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면우시집>

 

 

  

  

  

  

1). 입동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둘어찼다

배추꼬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 앉아 한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젖가락 줄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오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저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렵솓 뚜껑을 열고 있다

 

  

  

  

  

  

          어느 시인이 이 시집을 권하지 않았다면 이면우시인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이제라도 이 시집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시집 첫 장을 읽으면서부터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선 경력란이 깨끗해서 호감이 갔다. 그리고 보일러공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동변상련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닮은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시 말하면 겉으론 아무 표시를 내지 않아도 소위 세상이 말하는 화려한 학연과 지연이 없음이 나름 시인을 고되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허심탄회하게 말한다면 나의 컴플렉스에 괜히 시인을 끌어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면우시인의 시는 일단 비현실적인 말들이 하나도 없다. 다만 화려한 상상은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한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입동>이라는 말은 겨울이 들어서는 날이란 뜻이지만 화자는 따뜻한 밥을 주제로 삼았다.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찼다는 말이 참 좋다. 화자는 밥상 앞에 앉아 된장국 냄새에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내가 부엌에서 밥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릴 적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형제들과 밥 먹던 시절을 생각하고 있다. 밥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가 밖에서 들어온다. 그때서야 아내는 밥솥을 열고 밥을 푸기 시작한다. 아내는 아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아내 마음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기 위한 바램도 있었겠지만 입동으로 추운 바깥에서 오는 아이에게 따끈따끈한 밥을 먹이기 위한 어미의 심정이 더 담겨져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 식구. 고래 심줄보다도 더 질기고 끈끈하게 묶어진 식구라는 끈은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즉 한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한식구들인 것이다. 이렇듯, 한 식구가 따뜻한 밥상 앞에서 밥을 먹는 것이 아마도 세상살이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밥처럼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밥이 뭐길래 어미가 죽어가면서도 아들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는 말이 있다. 행여 끼니를 걸렀을 새라 죽으면서까지 걱정하는 어미 심정이 담긴 말이다. 못 살던 시대에는 밥이 목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밥이 귀한 때라 진지 드셨냐는 인사가 생길정도로 끼니 때우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요즘은 밥이 없으면 대신 빵을 먹으면 되는 시절인데도 화자는 못 먹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또 옛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현 가족에 대한 애정을 밥상머리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참으로 눈에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한 폭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2). 두더지

  

  

  

  

비 갠 아침 밭두둑 올려붙이는 바로 그 앞에

 

두더지 저도 팟팟팟 밭고랑 세우며 땅 속을 간다

 

꼭 꼬마 트랙터가 땅 속 마을을 질주하는 듯하다

 

, 이게 약이 된다는데 하며 삽날 치켜들다 금방 내렸다

 

땅 아래 살아 있다는 게 저처럼 분명하고 또

앞뒷발 팔랑개비처럼 놀려 제 앞길 뚫어나가는 열정에

 

문득 유쾌해졌던 거다 그리고 언젠가 깜깜한 데서 내 손 툭 치며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 와

 

앞산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

 

 

 

  

  

  

             마지막 연에서 웃음이 빙긋이 나오는 시다.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와 앞산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는 말이 참 해학(諧謔) 적이다. 사실 두더지를 살려준 게 아내와의 비밀한 정경이 꼭 생각나서가 아니다. 그 이전에 시인은 미물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다. 벌써 시 몇 편을 읽어보면 화자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시인의 시는 여성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시가 참 부드럽다.  하여, 부드러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렇다면 착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두더지는 쥐처럼 생긴 포유동물인데 땅 속에서만 살아서 눈이 어둡다고 한다. 발이 넓고 커서 땅을 잘 파기 때문에 땅 밑에서 지렁이나 달팽이 등을 먹고 살므로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화자가 죽이려고 했던 건 몸에 좋다고 해서였다. 죽을병에 걸려 약에 쓸 것도 아니면서 그저 몸에 좋다고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인다는 건 마음이 여린 화자에게는 당치도 않은 짓이었을 게다. 무엇보다 살겠다고 저리 부지런히 앞 뒷발 팔랑개비처럼 놀려 제 앞길 뚫어나가는 부지런함에 그만 마음이 유쾌해졌던 거다. 우리나라 속담에 게으른 사람은 뺨이 열대요 부지런한 사람은 더운밥을 먹는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는 어여쁨도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사람에게나 짐승에서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더군다나 살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안쓰러운 마음까지 가져다주기 마련인 법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고 흐믓한 모습이다.

