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저수지

 

 

 

잔물결도 패거릴 지어 몰려다니면

죽음의 커다란 입이 되지요

번쩍이는 죽음의 이빨들이 되지요

석삼년에 한번쯤 인육을 삼키던 저수지는

백년간 서너 차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죽음의 말라붙은 입속을 샅샅이 파헤쳐보았지만

사라진 몸, 데리고 나온 적 없습니다.

살덩이를 뼈째로 녹이며 큰 물결들이

깊은 곳에서 거칠게 찢어선 삼켰겠지요

물 빠진 저수지 바닥엔 흙먼지들이 몰려다니고

굶주린 바람이 서로 부딪쳐 으르렁대고 있어요

물을 호령하여 사람을 빨아당기던 그놈들이요

구름처럼 무정한 흑막입니다

어서 새 옷을 입혀달라고 악다구니하며

벌거벗은 괴수들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골짜기 가득 황량한 아가리를 벌리고

십년 만에 또 한 번 대청소를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은 저수지라는 다소 평범한 주제를 바탕으로 물이 빠진 저수지의 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잔물결도 패거릴 지어 몰려다니면 죽음의 커다란 입이 되지요> 라든가 <번쩍이는 죽음의 이빨들이 되지요> 라는 도입부는 객관적인 듯 하면서도 사실은 전체적인 의미로 보아 매우 직선적이다. 이 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가 저수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 즉, 과거 체험을 심상으로 보존하여 시의 대상으로 이미지를 설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마을의 저수지라는 곳은 논에 물을 댈 요량으로 물을 가두어 둔 곳인데 한 낮엔 잠자리가 물 꼬리를 치고 노는 평온한 곳이기도 하지만 칠흑 같은 밤엔 원통한 사람이나 한 맺힌 사람들이 빠져 죽기도 하는 그런 장소이기도 하다.


      옛날 내가 자란 우리 동네에도 저수지가 있었다. 집이 한두 채 정도만한 크기의 그 저수지는 읍내로 가는 학교 길에 있었는데 하필이면 신작로를 가운데 두고 위쪽은 공동묘지가 있는 산이었고 아래쪽은 저수지였다. 그래서 비라도 오는 밤이면 저수지에서 쳐녀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고 또 공동묘지에선 애기울음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여 어두워지면 다들 그 길을 꺼려하였다. 저수지란 곳이 원래 한 발 들어가면 무릎에 차지만 두발 들어가면 키가 넘어버리는 매우 위험천만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저수지에서는 멱 감지 말라고 집집마다 단도리를 하였는데도 실제로 아이들이 하교길에 멱을 감다 한 아이가 가라앉은 적이 있었다. 온 동네 장정들이 아이를 찾는데 실패하자 다음 날 저수지 물을 전부 다 뺀 적이 있었는데 글쎄 그 아이가 무릎을 안은 채로 물 밑에 앉아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농수로 이용하기 위해 마을마다 한두 개쯤은 꼭 있어야했던 저수지는 동네 우물만큼이나 많은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곳이기도 했다. 화자는 이런 저수지의 사건들에 관해 체험한 기억의 환기를 시의 제재로 삼았지만 실은 현재 눈앞에 벌어진 대상을 보며 혼잣말처럼 무심히 저수지에 대한 현상를 이야기 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외침도 호소도 아닌 이 시는 인육을 삼키고 살덩이를 뼈째로 녹인다는 말로 자칫 오싹하게 하는 한기는 있지만 화자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치루는 저수지의 대청소라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끝을 맺고 있다.

 

 

 

 

    구두

 

 

 

길들이 반군처럼 에워싸고 기다리는 병원 앞

슬리퍼 신고 앉아 잠깐. 희망을 생각한다

오지도 않았으면서 떠날 줄 모르는 것

희망만큼 곤한 그리움도 없었지만,

희망이 구두같이 구겨져 터덜대는 발걸음이라면

그냥 그만 우릴 지나쳐도 괜찮아, 하는 마음이

희망 아닐까

구두처럼 막다른 어둠까지 질주해준 것도

한사코 함께 되돌아와 준 것도 없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늙은 애인

내가 돌아앉아 저리고 미안한 두 발을 주무르노라면

구두는 새 굽을 신고 어딘가로 또 어질어질 가려 하겠지

구두를 만류하여 가슴에 품고

오늘은 회복실 같은 집에 일찍 돌아가야겠다

쥐어본 적 없는데도 놓을 수 없는 것 아침이면

어서 나가보자고 또 우쭐대는 구두 두 짝의 재촉을

죽은 이를 찾으러 가듯 따라나서게 되는 것이

희망일까

검은 동공이 빛을 내듯

시커먼 구두약이 광이 되듯

무언가 잠깐, 희미하게 다시 타오르는

반드시 타오르고야 마는 오후가 있다

새 길의 기치창검이 하염없이 공중을 찌를 때

 

 

             곽재구의 구두 한 켤레의 시를 감동 있게 읽은 적이 있다. 구두에 관한 시는 참 많다. 구두는 발에 신겨져 몸을 온 천지로 다니게 하는 만큼 구두에 관한 시는 많을 수밖에 없다. 구두라는 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액세서리가 아닌 가장 먼저 갖추어져야할 필수 물건이기 때문이다. 멋을 부리려면 제일먼저 구두를 잘 신으라는 말이 있다. 가장 돋보이는 곳이면서 또한 가장 나중에 눈에 띄는 곳, 그래서 선뜻 눈길이 가지 않는 몸의 끝 부분이지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화장실이 깨끗해야 청소가 완성되듯 구두가 산뜻해야 멋이 완성된다. 신발을 신고 있다는 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신발을 더 이상 신을 수 없다는 건 병석에 누웠거나 이승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기에 인간에겐 신발이 이리도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구두처럼 내 몸 다 받아준 건 없었다/구두처럼 막다른 어둠까지 질주해준 것도/ 한사코 함께 돌아와 준 것도 없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내 몸을 어디서건 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발은 어떠한가. 나의 정신까지도 온전히 받들어 아침이면 어서 나가보자고 재촉하여 일터로 데려다 주고 또 한사코 집으로 데려온다. 구두를 따라 나서게 되는 게 어쩌면 희망이라고, 이 구두 때문에 시인의 인생은 풍요로웠다고 목메인 고백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란 요컨대, 신발을 신고 다닌다는 뜻일 게다. 그러고 보면 신발이 생명이다. 나 또한 오래 전에 구두에 관한 시를 썼다. 한 때의 고통으로 얼룩진 현실을 이겨내고 인내의 성찰로 도달된 나의 회고의 시라 하겠다. 김용택 교수님이 자기 시에 자기가 먼저 감동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설혹 그게 가짜 감동이었을망정 그때 이시를 써놓고 혼자 글썽이던 생각이 나서 올려본다.

 

 

 

버려도 좋을

버리자니 아까운

굽 높은 신발 들고 수선집을 가네

 

뾰쪽한 뒷굽

허영끼 파랗게 앞 세우고

햇살 콕콕 찍으며 걷던

내 지난날 들고 수선집을 가네

 

새털처럼 가볍게 몸 올리고

훨훨 야생의 꿈을 키웠던 그 청춘

속없이 이냥 저냥 다 보내버리고

무심히 일상으로 회귀回歸한 지금

 

해탈한 듯

헛디뎌 옹이 박힌 흉터

싹뚝 잘라내려고

이력 같은 지문 들고 수선집을 가네

 

신발 뒷굽을 자르다 (정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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