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활절 삽화

2022.04.17 22:32

서경 조회 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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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절 아침이다. 멀리 한국에 있는 가톨릭 문우로부터 멋진 부활 축하 영상을 받았다.  
  달걀 세 개가 놓여 있고, 어디선가 붓 한 자루가 날아 와 재주를 부리기 시작한다. 마치, 하늘나라에서 내려 온 요술 빗자루 같다. 하얀 달걀에 삼색 파스텔 칼라를 칠한 뒤,  달걀 머리를 톡톡 치자 샛노란 병아리가 쏙 나왔다.
  톡톡. 다른 색달걀을 치니, 거기서도 병아리가 날개를 털며 나온다. 톡톡. 나머지 달걀 속에서 튜울립꽃이 피어나고 연이어 붓 닿는 곳마다 색색의 꽃이 피어난다. 부활의 꽃, 하얀 백합꽃도 빠질 수 없다.
  무슨 일이래? 호기심 많은 토끼가 귀 쫑긋 세우고 쪼르르 달려 나와  두리번거린다. 샛노란 병아리 친구가 삐악거리고 주변은 온통 꽃동산이다.
  요술 부리던 빗자루가 잠시 장난이 동한 것일까.
이때쯤 일필휘지하여 한 마디 쓸 만한데 붓을 멈춘다. 토끼는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며 더욱 호기심 찬 눈으로 붓끝을 쫓고 있다.
  이런! 토끼도 나도 기다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여기서 붓은 멈추고 동영상도 끝났다. 글쎄, 붓글씨가 쓰려던 한 마디는 무엇이었을까.
  멀리, 하늘을 보니 구름 속에 예쁜 하트가 그려져 있다. 아하, 그것으로 알겠다. 예수님이 유언으로 남기신 ‘사랑’ 그 한 마디, 하늘에 새겼구나! 문득, 전해져 오는 삽화같은 짧은 얘기가 생각 났다.  
 
