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입사해 처음 맡은 일은 편집이었다. 취재 부서에서 받은 기사의 경중을 판단하고, 지면을 레이아웃하고, 각 기사의 제목을 달아야 하는 일이다. 새내기에겐 모두 그렇듯, 일은 쉽지 않았다. 기껏 공들여 뽑은 제목이 데스크의 난도질을 거쳐 새 제목으로 바뀌는 일이 다반사였다.

편집부의 높으신 선배들은 술자리 때마다 "기사가 소설이라면 제목은 시(詩)다" "기사를 펜으로 쓴다면 제목은 붓으로 쓰는 글이다" "제목은 홍등가 여인의 눈웃음처럼 매혹적으로 눈길을 잡아야 한다"등 숱한 편집 명언들을 쏟아냈다. 말과 글에 미숙한 초보 편집기자는 더욱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 언제 제대로 밥값을 하게 될까 고민하던 때였다. 친한 선배가 최명희의 '혼불'을 권했다. 그는 "이 책을 읽기 전 우리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고 했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하는 '혼불'을 '그 온몸에 눈물이 차오른다'의 10권 맨 마지막 줄까지 읽기까진 보통 책 읽던 것에 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여느 소설처럼 책장이 쉬 넘어가질 않았다.

기본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1930년대 남원의 매안 이씨 집안의 삼대 종부가 큰 축이다. 청상의 몸으로 기울어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과 허약하고 무책임한 종손 강모를 낳은 율촌댁, 강모와 결혼한 새 며느리 효원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책 읽는 속도가 느려진 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글의 향연 때문이다. 조탁된 언어란 게 이런 것일까. 우리말의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만 모아 부드러운 운율 위에 춤을 추게 한 것 같았다. 글도 글이지만 내용의 애잔함도 깊었다. 어린 딸아이의 동상 걸려 썩어가는 볼살을 뜯어내던 만주의 유랑민 대목에서도 계속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지막 권에서 비련의 여인 강실이 효원의 도움으로 마을에서 도망가려다 옹골네의 계략에 걸려들 때는 앞으로 닥칠 비극을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아 그만 책장을 덮어 버렸다. 가슴이 무뎌지기 까진 한참이 걸렸고, 수 일이 지나서야 남은 페이지를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 뒤 10여 년이 흘러 여행기자를 할 때 '혼불'의 자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전북 남원 취재길에 그곳에 있는 혼불문학관을 찾았다.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은 작가의 사실상 고향으로 소설 '혼불'속 이야기의 무대가 된 곳이다. 솟을 대문 우뚝한 종택과, 청암부인이 팠다던 청호저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 덕에 '혼불'을 다시 음미할 수 있었다. 5년 전 효원의 모델이기도 한 구순이 넘은 종부가 종택의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남의 일 아닌 것처럼 안타까웠다.

전남 보성땅을 지나다 우연히 대숲이 우거진 강골마을을 지날 때였다. 문득 이곳이 효원의 친정인 '대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중 최명희의 연보를 들춰보니 작가의 어머니 고향이 바로 강골마을이 있는 보성군 득량면이었다. 예감이 적중했다. '혼불'이 대숲마을로 나를 안내했고, 전통을 간직한 아름다운 강골마을을 남 보다 먼저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혼불문학관에서 작가가 '혼불'을 쓰며 남겼다는 글귀를 취재수첩에 받아 적어놓은 게 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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