사람의 수준, 즉 오늘날 우리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고상한 사냥꾼

 

         최소한 몇 가지 계열의 증거는 초기 인류의 체격이 적극적인 육류의 섭취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하고도 체계적인 생존 전략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인류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현대의 대다수 수렵, 채집사회의 경우 성의 분화가 뚜렷하다. 즉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식물 채집을 하는 식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사냥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생각은 인류학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뿌리는 다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71년에 쓴 <인간의 유래>에서 그는 돌 무기가 약탈자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먹이를 잡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공적으로 제작된 무기를 이용해 사냥을 했다는 사실이 부분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이작은 음식 공유 가설(food sharing hypothesis)'로 인류학적 사고의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1978<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그 가설을 발표하고 인간의 행동을 형성시킨 원동력을 사냥이 아닌 음식의 공동 획득과 공유라는 특성에서 찾았다. 또한 그는 다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972년 회의에서는음식을 공유한 행위는 언어, 사회적 상호 작용, 지능의 발전을 촉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78년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행동 유형이 나타나면서 사람이 유인원과 분리되었다고 썼다.

(1) 두발 보행, (2) 구어, (3)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음식 공유, (4) 본거지에서의 삶, (5) 대형동물의 사냥. 이러한 행동 유형은 물론 현생 인류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200만 년 전에 여러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호미니드의 사회적, 생태적 장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시프먼은 고대의 뼈에 나 있는 칼자국의 분포를 조사해서 두 가지 점을 관찰했다. 첫째, 약 절반가량에서 절단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대부분이 거의 살을 발라낸 뼈라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칼자국이 육시 동물이 남긴 이빨 자국과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호미니드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전에 이미 육식 동물이 그 뼈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청소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시프먼은 결론지었다. 그녀가 지적한 우리 조상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낯설고, 노골적으로 적나라한 것이었다.

 

                                                                         현생인류의 기원

 

         최근 인류학 연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주제는 바로 현생 인류의 기원이다. 즉 인류의 기원에 관한 논쟁인데 전혀 다른 내용의 가설을 놓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다. 현생인류란 여기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지칭한다. 100년 전의 사람들이 생물학적 측면에서 우리와 똑같았지만 그 시대에 전기 문명은 찾아볼 수 없었듯이 7000년 전의 마을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문화의 하부 구조는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서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현생 인류의 정신을 특징짓는 표지는 차츰 사라져 간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얽힌 논쟁은 세부적인 지점들 중 일부를 파헤치기 전에 보다 큰 문제들을 개괄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약 200먼 년 전에 이루어진 사람속의 진화에서 시작되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으로 끝난다.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두 가지 계열의 증거가 존재해 왔다. 하나는 해부학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을 비롯해서 두뇌와 손이 만들어 낸 표현물과 연관된 변화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세 번째 계열의 증거가 더해졌다. 그것은 분자 유전학에 의한 증거이다.

 

        투루카나 호숫가에서 발견된 소년의 골격은 약 160만 년 전의 초기 인류의 해부학적 특징에 대해 매우 훌륭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초기의 호모 에렉투스의 개체가 키가 크고 강건하며 억센 근육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뇌는 그 선조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는 컸지만, 현생 인류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현대인의 뇌 용량이 1.350세제곱미터인 데 비해 호모 에렉투스는 900세제곱센티미터 정도였다.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은 길고 얇았으며 이마 부분이 작고 두개골은 더 두꺼웠다. 턱은 조금 튀어나오고 눈 위쪽에 두드러진 두덩이 있었다. 최근에 발견한 약 34000년 전의 인간 유골 화석은 모두 완전히 현대적인 호모 사피엔스이다. 두개골은 높아지고 뼈 두께는 얇아졌다. 눈 위의 돌출 부위도 덜 두드러지고 용적은 더 커졌다. 따라서 우리는 약 100만 년 전과 34000년 전 사이에 진화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서 현생 인류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에서 발굴된 페트랄로나인, 프랑스 남서부에서 발견된 아라고인, 독일에서 발굴된 스타인하임인, 잠비아의 브로큰 힐인 등등,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호모 에렉투스보다 진보했다는 점(예를 들어 더 큰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원시적이라는 점(두꺼운 머리뼈와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이었다. 이 시기의 종에서 나타나는 해부학적 다양성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이들 화석에 집단적으로 고대형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 두 가지 매우 상이한 모델들이 제안되었는데 그중에 첫 번째는 다지역 진화 가설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현생 인류의 기원을 구세계 전역을 포괄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즉 호모 에렉투스의 집단이 형성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네안테르탈인은 이들 세 대륙의 전체적인 경향의 일부이다.

