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작은 잎새 한 장
2020.03.03 09:22
창가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던 봄날 오후.
거리엔 지나가는 이 하나 없이 한갖진 풍경이다.
모든 사물은 그 크기와 부피와 무게를 접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듯했다.
물소리 바람 소리는 사치, 도심 속 거리에 차량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절간 같은 고요 속에 마음도 평화로움으로 물들어 간다.
평화로움은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인가.
시간이 흐르자, 평화로움은 누군가 떠난 빈 방같은 외로움으로 자리 잡아 간다.
그때였다.
창밖 가까이 무언가 툭하고 떨어졌다.
작은 잎새 한 장!
바람이 쓸고간 흔적조차 없는 거리에 잎새 한 장의 낙하는 고요를 깨트렸다.
마치, 잠자는 공주를 깨운 왕자의 입맞춤처럼 마술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눈 반짝이며 깨어났다.
제 크기와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이 살아 나고 내 의식도 흥미로움으로 반짝인다.
창가로 몸을 기울여 잎새를 본다.
단풍은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이름인 듯, 색깔 바랜 옷 한 벌 걸치고 그는 누어 있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겨울 나무 잎새였던 모양이다.
고 작은 몸체를 스쳐간 계절을 생각해 본다.
봄날의 파릇함과 여름날의 푸르름과 가을날의 화려함을.
그리고 모든 색과 이야기를 한 몸에 함축하고 있는 겨울날의 마지막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미련이 있어서 마지막 가지를 여지껏 붙들고 있었다고 수군댈지 모른다.
진실은 그게 아닌데...
얼마 전에 슈가맨 양준일이 한 말처럼,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하지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것은 세상사 성공이나 화려한 복귀가 아닌데...
바로 그거다.
By His Plan, In His Time!
모든 것은 그 분의 계획하심 하에, 그 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다림은 우리 인간의 몫.
순명도 우리 인간의 몫.
우리는 그 분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충실히 살아가면 그 뿐.
비록, 거리 한 귀퉁이에 쓰러져 누운 홈리스 같이 보잘 것 없이 보여도 저 잎새는 소임을 끝내고 대지의 품에 안겼다.
돌아갈 땐, 악한 이나 선한 이나 다 대지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끝내는 그 분 앞에 서게 된다.
오른 쪽으로 갈 지 왼쪽으로 갈지,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 분이 가리킬 손끝 방향은 알 길 없다.
다만, 주님께서 앉혀주신 이 자리에서 그 날 그 시간을 종종 그려보는 거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를 추스려 보는 거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작은 몸체의 잎새 한 장.
그도 그림자를 지닌 실체다.
때로는 투명인간처럼 제 존재의 값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살아온 날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기 엄연한 실존의 모습으로 누어 있다.
그의 종언은 당당하다.
I am I.
I am here now.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
죽어서 말 하는 이가 어찌 국군 뿐이랴.
잎새의 그림자가 증언자요, 그를 보는 나도 증언자다.
한 줄기 바람이 쓸고 가든지, 누군가 밟고 가 부스러지든지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내 눈 앞에 있고 나는 그를 본다.
그는 아마도 양준일처럼 속울음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제가 보여요?” 하고 내게 묻는 듯하다.
고요를 깨고 한갖진 풍경 속으로 들어 온 작은 잎새 한 장.
나는 그를 눈부처로 새겨 두려고 오래 눈맞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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