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조 - 풍경소리 고*

2007.09.20 00:31

지희선 조회 수:491 추천:62

1
유타주 구리산을 넋 놓고 바라보다
기념으로 사 온 풍경 소리 한번 곱고 맑다
다정한 이웃 끼리 서로 살 부비며 내는 소리

2
가끔은 멀리 있어 그리움에 떨어도
더러는 설운 이별 사랑을 키워요
오늘은 침묵을 지켜 그대로만 있어요

3
조고만 바람에도 살을 베는 아픔이여
텅 빈 마음 풀어 헤쳐 울어 봐도 좋으련만
인고에 길들인 가슴 겨울 나무 됩니다

4
창공엔 흰구름 강물처럼 흐르고
새들은 포롱포롱 녹음을 즐기는데
웬일로 서러운 마음 풍경으로 웁니까

5
스무날 하현달은 자꾸만 여위어 가고
어둠은 적막을 불러 별빛마저 아득한데
이 한 밤 불 꺼진 창을 우는 이여 누군가

6
꽃도 벙글고 나면 시나브로 떨어지고
그대 향한 그리움은 팜트리로 흔들리나
이 밤도 가슴을 밟고 오는 너의 소리 풍경 소리

7
팔랑이는 잎들이 비늘 되어 떨어진다
떨어진 비늘 밟고 가을은 구을며 가고
처마 끝 구리 풍경이 날 흔들며 울고 있다

8
우주의 법문인가 자연의 설법인가
합장 하고 듣는 말씀 가슴 안 풍경 소리
천 년을 휘돌아 와도 여울짓는 그대 목소리

9
네 마음 수초처럼 바람에 흔들릴 때
내 마음 사랑병에 이 밤을 앓고 있다
삶이란 흔들리고 앓으면서 조금씩 커 가는 것

10
여미고 동여 매어 꼭꼭 숨긴 마음인데
뉘신가 옷 섶 풀어 닫긴 빗장 여는 이는
후두둑 여름 소나기 파초 잎을 훑고 가네

11
팜트리 머리 풀어 하늘 향해 울부짖고
풍경은 제 몸 때려 가는 님 길 막는데
무심한 섣달 바람은 님 휘몰아 달아나네

12
뉘 손길 기다리며 천 년을 견뎌 왔나
한 풀리어 맞는 아침 햇빛 더욱 찬란타
엎디어 숨 죽인 세월 목청 높혀 증거하라.


- 1998년 < 현대 시조 > 봄호 신인상 당선작 -

* 당선 소감*


   지금 창 밖에선 구리산에서 사 온 풍경이 맑고 고운 노래로 날 불러낸다. 수 천 피터의 지하 광맥에 묻혀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구리 풍경. 긴 기다림과 인고의 자세가, 끙끙 대며 하얗게 밤을 지새는 내 모습 같기만 해 더욱 애정이 간다.
   속을 비웠기 때문일까. 사운대는 잎의 속삭임 같이, 크진 않으나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 길고 짧은 여섯 개의 가는 몸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너무나 청아하다. 나도 맑고 고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마음 비우는 작업부터 해야 겠다.
   수필만 고집하다가 시조 세계에 입문한 것은, 전적으로 미주 지역 시조 보급의 대부이신 김호길 선생님 덕분이다.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 구리산:유타주에 있는 거대한 구리 광산으로 관광 명소임. 거기서 사 온 '구리 풍경'을 처마 끝에 걸어두고 혼자만의 사유를 즐겨 왔음. 위 시조는 거의 일 년에 걸쳐서 쓴 것이기에, 연시조 형식은 빌려왔으나 연시조 처럼 일관성 있는 주제로 끌어온 것은 아님. 그때 그때 단상을 읊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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