 

                                                                         예술이라는 언어

 

          빙하기 이래의 모든 유럽 동굴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벽화를 지니고 있는 라스코 동굴은 벽화를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 1936년 이래 일반에 대한 공개를 금지시켰다.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 생생한 황소, , 사슴의 그림은 35년 전 리키가 부모님과 함께 파리의 유명한 역사가인 앙리 브뢰유와 함께였다. 그들은 벽화 속에 생명 그 자체를 포박해 넣은 듯했다. 15000년 전에 조각한 예술가들이 처했을 작업 조건을 상상하면 그들의 재능은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탁월했다. 알타미라 동굴의 걸출한 천정 그림을 마르세리온 드 사우투올라 경의 어린 딸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알타리마 동굴 벽화는 극단적으로 단순하다. 동굴이 주는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경계이다.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는 고대의 이미지들은 고대 세계의 작은 단편일 뿐이다. 게다가 선사 시대의 미술품에 대한 인식에는 강한 서구적 경향성이 개재되어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위대한 선사 시대 역사학자 앙드레 르루아구랑은 빙하 시대의 그림들을 서구 예술의 기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1만 년 전인 빙하기 말기에는 구상 회화와 조각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동형적인 이미지와 기하학적인 양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원근법이나 생생한 운동감 같은 라스코 동굴 벽화에 적용된 기법들 중 상당수는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 예술에서 재창조되었다. 후기 구석기 시대는 본질적으로 34000년 전과 3만 년 전 사이의 오리냐크 문화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벽화가 그려진 동굴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구석기인들은 작은 상아 염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염주는 옷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사람의 상과 동물의 상을 만들었다.

 

                                                                               언어라는 예술

 

        언어는 인류의 선사 시대에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을 개체로서 그리고 하나의 종으로 변화시켰다. 버거턴은 이렇게 말했다. “루리가 갖고 있는 모든 정신적 능력 중에서 언어는 우리의 의식이라는 문턱 아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려는 사람에게는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생활을 단 한순간도 상상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가 언어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에 대해서는 더욱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가 최초로 사고의 틀을 형성했을 때, 언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언어는 호모 사피엔스와 그 밖의 다른 자연 세계 사이에 심연을 파 놓았다. 불연속적인 음, 즉 음소를 발성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유인원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람을 50개의 음소를 가지고 있는 반면 유인원은 약 12개의 음소를 갖는다. 그렇지만 사람의 경우 음소의 상용은 거의 무한할 정도이다.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가 가진 빠르고 상세한 의사소통 사고는 자연계의 다른 동물들과 견줄 수 없는 수준이다. 1994년에 발간된 언어본능(Language Instinct)이라는 책에서 핑커는 구어가 탄생하게 된 유전적 근거로 생각되는 증거들을 수집했다. 그 증거들은 자연선택을 통한 언어의 진화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영장류의 집단에서 사회적 상호 작용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털 다듬기(grooming) 두 마리의 유인원이 짝을 이우러 서로의 털을 다듬어 주는 습성) 였다. 털 다듬기는 서로의 긴밀한 접촉을 유지시켜 주었고, 집단 속에서 서로를 감시하는 수단이라는 기능도 가졌다. 이를 테면, 언어란 말을 이용한 털 다듬기인 셈이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고 믿었다. 화이트는 자신의 견해로 후기 구석기 시대에 언어 능력의 극적인 발전을 나타내는 일곱 종류의 고고학적 증거를 열거했다. 첫째, 시체 매장 의식이다. 매장 풍습이 네안데르탈 시대에 시작되었음은 거의 확실하지만 부장품을 포함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둘째, 제작과 신체 장식을 포함하는 예술적 표현이다. 셋째, 후기 구석기 시대에 기술적인 혁신과 문화적 변화 속도가 갑작스럽게 가속되었다. 넷째, 이 시기에 최초로 문화의 지역적 차이가 나타났다. 다섯째, 이 시기에 낯선 물건의 교역과 같은 장거리 접촉의 증거가 나타났다. 여섯째, 주거 유적지의 크기가 괄목할 정도로 증가했다. 일곱째, 이전까지만 해도 거의 석기에 의존하던 도구가 뼈, , 점토 등의 다른 재료를 포함하게 되었다.

