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함께 가는 길

2020.04.28 15:37

서경 조회 수:37

함께 가는 길.jpg


여기, 두 길이 있다.
나란히 사이좋게 함께 가는 흙길이다.
곡선의 미가 강물을 닮아 있다.
그의 가슴은 누구나 밟고 가라는 듯 열려 있다.
그 길 위로 때로 바람 불어 흙먼지 일고 낙엽 뒹굴다 간다.
가끔 빗님 오시면, 젖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길은 견딘다.
어떤 사람은 오고 나는 간다.
어떤 사람은 걷고 나는 뛴다.
가벼운 목례만 나누고 우리는 갈 길을 간다.
미닫이 여닫이 문처럼 뒷모습인 채, 제 방향으로 멀어져 간다.
돌아보지 않는 한, 서로 다시는 볼 수 없다.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다.
같은 지구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살고 있어도 이렇듯 스쳐 가는 인연이 있고 눈부처로 눈동자에 새겨지는 사람도 있다.
날 기억해 줄 사람과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혹은 한 쪽은 기억하고, 한 쪽은 잊고 사는 인연도 더듬어 본다.
이름 석 자 생각나는 친구도 있고, 잃어버린 싯귀처럼 한 자가 가물가물하거나 성조차 생각나지 않는 친구도 있다.
좀더 눈 여겨 봤더라면,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사귀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올라 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본다더니 후반생 인생이 되니 이런 후회도 생긴다.
길을 걷거나 뛰다 보면,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큰 바윗돌이 세월의 풍화 작용에 의해 모래가 되고 흙이 되는 시간의 장엄함을 깨닫는다.
거기 비하면, 우리 인생 백 년이라 해도 터무니 없이 짧다.
수령 긴 고목보다 짧은 인생, 저 위에 계신 분에게 항의라도 해야 하나.
아서라.
짧은 인생이기에 더 귀한지도 모른다.
행인들의 발자국을 보면, 그 삶의 크고 작은 문수도 같이 보인다.
내 기본 문수는 5.5.
앵커는 6.
롱 부츠는 6.5
런닝 슈즈는 7.
5.5 문수라면 여자로서도 작은 발이다.
나는 이 발로 참 먼 길도 걸어 왔다.
대체로 자세 바르게 걷는 또박 걸음이지만, 눈 위에 걸을 때  처럼 흩어진 발자국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실수에서 배우고 또 궤도 수정을 한다.
이 세상 누가 “내 평생 바른 길만 걸었다!”하고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도 너무 완벽하면, 증류수처럼 무색 무취 무맛이다.
가끔 잔모래 딸려 올라 와도, 마그네슘 칼슘 듬뿍 든 우리 고향 반새미 우물물 같은 사람이 좋다.
‘티가 있어야 진짜 옥’이란 속담은 나같은 반또디기 한테는 여간 큰 위안이 아니다.
가끔, ‘티가 많은’ 진짜 옥을 만나면 ‘아이구, 그래, 너가 진짜옥이면 나는 티가 따따불이니 진짜 진짜 옥이네?’ 하고 마음을 다스린다.
그러면, 기분 하나도 나쁘지 않고 금방 풀린다.
내 인간 관계 처술의 하나다.
나란히 함께 가는 흙길을 보며 상념에 잠기느라, 같이 달리던 내 동료 엘렌씨하고 너무 멀어졌다.
아이구야, 초행인데 길 잃을라 빨리 가서 따라 잡아야겠다.
내 상념의 오솔길을 눈으로 따라와 준 벗들을 위해 김기림의 <길>을 선물하련다.  
 
- 길/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 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내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 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 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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