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간 혹은 우주의 공간

                                        배한봉의 복사꽃 아래 천년

 

 

            복사꽃 하면 발그스름 부끄럼 많던 여자애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집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복사꽃이 보이고, 나보다 두 뼘 정도 더 컸던 그 집 오빠도 보인다. 우연히 복사꽃 날리는 것을 함께 바라본 이후론 날리는 것만 봐도 가슴에 선연한 길이 하나 생긴다. 배한봉의 복사꽃 아래 천년은 나에게 어린 여자아이를 보여주고, 젊은 엄마를 보여주고, 그리고 허리꼬부장한 할머니를 보여준다. 복사꽃의 꽃말이 아름다운 여인이라선지 작가는 꽃 속에 한 여자의 평생을 담았다. 아니 어쩌면, 신발 속 아담한 우주에서 여인이 가마가만 숨 쉬며 걸어간 길을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이 자연과 한 몸임을, 특히 여성의 일생을 자연물에 비유한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 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복사꽃 아래 천년>전문


             시골에서 자란 시인은 ,그리고 과수원에서 일을 해본 시인은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인 걸 몇 번 봐왔을 게다, 따라서 그에게 꽃의 의미는 사랑과 연민이 되었을 게다. 다시 말하면, 복사꽃 아래 천년은 인간과 천지만물의 조화, 그리고 자연을 통해 보는 순수한 시각적 현상 속에서 감각적 본성을 직시하고 있는 현장감 있는 시다. 복사꽃은 시인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예술적 감각을 열어주는 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부터 선비들이 복사꽃 아래서 시를 읊고 음주가무를 즐기기도 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복사꽃은 우리나라의 상징적이면서 전통적인 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중의 하나인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복사꽃의 풍경을 천재 화가 안견한테 이야기하여 3일 만에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복사꽃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엄마 같은 그리고 동생 같은 친숙한 꽃인 게 분명하다. 꽃잎이 자잘하여 서양하고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서러운 듯 환한 동양꽃이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이 시가 쓰여지고 있는 곳은 그저 하나의 현장이 아니다. 사랑이 남겨진 삶의 공간이다. 즉 꽃잎이 소멸하면서 동시에 순환 관계로 접어드는 곳, 꽃잎은 개체 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리듬을 통해 공간을 얻는 곳,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불연속적인 관계를 넘어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 우주의 현장인 것이다.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는 생명을 향한 작가의 사랑이 들어있다. 신발 속은 고요한 정적으로 싸여 있지만 정작 그 안엔 미세한 분주함으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떨어져 살 수 없음을, 그래서 자연으로 인해 절대적 삶을 영위해 가는 생명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인 스스로 내 발을 짓이김의 세계로 차마 넣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마치 꽃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전이되는 그런 이치이다. 따라서 이 시의 주체는 세상을 하직하는 꽃잎이지만 기실은 우주의 내밀한 시공을 메우고 있는 형상이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자연 상태일 것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무한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배한봉의 시는 삶의 그대로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의 시 세계가 순연하고 맑고 투명한 것은 시인의 성정이 맑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조화와 더불어 충만한 자유가 생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나고 죽는 근원의 질서에 스스로 그러한자연의 이치에 조응하는 그런 뜻이 담겨있다.

 

             이렇게 보면 배한봉의 시작법은 한국적 서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시들이 난무하는 이때에 시인의 시들은 고요하면서 힘차다. 그러면서 거침이 없다. 매실을 따고 돌아와 점심도 거른 채 깜박 잠이 깬 뒤 소월시 당선 소식을 들었다는 시인, 그 말이 실감나지 않아 찬물에 몇 번이나 세수를 했다는 시인은, 참으로 복사꽃 아래 천년시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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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교수인  배한봉 시인은 196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흑조> <우포늪 왁새> <악기점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등이 있다. 11회 현대시 작품상과 제 26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자료출처; <2011년소월시문학상작품집><우포늪 왁새><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장석주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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