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떠나가는 배(수정)

2016.05.31 15:39

서경 조회 수:448

 떠나가는 배 1.jpg


   가곡 <떠나가는 배>가 박목월 시인의 비련(혹은 불륜)에 관계 되는 노래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왕관은 아니지만, 거기에 버금 가는 자신의 명예와 바꾸면서까지 사랑하는 여제자와 제주도로 도피행각을 했다니, 그 용기가 놀랍다.    
대체로, 욕망이든 사랑이든 자의에 의해 사랑에 빠진 유부남들이 모두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막상 일이 터지면 갈등을 느끼면서도 끝내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서히 추억이란 이름으로 잊어간다. 
  이것이 보통 남자의 연애법이요 일반적인 불륜의 속성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허약함이나 인간적 비겁함이 있기에 그나마 가정이 뿌리 채 흔들리지 않고 지탱되어 가는 걸 보면 이해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순정파 목월처럼 불확실한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 후에 따르는 모든 비난과 불이익은 고스란히 본인 몫인데도 가수 임재범의 고백처럼 '벌'마저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거다. 오히려 이별의 징후가 보이는 불안한 사랑이기에 두 사람은 더욱 밀착한다.      그러나, 불륜이든 비련이든 이별은 오기 마련이다. 모든 사랑은 내부로부터 무너진다. 호기롭던 박목월도 두 사람의 생활비를 들고 온 현숙한 아내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강한 듯해도 사랑처럼 허약한 게 없다.

   목월은 제주도를 떠나기 위해 뱃길에 오른다. 난간에 무너지듯 기대어 서서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는 목월의 여인. 그 애달픈 모습은 지켜보던 목월의 벗 시인 양중해와 작곡가 변훈에게도 슬픈 풍경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때의 감정을 그대로 옮겨 불후의 가곡 <떠나가는 배>를 탄생시켰다. 
   감성적인 나도 잠시 사랑의 맹인이 된 적이 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떠나가는 배'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나는 자유로왔고 그는 아름다운 구속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꽃다운 나이 서른. 계획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건만, 언젠가부터 존경에서 사랑으로 바뀌어 갔다. 쓸쓸하고 고독해지는 게 그 징후였다.  
  사랑은 얼음 조각이다. 시간과 더불어 언젠가는 녹아내릴 아름다운 조각품이다. 하물며, 사회적 비난까지 감수해야할 ‘금지된 사랑’이 아닌가. 얼음 조각이 녹기 전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더 큰 불상사를  막고 상처 받을 여린 마음을 방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거리감을 넓히는 거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마침, 일이 재미있어 이민을 보류하고 있던 중이라,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는 옛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한국에 남고 나는 미국으로 왔다. 
  사실, 연애 감정이란 윤리나 도덕에 앞서는 '자연스런 감정'이기에, 대상만 만나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엔  남녀노소가 없고, 사회적 여건이나 지위 고하가 따로 없다.

   불륜 드라마가 비난을 받으면서도 인기리에 방영되는 것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동경이나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치명적인 위험을 넘어 황홀한 유혹이다. 게다가, 이 황홀한 유혹은 처처에 야생화처럼 피어 있다. 
   비련인가, 불륜인가.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내 눈에 눈물 나면 비련이요, 누군가에게 눈물 나게 하면 불륜이다. 이래저래 사랑은 눈물을 동반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남의 아픔을 딛고 피어나는 악의 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더 많이 울면 되는 거다. 그리고 시간은 기필코 손수건 들고 와 눈물을 닦아주기 마련이다. 
  애달픈 가사와 곡조에  비하인드 스토리. 그 위에 내 사연까지 겹쳐 가곡 <떠나가는 배>는 오늘따라 더욱 감성을 자극한다. 이민 초기, 산타 모니카 밤바다로 달려가 태평양 수평선을 바라보며 목청 돋우어 불렀던 나의 노래. 
  다시 산타 모니카 밤바다로 달려가 < 떠나가는 배>를 불러볼까나. 아서라. 환갑 진갑 다 지난 여자, 그것도 저음의 앨토가 테너곡을 부른다면 가던 갈매기도 놀라 돌아 보리라. 차라리, 목청 좋은 테너에게 한 곡조 청해 들어야 겠다. 이젠,  추억 바랜 자리에 진정 애달픈 노래로만 남은 아름다운 가곡 <떠나가는 배>. 
  한줄기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바람이 불어야 우리 인생에도 노래가 나온다. 바람 자는 가슴엔 노래도 함께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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