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두 나무 이야기
2018.05.01 04:31
새벽 기도회를 끝내고 동생이랑 교회 정원을 산책했다.
대학 캠퍼스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특히, 담벼락을 타고 줄지어 피어 있는 쟈스민 꽃향기는 오래도록 내 발길을 붙들었다.
얼마를 걸어 갔을까.
잔디밭 곁으로 몸체가 통째로 잘린 두 나무가 보였다.
죽은 나무라 잘랐는지, 필요 없어서 잘랐는지 모르지만 거의 같은 높이로 잘린 나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한 나무는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죽은 듯 있는데, 다른 나무는 생명의 푸른 잎들을 피워 싱싱하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본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어째서, 같은 땅에 같은 키로 잘린 두 나무가 하나는 기척이 없고, 하나는 푸른 생명을 노래하는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은유가 아닐까.
잘림은 두 나무에게 똑 같은 절망이나 좌절이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다르다.
똑 같은 땅에, 똑 같은 일조량에,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양의 물을 스프링쿨러로 받는 두 나무가 아닌가.
정원사의 사랑이 한 나무에게만 치우치지도 않았을 터.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뿌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두 나무가 내게 몸으로 보여주는 잠언을 듣는다.
"죽은 듯 좌절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힘찬 생명의 기운으로 살 것인가!"
"삶이란 결국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너의 몫이 아닌가!"
방금, 새벽 기도 시간에 듣고 나온 말씀은 귓전에서 맴도는데, 두 나무가 전해주는 말은 돌돌거리며 여울진다.
이사온 이후로, 아직도 새 터전에 마음 붙이지 못하고 하루 하루 시간을 '떼우고' 있는 나를 꾸짖는 것만 같다.
오늘만 해도, 동생의 간청에 못 이겨 새벽 기도회에 따라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앙생활에 난 너무 소극적이다.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외치며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간절함보다 기도가 너무 과하다 싶었다.
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묵상 기도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설교 시간에는 살풋 졸기까지 했다.
언니한테 해당되는 중요한 말씀이다 싶어 동생이 힐끗 쳐다보니, 바로 그 시간에 졸고 있더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서 똑 같은 '복음'을 전해 들어도 나는 죽은 나무요, 동생은 살아 숨쉬는 나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QT를 하며, 오늘 말씀 중에 와 닿는 게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제부 앞에서 난 선듯 입을 떼지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 도대체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였다.
제부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하자, 겨우 설교 예문 말씀이 떠올랐다.
마침, 목사님이 유명 애니메이션 출신이라 자기 경우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만화책 한 권을 완성하려면, 100 페이지 정도는 그려야 하고 한 페이지에 적어도 너 댓개 쪽지 그림이 들어가야 하니 400 내지 500개의 그림과 스토리를 짜 넣어야 한다고 한다.
영상 애니메이션은 작업이 훨씬 더 방대하다고 한다.
그림을 그려주길 기다리며 10000 장 정도의 흰 백지가 쌓여 있는 걸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단다.
'어휴- 저 종이에다 언제 그 많은 그림을 다 채워 넣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절로 흔들어지더라고.
하지만, 일단 시작만 하면 언젠가는 '꼭' 끝나게 되어 있더란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지 즐기면서 할 때 훨씬 좋은 결과물을 얻게 된다고 덧붙였다.
몇 년 째, 머리에 쥐가 내리도록 앱 계발에 열중하고 있는 제부한테는 큰 힘을 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같은 비를 내려줘도 자기 그릇 크기만큼 빗물을 받는다는 말과 같다고나 할까.
두 나무를 다시 보며, 죽은 듯 숨 죽이고 있는 나무에 덕담 한 마디 던져 준다.
"나무야! 너도 어서 기지개 켜고 일어나 네 꿈을 힘껏 펼쳐 봐!"
귀가 흘린 말, 눈으로 주워 담으며 또 하루를 연다.
동터 오는 새벽, 희부염한 하늘엔 새벽달 둥실 떠 있고 담벼락 끼고 핀 쟈스민 향기가 코 끝에 향긋하다.
마른 겨울 나무에 붉은 기운 돌듯, 정신이 맑아지고 빠졌던 기운이 슬슬 제자리를 찾아 든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 시기다.
잠자는 나를 깨워 일으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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