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한국의 에바 가드너

2020.04.10 22:29

서경 조회 수:40

에바 가드너.jpg



언젠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제 눈이 안경’이란 말이 나왔다.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왕년에 자기를 좋아했던 사람이 어느 배우랑 닮았다고 하더라는 ‘카더라 통신’이 나와 여기저기 웃음보를 터뜨렸다.
나도 빠질손가.
그 사람이야 잊었겠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장로교 고신파 교회에 다녀 맥주도 한 잔 안 마시던 고지식한 여대생 시절.
다방에서 만난 그는 무슨 말 끝에 나더러 에바 가드너를 닮았다고 했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뇌살적이기는커녕, 섹스 어필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나에게 왠 뜬금 없는 소리, 싶어 실소를 날렸다.
실소와 함께 그 말도 가물가물 잊혀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비유티 샵에 프랭크 시나트라 마지막 와이프인 바라라 시나트라가 왔다.
그때 문득, 프랭크 시나트라가 가장 사랑했던 연인이며 두 번 째 아내였던 에바 가드너가 생각났다.
동시에, 잊혀졌던 그 말이 떠올랐다.
거울을 보면, 에바 가드너 근처에 가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 말이 싫지는 않았나 보다.
‘야- 나도 왕년에는 ...’ 하며 은근히 동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바바라가 우리 가게에 오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에바 가드너 닮았다는 말도 더 자주 떠올랐다.
내 뇌는 서서히 세뇌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화장을 조금 진하게 한 날은 거울을 보며 ‘내가 에바 가드너하고 좀 닮았나?’하고 자문도 해 봤다.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혹 분위기라도 비슷한가 싶어 거울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 모든 남자를 눈빛 하나로 사로잡아 버리는 그녀를 닮다니!
그럼에도, 수다 타임에는 “나도 왕년에는 말야...”로 시작해서 어김없이 에바 가드너 이름을 들먹이게 된다.
당연히 친구들은 웃음보를 터뜨리고는 “야, 이거 한국의 에바 가드너 하고 같이 있다니 영광인데?”하며 놀려 먹는다.
요즘, 시간이 남아 돌아 가다 보니, 유투브로 뉴스를 보기도 하고 종종 고전 영화를 보기도 한다.
오늘 문득, 에바 가드너가 떠올랐다.
내친 김에, 에바 가드너와 비슷한 분위기 사진이 있나 싶어 옛사진을 들추어 봤다.
겨우 비슷한 분위기의 사진 하나를 찾아 냈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두가 아니라고 도래질 쳐도 한 사람만은 동의해 주겠지, 싶어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아니다.
어쩌면, “내가 그랬냐?”하며 머리를 긁적일지도 모른다.
바람처럼 날린 젊은 날의 립서비스인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저러나, 만날 길 없는 그에게 어떻게 물어 본담!
설령, 그런 말을 했다 해도 기억해 내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가 버렸다.
젊은 남성들이여, 아니 흰머리 소년들이여!
립 서비스라 해도 일단 덕담은 날리고 보시구려.
추억을 사랑하고 추억을 아끼는 여성들에게는 어줍잖은 그대의 말 한마디가 잊지못할 추억의 덕담이 되리니.
그로 하여, 잠시나마 희미한 미소 날릴 수 있다면 그대 또한 좋은 일 하나 하고 가는 셈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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