 

                                                                                     정신의 기원

 

        지구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래 세 가지 혁명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생명 자체의 탄생으로서, 35억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미생물의 형태로 발생한 생명은 그 이전까지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만이 작용하던 세계에 강력한 힘으로 등장했다. 두 번째 혁명은 약 10억 년 전에 일어난 일로서 다세포 생물의 탄생이다. 차츰 생물이 복잡해지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가진 동물과 식물이 진화해 풍부한 자양분을 지닌 생태계 속에서 서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250만 년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인간 의식의 기원이다. 이제 생물은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연계를 지신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3세기 전에 데카르트는 자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기의식의 근원에 얽혀 있는 불안한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정신/육체라는 이분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정신/육체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정신과 육체를 전혀 별개의 독립체로 간주하고, 두 독립체가 결합해 전체를 형성한다는 이원론이었다. 또한 데카르트는 정신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으로 보았고 , 다른 동물들은 자동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이와 유사한 관점이 생물학과 심리학을 지배했다. 사람의 사호는 모두 기원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그 신화는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기원 신화는 내성적인 의식이라는 근원지에서 샘솟은 것이다. 그것은 삼라만상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내부적인 목소리이다. 사람의 정신에 내성적 의식이라는 불꽃이 피어오른 이래, 모든 시기에 걸쳐 신화와 종교는 인간사회의 일부분으로 기능해 왔다.

 

        우리는 수렵.체집인으로서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정신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의식과 삶의 경이에 대한 외경심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통해 통일성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창조하고 다시 우리를 창조한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언어, 관습, 종교 등의) 다양성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렇듯 훌륭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축복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기원을 읽고 느낀 점

<인류는 스스로를 창조해 왔다>

        인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해 오늘날에 이르렀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물음은 우주의 기원과 함께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 의문으로 남은 주제였다. 그리고 이를 밝히려는 과정은 끝없는 투쟁이기도 헸지만 인류학자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년도 훨씬 전인 1758년에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그의 책 자연의 체계(system naturae)에서, 인간을 속명과 종명을 합쳐 표기하는 이명법의 체계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이름 붙이고 하나의 종으로 분류했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 후인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이 다른 생물로부터 진화해 왔음을, 다시 말해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 임을 암시했다. 이 큰 흐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데 전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리처드 리키는 1969, 미국 지리학회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팀과 함께 케냐 북부 투르카나(Turkana)호에서 175만 년 전에 묻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Autralopitbecus boisei) 두개골을 발견한다.

그 이후도 150만 년이나 된 투르카나호에서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 간 투르카나 소년의 화석을 찾아냈다. 투르카나 소년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700만 년 전에 최초의 사람종이 진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0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무대에 등장할 때쯤에는 인류의 선사 시대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우리는 호모 에렉투스 이전의 모든 사람종이 두 발을 가졌으며, 많은 점에서 유인원과 비슷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비교적 코가 작고 턱이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불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종이었다. 또한 사냥을 했으며, 현생 인류처럼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구어가 있었다는 사실도 시사하고 있고 의식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선사시대에 관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분석되기까지 네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최초의 단계는 두 발을 가지고 직립보행 하는 유인원 종이 진화한 것은 약 700만 년 전의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두 발을 가진 종들의 분화로서 생물학자들이 적응 반응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700만 년 전과 200만 년 전 사이에 두 발을 가진 여러 유인원 종들이 진화했으며, 각기 조금씩 다른 생태 환경에 적응해 갔다. 세 번째 단계의 특징으로, 사람속의 기원으로,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간 인류이다. 네 번째 단계는 현생 인류의 기원으로, 언어와 의식, 예술적 상상력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다.

        1859, 다윈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에서 첫인류의 진화 방식에 대한 견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학을 지배했으나 이제 그의 견해가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윈은 인류의 요람이 아프리카라고 말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사람 화석이 추가로 발견되기 시작하자 아프리카 기원 가설은 더욱 경멸을 받았다. 그 이유는 검은 대륙이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고상한 생물의 기원에 적합한 곳일 수 없었다는 거다.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중요한 특징, 즉 대지를 딛고 선 두 다리와 기술 능력, 뇌 용량의 증가 등은 한꺼번에 진화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사람종은 단지 두 발을 가진 유인원 이상이었다. 이미 그 종은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학자를 믿어야 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화석을 통해 철저하게 증거를 파해쳤다지만 과연 과학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고작 90살 정도인 인간의 시간으로 수백억년의 우주의 나이와 수십억 년이 넘는 인간의 진화를 어찌 알겠나 싶다. 다만, 과학에 근거를 두고 인류는 스스로를 창조해 왔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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