  

         이와 같이 화자는 시적 대상을 그저 하찮은 미물에게서 찾아 그 안에서 풍요로운 마음을 얻는다. 시의 흐름이 사실적인 감각으로 전개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경쾌하게 만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읽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우물대는

사내 보는 일 그것 참 흐뭇하오 맑은 술 한잔 약봉지 털 듯

툭 털어넣고 마주 앉은 이에게 잔 건네며 껄껄대는 사내 보는 일

역시 흐뭇하오 그 곁에 젊은 여자, 호 불어 놓어준 제 아이

오물대는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오

 

  

유리벽 이쪽에서 나도 저리 해보리라 마음먹은 저녁은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갔소.

  

  

  

  

  

  

  

  

 

         신호등에 걸린 버스 안에서 바라다 본 고깃집 광경을 마치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표현해 놓은 시각적이고 미각적인 생생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고깃집 풍경이지만 평화롭고 여유롭게 화자에게 침투되어 들어왔다고 하겠다. 화자는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향하는 퇴근버스에서 고기집에 외식하러 온 어느 화기애애한 가정을 보면서 나도 저리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그때뿐. 마음만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가 버렸다. 신호등에 잠깐 정차해 있는 그 몇 십초에서 화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화자가 보았던 이 정경은 이미지를 감각에 저장해서 상상력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고 일순간에 보고 느낀 점을 서정적으로 옮긴 감성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지 초등학교 육학년 때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당시 오빠가 부산에 있는 해양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하는 말이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적어논 책이라며 옆에 있는 나에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일러 주었다. 어린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하루의 일기를 아무리 늘려서 써도 공책 반 장을 다 못 채우는데 도대체 어떻게 늘려 놓았길래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까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난 그게 너무나 신기하고 궁금해서 그 책을 듬성듬성 읽었는지 정독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줄거리도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무슨 감옥 이야기 같은 것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었던 건 확실하다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수용소의 하루가 그저 그런 맨날 똑같은 하루일 테지만 풀어서 길게 쓰다 보니 그처럼 한 권의 부피로 나왔는 데 만약 화자에게 하루의 일을 기록하라면 열권의 분량이라도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왜냐하면 단 몇 십초 동안 보았던 현상들을 이토록 방대하게 쓸 수 있다면 양치질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책 반 권 분량은 충분히 쓰고도 남을 그런 위인이기 때문이다.

  

  

  

  

  

  

  

  

4). 무서운 버드나무

 

  

  

  

이른 봄 버드나무, 참새때 들이마셨다가 뱉어낸다

회초리 가지 산들바람에 낭창낭창대다

해바라기씨 기총소사하듯 다다다다 뱉어낸다

아니다 버드나무는 참새떼 한번 빨아들일 때마다 꼭

한마리씩 삼키는 거다 옛 이야기 속 냇둑 산발한 여자

술 취한 남자 홀랑 벗겨 냇물에 떠내려보낸다는

무서운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휘이익 뱉어낸다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간다

 

  

  

  

  

  

             이 작품은 전체가 한 연으로 이루어진 단순하면서도 묘미가 있는 시이다. 워낙에 군더더기가 없는 게 이면우 시인의 특징이긴 하지만 <무서운 버드나무> 또한 맑고 정결한 시인 것은 분명하다 . “이른 봄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뱉어낸다”. 여기서 버드나무는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그린 것인데 실제로 버드나무가 어떻게 참새떼를 들이마셨다가 뱉어낼 수가 있겠는가 . 이런걸 거짓말로 거짓말하기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합당한 표현이자 기발한 상상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찌보면 너무 의아한 면도 있지만 또한 이 시에서는 이 표현이 가장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새들이 하는 일이란 게 그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우루루 몰려다니는 것이 전부다. 물론 키 낮은 나무에서도 포롱포롱 장난치고 노는 게 일쑤지만 키 큰 나무로 떼지어 다니는 것도 많이 봐 왔다. 우리동네는 큰 나무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데 희한한 것은 그 중 꼭 한 나무에만 수십 마리가 떼거리로 와서 왁자하게 떠들다가 다 함께 우루루 날아가는 나무가 있다. 우리집에서 사선으로 서 있는 변호사집 앞 나무인데 새들이 들랑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훅 들여마시는 것처럼 들어갔다가 푸하고 품어내는 것처럼 한꺼번에 와 몰려나온다. 화자에게 버드나무는 어릴 때 들었던 무서운 전설을 가지고 있는 나무로 비쳐지고 있다. 참새떼가 올 때마다 한 마리씩 삼킨다든가 또는 행색이 방종하면 냇물에 맨살로 떠내려 보낸다든가 하는 전설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버드나무가 빈정이 상하기라도 하면 기총소사하듯 다다다다 뱉어내는 걸로 상상되었을 게 틀림없다. 시인이 자연의 하는 짓을 보며 홀로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시는 이른 봄으로 시작해서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간다로 끝나는 봄의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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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염 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 참 오래 날 멱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낸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대한민국 가장들은 다 힘들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우리나라 가장들처럼 가정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가장들은 마치 가족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평생을 자식과 아내를 위해 그야말로 등골 빠지게 일을 한다. 그래서 인지 아버지에 대한 시나 소설을 읽을 때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민우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보일러공이라면 대체로 단순노동이라서 생활하기도 빠듯했을 게 뻔하다. 특히 나보다 못하다 싶으면 업신여기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유한 내력인데 거기다가 마음까지 여린 사람이었다면 아마 상처도 수없이 받았을 게 틀림이 없다.

