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순간마다 몇 만년의 걸음, 을 읽고… |
2006-06-06 |
순간 순간 마다 '몇 만년의 걸음', 을 읽고….
나날이 더워지는 요즈음,
유봉희 시인의 ‘서늘한 열정의 발원지’인 눈발 쏟아지는 세상 은 산뜻한 청량제가 됩니다.
또한 다람쥐 체 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우주적 시간의 무한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유봉희 시인, 시집의 특징으로는 이국땅에서 만난 낯선 장소,
혹은 낯선 사물의 이름들이 모국어로 지은 詩의 집에서 손때 묻은 가구들과 함께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 일 것입니다.
시의 소재로서 자연스럽게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고 표출하는 역할에 어색함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 시인의 뛰어난 언어 구사력과 함께 삶의 현장에서의 실제 체험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게는 아직 점박이돌 속으로 눈 내리는 고향길을 시인의 행보를 따라 걷던 기억이 잔설처럼 남아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환하고 따뜻하게 고향 밤의 정경을 열어주어 그리움에 젖어들게하던 시, 「돌 속에 내리는 눈」의 감동이 생생합니다.
「돌 속에 내리는 눈」이 고향으로의 공간적인 이동과 초월로 시적 효과를 거두었다면 유봉희 시인은 이번 「몇 만년의 걸음」에서는 시간의 유한성을 해체합니다.
시인은 “발 아래 고즈넉이 앉아 있는 돌 / 둔덕에 구르는 뿌리 없는 나무통” 에서
몇 만년의 걸음을 읽어내고 “우리는 일초마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 걸음에 발을” 얹음으로써 그 아득한 시간의 연속성에 편승하게 됩니다.
다시 눈이 나리고 나려 유구한 시간의 역사성은 ‘반짝이는 숨죽임’과 동격이 됩니다.
실로 몇 만년의 시간이 반짝이는 숨죽임의 순간으로 풀려나며, 그 순간도 배후에는 역시 몇 만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거느리게 됩니다.
차분한 어조로 순간 속에서 영원을 짚어내는 시인의 감성과 예지가 돋보입니다.
돌이 소재가 된 작품으로 시,「재회」에서도 석양에 타오르는 돌탑을 보며 석등의 이미지를 도출해낸 전개 솜씨, 또한 눈여겨 볼 만합니다.
시인은 시에서 『광대소금쟁이 』를 “고인 물에 집 짓지 않고 /
흐르는 물살에 마음을 묶는 존재들” 로 표현합니다.
유봉희 시인 역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흐르는 물살을 따르듯 시적 대상에 접근해서 자유스럽게 묘사해나갑니다.
「포인트 메이크업」에서 뒷모습이 더 예쁜 열대어 한 마리를 그려낸 솜씨,
「고요한 멈춤」에서 온몸으로 태양을 품어 안은 이슬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때로는 어린 아이의 천진한 눈처럼 세상을 읽어내는 유봉희 시인의 시 속에서
자연이나 사물들은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모자라는 것도 제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그 존재 모습 그대로 보여지는 「바보 여뀌」를 읽을 수 있습니다.
콩나물을 기르는「싹눈 키우는 법」에서는 비교적 시인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목숨의 출발은 어둠이다” 에서 제 몸을 깨고 싹눈이 나오는
“깨어짐이 출발이다” 를 거쳐 “허울을 벗지 않으면 새 싹을 키울 수 없단다” 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인간의 성장 과정 뿐 아니라 詩에 이르는 길, 학업을 성취하는 길, 등 모든 인생의 길을 여는 공통 분모로 확대됩니다.
「저, 항아리」에서는 “때때로 목숨을 던져서라도 / 속어둠을 확 깨 버리고 싶은 적이 있을까” 라며
시인의 감정이 격해지는데, 시를 읽는 제 마음 꼭 이와 같아 정말 속울음 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런데, 항아리는 비어있을 때가 가장 항아리답다고 합니다.
항아리 속의 어둠이 빈 항아리를 가장 항아리답게 지켜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속울음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시간으로 뿌리 내리며 깊어집니다.
이제, 시인의 시야는「몇 만년의 걸음」을 거쳐 더 넓고 깊게 우주로 까지 확대됩니다.
여치 한 마리의 죽음에서 「820광년, 폴래리스」를 보아내고 「화성으로의 산책」까지 나갑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시인은 광대소금쟁이처럼 우주 스키라도 타며 보아낸 중심점이 여러 개인 자연의 모습을 지구에 송신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동안 둔해진 더듬이를 손보아 쭉 뽑고 그날의 교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순간 순간 마다 '몇 만년의 걸음', 을 읽고….
- 글 : 주경림 jookyunglim@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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