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막의 전설-김동원

2011.09.15 10:38

지희선 조회 수:453 추천:12







사막, 그 곳에 모래 이외에 더 무엇이 있으랴. 때문에 그말은 입 속에서 조용히 굴리기만 해도 모래가 씹힐 듯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사막에도 무늬가 있다. 카메라의 렌즈 속으로 빨려들어가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겨지면 그 무늬의 정경은 더욱 확연해진다. 모래알갱이의 밋밋한 광막함이 그 그림의 전부일 것 같지만 그러나 거기엔 무늬가 있다. 바람결이 그리고간 기하학적 굴곡의 미학이 그 속에 담겨 우리 앞에 다가선다. 사막의 모래가 그리는 파문은 우리들의 뇌세포를 자극하면서 그와 똑같은 문양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엷은 바람을 머금고 무늬지면 호수의 수면 또한 그렇게 하나의 섬세한 파문이 된다. 그 두 문양은 너무도 흡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혹 한날 한시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하는 의혹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리하여 두 문양에 대한 파문의 비교 미학이 시작된다.
호수로 퍼지는 잔물결의 미학적 형상은 움직이는 운동체의 모습이다. 그 문양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명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사막에 그려진 모래결의 파문 속엔 정지된 시간의 침묵이 무겁게 흐르고 있다. 호숫가 근처의 땅덩이를 조금 고르고 아무렇게나 꺾은 미류나무 가지를 땅속에 꽂아놓으면 신기하게도 그 가지는 뿌리를 내리고 다시금 푸르게 살아난다. 그러나 사막의 바람 속에선 단단한 육질의 바위덩어리도 자신의 존재를 끝내 지키지 못한다. 발갛게 녹슬어 부식되는 철괴의 힘없는 몰락처럼 바위덩어리는 잘디 잘은 모래 알갱이로 무너져 내린다. 같은 문양을 수놓은 자연이면서도 한쪽은 생명의 뿌리가 되는 근원으로서의 힘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고갈된 생명력의 여흔(餘痕)으로 다가선다.
사막은 생명의 존재에 대한 상상을 허용치 않는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 속에 그려진 벽화에서처럼 수천년 동안 정지된 시간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 어제와 오늘이 없으며 오늘과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막에선 시간과 더불어 거리마저 삭제된다. 여기가 저기이며 저기는 또한 여기이다. 멀고 가까운 원근법의 세계는 무력해진다. 시선이 어느 곳에 내려앉아도 그 끝에 묻어나는 것은 항상 똑같을 뿐이다. 사막은 색깔에 대한 고려는 전혀없이 단지 문양만을 신경쓴 성의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무성의를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리면서 훨씬 더 줏가를 올리는 작품이 있듯이 사막은 가진 것 이상의 난해성과 신비를 그 뒷편에 파묻고 다가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을 충동질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가 삭제된 세계에선 미래를 꿈꿀 변화의 공간을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없는 그 세계의 인간 삶은 전적으로 보수가 지배한다.
호수는 어떤가.
호수의 잔물결은 사막의 모래와 같은 문양을 그리면서도 거리의 미학을 간직한다. 물론 그것은 심리적 차원에서 감지되는 거리이다. 무엇까지의 거리인가. 미래라는 세계와의 거리이다. 길이는 얼마인가. 모르긴 하지만 희망이란 척도로 재기에 턱없이 먼 그런 거리는 아니다. 희망이란 척도로 재보면 항상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빛이 작아도 꺼지지 않고 존재한다. 사막엔 그 거리가 없다. 그래서 사막의 현실에선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어쩌다 사막의 한 구석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를 오아시스와의 만남도 미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어쩌다 보장되는 미래는 미래가 아니다. 사막 자체가 파기되고 그 모습을 바꿀 때 비로소 우리들의 꿈은 미래를 현실로 잡아 당긴다. 우리의 미래는 사막의 소멸과 함께 다가설 수 있다. 그래서 사막의 현실과 우리들의 미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거기엔 단절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절로 인하여 사막의 현실과 우리의 미래는 결코 화합의 길을 걷지 못한다. 우리들이 꿈꾸는 미래가 희망이란 거리를 무사히 헤치고 오아시스를 현실로 가져왔을 때 그 꿈의 현실 어디에도 이제 사막은 남아있지 않다. 그 꿈을 이룬 밑바탕을 뒤져보아도 사막의 현실은 잡히지 않는다. 사막의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선 꿈꾸는 미래와의 사이에 좁혀보아야할 거리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현실이 그대로 하나 변함없이 미래로 밀려간다. 그 자체의 소멸 이전에는 우리들의 꿈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독한 보수성이 사막의 속성이다.