  

         이 시는 화자가 어느날 가동 중인 연소실 불길을 보며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장면이다. 불길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살아냈던 게 바로 저 불길 때문이었다고 감각적으로 직접 느끼고 있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저기서 밥이 나오고 공납금이 나오고 또 쓸쓸한 녹차도 따라 나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지켜주었고 가족을 지켜준 소중한 대상에게 어쩌면 감개무량하기까지 했을 게다. 살면서 어찌 쓸쓸한 일이 없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쓸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나도, 못나도, 부자건, 가난하건 간에 쓸쓸함을 느끼는 건 다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조물주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재미있고 내일도 신나면 그게 어디 인생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화자의 쓸쓸함이 이렇게 시를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이 표현은 이 시에서 가장 속 깊은 표현이자 또한 마음이 숙연해 지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아버지들이라면 누구라도 어느 대목에서는 한번쯤 어나올 수 있는 말이다. 아니,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마지막 말이 참 감동적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작가의 생명줄하고 연관된 시적 대상에서 우러나온 말이라서 감동이 더 깊다.

  

  

  

  

  

  

6).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눈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그렇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나는 엄숙히 선언한다

통조림을 믿지 말라 그 속엔 아직 정체가 안 밝혀진

맹독이 숨어 있어 언제 뛰쳐나와 우리를 꺼꾸려뜨릴지 몰라

그래 마늘과 고춧가루를 뿌려 펄펄 끓여먹는 거다

일순

섬광이 번쩍 지나가고 짧은 탄식처럼 따뜻한 저녁식사는 끝났다

모두 평온하고 통조림처럼 무사한 저녁이 슈퍼에 많다

삶에 지치지 않은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시 제목이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순간도 꾸준히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을 꾸준히 살지 못하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을 것이다. 시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생동감 있게 하기위해 은유를 쓰고 문장을 뒤집는가 하면 제목을 선정하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인다. 지금 이시는 내용과는 조금 다른 제목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작가가 이런 제목을 붙힌 의도는 분명히 있다.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통조림은 싸다 /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시적대상인 통조림이라는 사물을 통해 시각과 촉각적으로 이미지를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겠다. 통조림은 주로 혼자 살거나 또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간단 요리로 먹는 음식이다. 정어리 통조림이 싸서 매일 정어리 통조림을 샀다는 화자, 거기엔 배움이 짧아서 고민할 이유 없이 그저 꾸준히 선택했다는 말이 있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이라는 말은 아마도 요즘 많이 배운 사람들은 통조림에 나와 있는 성분 표시에 따른 함량이나 필요한 영양분을 꼼꼼히 읽고 따진다는 말일 게다. 또한 배움이 짧은 사람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다른 것은 쳐다볼 겨를도 없이 그저 싼 것만을 고집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젓가락질이 늘어진다는 말. 맨날 먹어서 물리고, 맛도 없어 깨작깨작 해진다는 말일 게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아무리 먹기 좋아도 한두 번이면 싫증이 나는 게 음식인데 하물며 밍밍하고 니글니글한 정어리 통조림이야 오죽하랴. 그런 중에 혹시 또 무슨 맹독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염려도 해보는 화자. 그러다가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어 펄펄 끓여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 속이 환해진다. 끓여서 먹으면 균은 다 죽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삶은 참 고달프다. 너 나 없이 똑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더 고달프고 덜 고달픈 삶이 있다. 꾸준히 살든 안 살든 종내는 모두가 정착지에 도착한지만 기왕이면 우리는 꾸준히 살아야 한다. 그런 게 세상에 대한 예의이고 자연에 대한 예의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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