  한 마을에 두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종족은 맨날 한 우문을 가지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쪽은 닭이 먼저라 하고 또 다른 쪽은 달걀이 먼저라 우겼다.
  어느 날, 한 현자가 그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두 종족은 현자에게 달려가 이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했다.
   - 닭이 먼접니까, 달걀이 먼접니까?
현자는 미소 띠며 말했다.
  - 이보게, 닭도 먼저 아니고 달걀도 먼저가 아닐세!
  - 네? 그럼 뭐가 먼저인가요?
  - 그건 사랑일쎄!
  - …….
  두 종족은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두 종족은 다툼없이 사이좋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정말 현자다운 답이다. 사랑 없이 어떻게 한 생명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나도 현자한테는 졌다.
  나는 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우문을 들을 때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닭이 먼저’라고 답했다. 그 근거는 자못 신앙적인 것으로 창세기에서 찾았다.
  -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은 애기로 오셨냐, 어른으로 오셨냐?”
  이 한마디로 입막음을 해 왔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니 거기서 답을 찾으면 된다.
 ‘사람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면벽수행하는 스님들이 평생을 물고 늘어지는 이 화두도 우리는 1초도 안 걸리고 답할 수 있다. 성경에 답이 있으니 너무 쉽다.
  -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가지!
  - 죽는 걸 다른 말로 돌아간다고 하니,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거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 문제도 마찬 가지다. 철학자가 하루종일 목을 외로 꼬고 묻는 ‘존재의 의미’도 우리 믿는 이에겐 참 단순한 문제다. 영세 교리 문답 88문 중 첫번째에 그 답이 나와 있다.
  -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느뇨?
  - 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삽니다.
  어떻게 영광을 드러낼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받은 달란트가 있다. 그것으로 섬기면 된다. 거기에 무슨 경중이 있으랴.
  난 신앙을 맷돌처럼 무겁게 지고 가고 싶지 않다. 기쁜 마음으로 메고 가고 싶다. 내 삶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알았어예! 또 무슨 좋은 걸 주실려고 이 고통 주시지예?” 하고 넘어 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보름달만한 고통도 겨자씨만큼 작아지는 거였다.  어린 아들을 잃었을 때도, 사춘기 딸이 집을 나갔을 때도 이 공식을 대입하며 견뎌 냈다.
  모든 건 ‘By His Plan, In His Time’인 것을 배웠다. 내가 아등바등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안 일어났으면 싶은 일은 그분께 의탁하는 길밖에 없다. 손흥민 아버지 말처럼 ‘시련은 실패가 아니다. 경험이다.’
  십자가는 모양새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무게는 똑 같다고 한다. 같은 일이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노동이 될 수 있고 놀이가 될 수 있다. 이왕,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라면 불만없이 지고 가겠다는 거다.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놓고 요단강을 건너 가야 한다면 버릴 수도 없는 일. 길다고 짤라 버릴 수는 더더욱 없는 일. 십자가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가교다.
  십자가의 경중은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일 게다. 성경 말씀 중에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것도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동사다. 나는 형용사보다 동사의 힘을 믿는다.
  이런 낙천적인 신앙관, 즉 믿고 보는 신앙관이다 보니 종종 미지근하다는 질책도 받곤 한다. 하지만, 어쩌랴. 신앙도 체질이 있고 자기에게 맞는 코드가 있다.
  내가 만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 이렇게 체질로 굳어져 버렸다. 두려운 분이기는커녕, 우리 아버지처럼 앞에서 재롱도 부릴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다.
  실지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태몽을 통해 나를 ‘옥황상제 딸’로 인정해 주셨다. 어머니가 임신하신 지 5개월 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신기한 태몽을 꾸셨다.
  천사들과 함께 무지개 다리를 타고 내려 온 옥황상제가 “이는 내 딸이니 잘 길러라!”하며 강보에 싼 아기를 안겨 주셨다. 불교신자였던 아버지에겐 하느님이 옥황상제였다.
  태어나고 나서야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옥황상제가 하신 말씀을 믿고 딸이라고 확신했다. ‘옥황상제 딸’이란 의미를 가진 내 이름 ‘희선’이도 ‘딸 희’ ‘신선 선’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지어 놓으셨단다. 다섯 살 때 들었던 내 탄생 비화가 먼 동화 속 이야기 같이 신기해서 눈만 깜빡였던 기억이 난다.
  분명 나도 미션을 받고 왔을 터인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나의 미션이 뭔지 아리송하다. 아직 안 온 건지 이미 지나간 건지 알 수 없다. 아니면, 내 그릇이 작아 감당치 못할 큰 미션은 주시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저, 소소한 일상 속에서 기쁨과 나눔의 삶을 사는 게 내 미션인가 싶기도 하다.
  신앙을 지키기 어렵다는 건,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천의 어려움 때문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자고로, 사랑없이는 닭도 달걀도 없다. 유정란이든, 무정란이든, 레드 락이든, 아메리카노든 닭 종류에 관계없이 일단 ‘사랑’이 전제 되어야 생명은 잉태된다.
  부활절 Easter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Eostre에서 유래됐다고 전해 온다. 부활절 상징물로 달걀과 토끼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한다.
  부활절이 오면,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교훈을 배운다. 미사 중에 가장 감격스러운 미사, 부활성야 미사를 통해 우리는 암흑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그 관문의 하나로 우리는 촛불을 켜고 옆사람에게 전한다.
  이 의식을 통해, 혼자만 갖는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수평적 나눔을 갖는 참기쁨을 맛본다. 촛불 하나의 힘은 약하나, 수 천 수백 개의 촛불은 강하다. 부활 상징 영상을 보며 물질의 풍요와 다산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누군가의 목숨과 맞바꾼 사랑. 그 사랑으로 우린 오늘을 살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평생 화두로 삼아야할 신앙인의 소명이다.
  죽음같던 40일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 성야를 거쳐 맞이한 부활 아침! 꽃은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창을 갸웃대는 팜트리는 잎을 너울거린다.
  갈갈이 찢겨진 그 잎새 위로 햇빛 얹히고 바람은 잎을 흔들어 금빛 가루 뿌린다. 은총처럼 쏟아지는 금빛 폭포수! 빛의 환희다. 상처 받은 사람일수록 환희의 신비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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