그러나 호수는 호수 자체를 유지하면서 우리들이 꿈꾸는 미래를 현실로 가져온다. 아니 호수는 우리들의 미래 속에 필연적으로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호수의 주변엔 성숙을 꿈꾸는 생명의 얘기들이 그 미래를 지배한다. 어느날 우리들이 미래에 다달았을 때 우리들은 알게 된다. 그 세계를 이룬 저변에 호수의 물줄기가 스며있음을. 그렇듯 호수와 우리들의 미래 사이에는 연속된 하나의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사막이 가까울수록 그 거리는 사라진다. 그리하여 사막의 모래벌판 한가운데로 떨어졌을 때 우리는 미래와의 통로가 끊긴 단절의 현실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단절의 공간에선 어느 정도의 갈증과 어느 정도의 무더위를 운명처럼 겪으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가고 싶지 않은, 현실 그대로를 살아 모래알갱이로 무너져 내리고픈, 보수와 체념의 욕망이 파도처럼 우리를 뒤덮는다. 그저 근근이 살 수만 있다면 무더위와 갈증난 목을 피하여, 더나은 그늘과 더 시원스런 폭포수 물줄기를 얻고자, 육신의 피곤을 이끌며 사막이 소멸되는 우리들의 미래로 더더욱 발을 옮겨놓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운명은 불행하여 사막에선 우리들 인간이 살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을 근근히 이어줄 그 알량한 양의 음식과 불에 대해서 사막은 관대하지 않다. 그렇다고 사막을 지배하는 보수의 속성에 휩쓸려 몇 알의 모래 알갱이로 사라지기엔 우리들이 죽음 앞에 그렇듯 초연하지 못하다. 그래서 사막으로 놓여진 우리의 운명은 보장되지 않는 그 세계에서의 탈출을 위하여 한발 한발 끊임없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발걸음을 옮겨놓는 것이다. 거리가 삭제된 그 세계와 우리들의 미래 사이에 무슨 다리라도 놓을양 우리들의 걸음은 마치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이어진다.
어쩌다 사막에 불시착한 운나쁜 비행사나 겪음직한 예외적 현실이 아니다.
어느날 몰아닥친 삶의 건조무미한 바람결에 휩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송두리채 날려버리고 앞길이 아득한 사막의 현실에 버려진, 그 절망스런 경험이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한치의 미래도 꿈꿀 수 없는 암담한 삶의 운명에 부딪치고 한걸음 한걸음 마지못해 옮겨놓는 발걸음에 밀려 참으로 멀고 먼 거리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세월의 뒤안길이 우리를 사막의 소멸 가까이 가져다주었음을 자신할 수 없고, 앞을 보아 언제나 온 것의 수십배로 펼쳐지는 압도적 현실에서 더더욱 사막의 소멸을 단언할 수 없었던 비참한 경험이 그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누구에게나 그렇게 운명은 닥치는 것이리라. 보수의 욕망과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발걸음을 떼어놓아야 하는 사막으로의 불시착이라는 운명이.
그러나 운명과 더불어 함께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 사막에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습기진 미립자의 물방울 대신 건조한 모래알을 머금은 바람이 사각사각 이빨을 갈며 지나가고 수없는 낙엽의 몰락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태양볕의 화살끝이 한낮을 내내 뒤덮고 있는 곳, 그 사막에도 생명은 존재한다.
선인장(仙人掌). 신선의 손바닥? 이름처럼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사막의 불볕 더위와 한발 속을 여유롭게 서있는 선인장의 자태를 보건데 그 이름이 허울좋은 명목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름 풀이의 유희를 접고 진지한 시선을 기울여 찬찬히 살펴보면 선인장은 따가운 가시를 목마른 갈구로 내세우며 사막을 가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호수가를 사는 온대의 활엽수처럼 선인장은 맘껏 마시고 맘껏 내뱉지 못하기에 이파리를 날카롭게 갈아 가시로 가졌다고 했다. 아프게 제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를 키우면서 그것으로 생명을 조금조금 아껴둔다는 선인장은 사막에서 우리가 희망으로 삼을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간혹 지나가는 한 때의 소나기 줄기만 있더도 선인장은 사막의 모래 위에 발부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다. 호숫가의 나무들이 겨우 하루의 목을 축이는데나 만족할 그런 물줄기로 선인장은 일년을 달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한 목마른 갈증의 현실을 어찌할 수 없어 그 이파리 하나하나 모두가 가시로 변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또 하나.
뱀.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그곳을 살아 기어다니고 있다. 뱀은 물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특수한 신체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 뱀들은 무엇으로 목의 갈증을 달래는가.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먹고 산다. 제 살가죽에 맺힌 이슬 방울을 그 기다랗고 징그런 혓바닥을 뻗어내어 알뜰히 핥아 들이고 하루를 견딘다. 한컵으론 되지 않는다. 아마도 정확히 헤아려보면 수컵이 넘으리라. 그렇게 많은 물이 우리들의 생명을 보살펴 하루의 갈증을 식혀줄 때 뱀들의 하루 갈증을 식힌 것은 새벽녘에 내린 몇방울의 이슬이었다.
전설이 된다.
너를 만날 때의 나는 사막의 전설이 된다. 이파리가 가시처럼 따가운 선인장도 아니면서, 제몸뚱이의 이슬을 핥는 뱀도 아니면서 한때의 소나기와 이슬로 한달을, 하루를 견디기에 분명 그것은 전설인 것이리라.
생각을 일으켜 너를 떠올리면 사막으로 떨어진 그 아득한 절망의 공간 속에 갈증이 사라지는 한두 시간의 전설이 다가선다. 눈앞에 놓인 한장의 사진 속에서 얇게 압착되어 새겨진 너의 모습을 대하면 그 전설은 한나절을 간다. 옆으로 스치는 한갖된 순간의 네가 있는 날이면 전설은 그날 하루를 미끄럽게 미래로 밀고 간다. 두 잔의 커피향이 뒤섞이는 너와 나만의 공간 속에 마주 앉으면 미래로의 내 발걸음은 그 뒤로 한달여 사막의 전설을 쌓아 나간다.
너를 만나는 날 나는 사막 속에 피어나는 생명의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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