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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나요?

 그러면, 우리 사랑 어떻게 피어나지요?

 아기도, 새 잎도 모두 아픔 속에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이 아파트에 1년 넘게 살았어도 올리브 나무 뿌리가 이렇게 혹뿌리인 줄 몰랐다. 신기해서 쳐다 보니, 놀랍게도 여기저기 새 잎이 돋고 있었다. ’눈물 속에 피는 꽃‘도 아닌데 왜 이리 울컥한가.
 밑동을 비집고 나온 새 잎은 그저 하나의 잎이 아니었다. 굳은 표피를 뚫고 피어난 생명의 꽃이었다. 아기가 “으앙!”하고 터뜨리는 태고의 울음소리였다. 둥치를 올려다 보니, 거기서도 상처난 자국마다 새 잎이 돋아 났다. 아픔 속에 피는 꽃, 사랑의 잉태다.
 젊은 날, 내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지나칠 정도로 배려가 깊었다. 깊은 눈매의 그는 내 얘기를 잘 경청해 주는 따스한 사람이었다.
 어느 가을날, 함께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았다. 주변은 가을색으로 물들어 아름답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대화도 파스텔톤처럼 부드럽게 흘러갔다. 대단한 주제나 사랑 고백이 없어도 그냥 좋았다. 얘기 중에 그가 말했다. 자기는 그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고. 그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아픔을 주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서로 아픔을 주고 받으면서 함께 성숙해 가는 거지요.” 그에게 동의를 구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은 신념처럼 굳었다.
 “저는 단지 기쁘게 해 주고 싶어요.” 그가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누가 그 마음을 모를까.
 “하지만… 좀 자유로왔으면 좋겠어요. 자기를 틀에 가두어 옥죄지 마세요.“ 내 말은 진심이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은 서걱거렸다. 떨어진 나뭇잎이 발 아래 모였다 흩어졌다. 물기 없는 낙엽은 바삭 부서져 버릴 것같아 밟기도 조심스러웠다. ‘낙엽 밟는 소리’는 낭만이 아니라, 생의 종언이요 절규가 아닐까 싶었다. 조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부대끼어 살면서 어떻게 아픔을 주고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사소한 것도 아픔이 되고 눈물이 되지 않던가. 나는 무색 무미 무취로 말간 증류수보다, 철분 마그네슘 등이 포함된 우물물이 좋다.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해하나, 자기 성에 갇혀 사는 게 내심 불안했다. 아이가 요람에 흔들리며 크듯이, 꽃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크듯이 우리 모두 흔들리고 부대끼며 살아 간다.
 소나무도 세월의 풍파 속에 휘어져 멋진 곡선을 이루고 절벽도 파도에 깎이어 절경을 이룬다. 긴 세월 속에 산은 둥글게 깎이고 강은 흙탕물 휘몰아치다 바다에 이른다.  바람이 불어야  풍경도 노래를 하고 인생에 드라마도 생긴다. 멋진 풍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저마다 아픔이 있다. 사랑도 그와 같지 않을까.
 도덕적 자기 한계를 짓고, 범생이 감옥을 짓는 일. 그 속에 갇히어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외려 상대방을 불편케 하고 불안케 한다. 나도 그에게 아픔을 주면 절대로 안될 것같은 조바심. 그러면 당장 내침을 받을 것같은 불안.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상처를 주고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만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오지 않았던가. 기대치가 높은 만큼, 섭섭한 것도 있고 사소한 것도 상처가 될 수 있다.
 누군들 일부러 아픔을 주고 싶으랴. 살다 보면, 아픔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 ‘Big Love’라면 그것까지 수용하고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는 ‘잠수’가 전문이다. 자기가 좀 부족하다는 자괴감에 빠지면 소식을 딱 끊어 버리고 ‘잠수’를 탄다. 다시는 안 볼 것같은 냉기가 흐른다. 잠수는 종종 해를 넘기기도 한다. 공황장애 있는 나에겐 사약이라 해도 소용 없다.
 이럴 땐, 사랑 때문에 겪는 감정소모가 너무 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Out 시키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본다.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변덕스런 우리에게 준 신의 은총이다.
 누군가 나를 삭풍이라 할 때 미풍으로 봐 준 사람.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지는 거’라고 가르쳐 준 사람. 조금만 삐쳐도 가차없이 잘라 버리는 All or Nothing의 내 성격을 받아 준 사람. 그는 내가 설령 화분을 부순다 해도 부순 조각을 일일이 다시 맞추어 올 사람이다. 아니, 거기에 꽃까지 심어 올 사람이다. 쉬이 포기하기에는 연륜과 그동안 내게 쌓아 놓은 사랑의 크레딧이 너무 두텁다.
 화가 나다가도 ‘그래, 남들 못하는 진한 사랑 한번 해 봤으면 됐지, 뭐.’하며 아리랑 고개 열 두고개를 넘는다. 기다림은 계산 없는 사랑이다. 사랑의 산술법은 세상의 계산법과 많이도 틀린다.
 누군가 사랑은 결심이라 했다.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그와 때로는 아픔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나. 두 사람 사랑은 시이소오를 타면서도 강처럼 푸르렀다. 태평양 사이에 두고 지구의 동서로 갈라질 때까지 사랑의 밀물 썰물은 모래톱을 훑고 갔다.
 고국을 떠나오기 전날 밤, 서로의 행운을 빌며 일곱 번 째 택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왕이면 멋있게 헤어지고 싶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묻힌 두 그루 나무처럼 말이 없었다.
 한 대 두 대… 택시가 지나갔다. 시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돌계단에 주저 앉아 무릎을 묻고 울먹였다. “아무 것도 해 준 게 없어요!“ 잊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옥죄던 자괴감. 그게 터져 버렸다. 죽음 다음으로 멀다는 미국. 신앙 속에서 만나자는 이별사는 자못 비장했다.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 왔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기다렸던 Lucky Seven 일곱 번째 택시가 왔다. 백 미러로 보이는 그의 뒷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멀어져 갔다. 그건 긴 이별을 예고하는 하나의 은유였다. 그때 우린 젊었고 어렸다.
 아픔 속에 피는 꽃. 기다림 속에 커 가는 나무. 오늘, 올리브 나무 둥치를 비집고 상처마다 피어난 새 잎을 보며, ‘아픔 속에 핀 꽃‘ 내 아린 사랑을 떠올렸다. 연푸른 하늘엔 일 없다는 듯, 흰구름만 무심히 흘러 간다.
(12172023) 
 
( 장소 : Citron St. Anahe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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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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