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10 시의 매직, 삶의 매직 … 안차애

2014.05.21 23:00

유봉희 조회 수:657 추천:4

Focus 10 유봉희 시집 『몇 만년의 걸음』 / 시의 매직, 삶의 매직…

유봉희 시집 『몇 만년의 걸음』 ·   시의 매직, 삶의 매직

  Eu, Bonghee's Focus

제 목  
    유봉희 시집 『몇 만년의 걸음』을 읽고…   글 · 안차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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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매직, 삶의 매직

 름 휴가차 가족들과 제주도에 다녀왔다.
학교 방학 준비와 직원 워크숍, 개인적인 보고서 만들기 등으로 한두 주일
정신이 쏙 빠지게 바쁜 날들 직후였다. 작은 배낭에 유봉희 시인의 새시집
『몇 만년의 걸음』(문학아카데미)을 넣고 다니며 한라산의 윗세오름도
오르고 거친오름이나 절물오름 등에도 오르내렸다.
제주의 크고 작은 오름들은 그 동그란 치마폭에 삼나무 구상나무
느릅나무 등의 숲을, 엉겅퀴 설앵초 산구름용담꽃들을, 유지매미
장수하늘소 등의 크고 작은 동식물 식솔들을 자란자란 거느리고 있었다.
땀으로 절며 습지나 계곡을 걸어낸 다음 맞이한 한라산 윗세오름 길의
평원은 아름다웠다. 백록담에서 마중 내려왔을 얇은 비안개와 젖은
바람 속에서 시인의 시 몇 편을 다시 읽었다. 집에서 건성 읽던 때와는
다른 느낌, 다른 맛이 났다. 그랬다. 시인은 늘 쉬지 않고 간단없이
크고 작은 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북청색 하늘을 한 획으로 자르며
날아 오른 록키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름차거늘
너를 가까이 만져라도 본다면
나는 분명 화상을 입을 것이다.

―「록키에게」 부분

저 산의 높이가 허공의 손짓만은 아니다
잉걸불로 솟던 한때
이제 오랜 멈춤인 저 높이가
어느 서늘한 열정의 발원지를 건드렸는지
눈발, 무진무진 쏟아진다.

―「몇 만 년의 걸음」 부분
시인은 오름을 오르기 전 미리 바라보고 서성이며
그 아름다움을 상상하기도 하고 새롭고 먼 신성한 것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결국은 자신의 타박 걸음으로 그 오름을 걸어 오르기로 한다.
그것이 시인의 피의 당김이기도 하고 삶의 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름길을 걷다 질퍽이는 습지를 만나기도 하고 가로막힌 바위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암중모색, 길을 찾고야 만다.
아니 없는 길이라도 만들고야 만다.

산을 오르다 바위를 만났다.
자일도 없이 올라야 하는 바위
가능과 불가능을 잠시 생각한다
통과해야 하는 길이므로,
가능에다 동그라미를 친다
(…중략…)
바위의 지문과 내 지문이 섞인다.
온몸을 그의 상처에 댄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그의 틈과 상처를 내 것으로 품는다

―「동반자」 부분
시인의 첫시집 『소금화석』 첫 페이지를 여는 시가
위의 「동반자」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시인은 오름을 오르다 장애물을 만나면 그 장애물조차 ‘동반자’로 만드는
것이다. 통과해야 하는 길이라는 오름에의 의지가 뚜렷할 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읽고 그의 상처와 아픔을 알아내어 자신의 아픔으로
품어내는 맑고 순정한 시선이 끊어진 오름길을 다시 잇는 것이다.
시인이 일궈내는 시의 매직(magic), 삶의 매직인 것이다.
시인이 한결같은 보폭으로 나날의 오름길을 걸어오를 때 시인은 그 길에서 수많은 도반들을 만난다. 시인에게 위로와 어여쁨을 선사하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동병상련을 느끼게도 하는 크고 작은 생것들이다.

광대란 제 몸무게를 잊고 뛰는 존재들이겠지
고인 물에 집 짓지 않고
흐르는 물살에 마음을 묶는 존재들이겠지
―「광대소금쟁이」 부분

3센티 길이의 더듬이가 더듬던
낯설고 차가웠을 너의 세상을
어차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820광년, 폴래리스」 부분

불빛 환한 내 창문까지 먼 걸음
안간힘을 쓰다가 놓아버린 작은 몸
작아도 온 몸, 온 힘으로 소리쳤을
문 좀 열어요, 창문 좀 열어줘요
―「서릿발 소리」 부분

발아래 고즈넉이 앉아 있는 돌
둔덕에 구르는 뿌리 없는 나무통도
몇 만 년의 걸음이라니
―「몇 만년의 걸음」 부분

산책길에서 만난 광대소금쟁이, 창가로 찾아온 여치 한 마리,
환절기에 동사한 무당벌레 한 마리, 산길에 함부로 차이는 돌 하나
나무둥치 하나까지도 시인은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각자의 생의 오름길에서 제 깜냥으로 최선을 다하며
한 생을 살아내는 안타깝고도 유정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오름길은 일반인들의 오름길과는 다르다.
시인의 오름길은 교감의 오름길이요, 꿈과 추억의 오름길이요,
지상과 일상의 오름을 넘어 경계 아득한 우주적 마음자리로까지
나아가는 오름길인 것이다. 시인에게 걸어오른다는 것은
구도에의 길과 흡사하다는 것을 아래 시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깊은 우주의 숲을 헤쳐 갈 것이다
멀어져 가는 붉은 별들아
다가오는 푸른 별들아
무한한 크기와 깊이의 감성에게로
우리를 닿게 해 다오

―「최후 교신 후, 2003년 2월」 부분

앞으로 시인이 걸어 나아갈 오름의 경계를 우리는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시의 내일이라는 오름을 향해, 시의 새로움이라는 오름을 향해
걷고 또 걸을 것을 믿을 뿐… 간단없는 장도를 축복할 뿐….

♣ 글 : 안차애(시인) / 200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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