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의 시-어느날 문득

2005.01.12 20:14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634 추천:39

2003년 7월19일 토 중앙일보<조옥동의 시와 함께>


어느 날 문득

                                    마종기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긴 질긴 내 그림자가
팔 잘린 고목 하나를 키워 놓았어.
봄이 되면 어색하게 성긴 잎들을
눈 시린 가지 끝에 매달기도 하지만
한 세월에 큰 벼락도 몇 개 맞아서
속살까지 검게 탄 서리 먹은 고목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은 힘 지친 잉어 한 마리
물살 빠른 강물 따라 헤엄치고 있었어.
정말 헤엄을 치는 것이었을까.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 것이었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한 채
잉어 한 마리 눈시울 붉히며 지나갔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모두 그랬어, 어디로들 가는지.
고목이나 잉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뚝심이 없었던 젊은 하늘에서
며칠내 그치지 않는 검은색 빗소리.

얼마 전, 집 앞의 삼 십 년도 넘게 자란 돌배나무의 가지치기를 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잘려 나가 몸통만 남은 형상은 마치 죽은 듯이 보인다. 사람의 눈에는 죽은 듯 보여도 새들은 여전히 찾아와 새잎이 무성하게 피어날 줄을 알고 뜨거운 햇빛과 너무 밝은 달빛에 대하여 재잘거린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치기를 한 돌배나무처럼 계속 새가 날아 올 것을 기대함은 꿈일까?
어느 날, 동창들의 이름이 명단에서 지워지고, 부모 또는 가까운 이들이 뗏장 위의 묘비로 누워버린다. 옆을 보니 동행하던 사람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비좁게만 여겼던 집에는 노친 내외만 동그마니 앉아 집안은 휑하니 적막감조차 감돈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 60의 고개는 마치 가지 잘린 고목처럼 또는 강물 따라 헤엄을 치는지 빠른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물고기처럼 지쳐있어 생생했던 젊은 날의 회상은 눈시울 붉히며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세월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 아니고 연륜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다.
산다는 일,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넘어지고 다치고,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질기게도 살아왔다. 수많은 일들은 따지고 보면 예고도 없이 문득 문득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때로는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어느 날 닥쳐 온 실패와 고난으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하게 가슴을 태우고 큰 상처 입지 않은 사람 세상에 몇이나 있는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 어두운 하늘의 빗소리도 아랑곳없이 열심히 가노라면 예상치 못한 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문득 '열심히 산다는 것' 에 회의를 느껴도 「세상은 언제나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아직도 성긴 잎새를 피우고, 피라미가 아니고 잉어가 되어 헤엄치는 마종기 시인이 나는 부럽다. 36년간 의사로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명망 있는 시인으로서 수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한국문학작가상, 미주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포함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60은 젊은 나이인데 일선에서 은퇴하여 문학의 절정을 향하여 자신의 호흡을 다듬고 있다. 서정적 자아 속에 서사 성이 수필적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평가되는 마종기 시인의 시(詩)들은 "사람들은 자라면 고향을 떠나"듯이 그리움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어 멀리 떠나 온 우리들의 가슴에 공명을 일으킨다. 그가 산행(山行)을 한다면 배낭을 지고 따라나서 그의 진솔한 얘기에 귀 기울이고 싶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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